주간동아 713

2009.12.01

눈만 자극하는 ‘할리우드 오버 액션’

롤런드 에머리히 감독의 ‘2012’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09-11-30 1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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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만 자극하는 ‘할리우드 오버 액션’

    2012년 지구 대재앙을 소재로 다룬 영화 ‘2012’의 스케일은 관객을 압도한다.

    1998년 지구 멸망 시나리오가 가속화했을 때, 할리우드는 아주 신이 났다. ‘딥 임팩트’니 ‘아마겟돈’이니 하는 영화는 죄다 혜성 충돌을 상정하며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으니까. 바로 그해 롤런드 에머리히 감독은 재난영화 대신 괴수물인 ‘고질라’에 올인했다. 시나리오는 엉망이었고, 원조 고질라에 매료된 사람들은 분노했으며, 평론가들은 최악의 평점을 매겼다. 그래도 에머리히의 ‘고질라’ 카피는 꿋꿋했다. ‘size does matter!’(크기가 모든 것이다) 에머리히는 이후 이상기후를 다룬 ‘투모로우’와 ‘10,000 BC’를 발표하면서 꾸준히 크기의 승부사를 자처했다. 그가 최근 또 하나의 재난영화를 내놨다. 바로 ‘2012’다.

    2009년 인도의 한 과학자는 지구 내부가 심각하게 끓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2010년과 2011년, 모종의 전 지구적 계획이 국가 원수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진행된다.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던 2012년 어느 날 미국, 이혼 후 두 아이와 아이다호 주 옐로스턴국립공원에서 여행을 즐기던 잭슨 커티스(존 쿠색 분)는 그곳이 곧 거대한 활화산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다주고 되돌아나온 것도 잠시, 캘리포니아는 지진에 휘청거리고 지구는 재앙에 휩싸인다. 잭슨은 차를 타고 전속력으로 가족을 구하러 간다.

    ‘2012’의 스케일은 압도적이다. 한국 영화 ‘해운대’보다 몇 곱절 더한 쓰나미가 히말라야 에베레스트를 덮치고, 백악관 앞마당에 JFK 항공모함이 밀려온다. 한마디로 CG팀의 개가다. 에머리히의 미국 내 모든 랜드마크 때려부수기는 관객들의 눈동자를 1mm 정도 늘려놓는다. 특히 주인공 가족이 경비행기를 탈취해 LA 상공을 날면서 부감(俯瞰·높은 곳에서 내려다봄) 샷으로 체험하는 LA 지진의 전모는 가히 시각적 롤러코스터의 경지에 들어섰다 하겠다.

    그런데 그것뿐이다. 이 명불허전의 스펙터클에서 논리나 합리성을 바라서는 안 된다. 어떻게 지구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휴대전화는 터질 수 있는지, 어떻게 CNN은 계속 생방송으로 지구 종말의 순간을 세계에 타전할 수 있는지 머리를 굴려서는 안 된다. 게다가 이 경이적인 스펙터클 앞에서 할리우드의 가족주의, 알량한 영웅담, 동물과 아이는 죽지 않는 수칙은 고이 살아남아 빈약한 스토리의 살을 채운다.

    사실 에머리히의 욕망은 조물주의 욕망이다. 이제 미국의 북부가 남극이 되고, 남아프리카는 새로운 에덴동산이 되고, 중국은 마지막 세계 구원의 터전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기후 변화, 거대한 괴수, 선사시대의 역사 쓰기. 한 손에 카메라를, 한 손에는 지구와 모든 인류의 운명을. 그러다 보니 3000억원은 가벼운 돈이고, 러닝타임 150분은 긴 시간이 아니다. 요즘 개그콘서트 버전으로 하면 영화 한 편 만들면서 30억 쓰는 건 그냥 비디오 촬영하는 수준이고, 조금 불행한 거다.



    그러나 ‘지구 새로 만들기 놀이’가 아무리 재미있다 해도 영화의 마지막, 과학자 애드리언이 인류애를 강조하며 후대들에게 우리 역사가 인류의 재앙과 말살에서 시작돼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는 장면은 할리우드 오버액션의 극치다. 사실은 어떠한가. 미국은 인디언의 피와 말살 속에서 비(非)민주적으로 역사를 시작하지 않았나.

    ‘2012’는 모든 재난영화의 비빔밥으로 인류 멸망이라는 비장함마저 한순간의 거품처럼 소비된다. 주인공의 캐릭터만 ‘노아’이지 성경 근처에도 가는 법이 없다. 그러니 ‘Happy Doomsday!’(인터넷 IMBD 사이트에서 퍼왔다. 양해하시길…)다. ‘2012’의 비전은 묵시론적이라기보다, 순전히 눈요기용이다. 머리와 가슴은 빠져 있고 눈만 뜬 불구의 스펙터클. 2030년쯤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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