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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국제 표준화 놓고 ‘鍼 삼국지’

한·중·일 시장 주도권 잡기 미묘한 신경전 … 한국, 한방시술 과학적 분석 뒷받침 시급

  •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국제 표준화 놓고 ‘鍼 삼국지’

국제 표준화 놓고 ‘鍼 삼국지’

침을 맞을 때의 짜릿한 느낌인 ‘득기’를 느낄수록 침의 효과가 커진다고 알려져 있다. 같은 부위를 치료하면서도 나라마다 사용되는 침 종류는 물론 침을 꽂는 위치, 시술방식도 달라 국제 표준화가 시급하다.

2001년 미국 버몬트대 헬렌 랜저빈 박사팀은 침술(鍼術)이 신체 조직에 일으키는 효과를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흔히 침을 맞았을 때의 짜릿한 느낌을 ‘득기감((得氣感)’이라고 한다.

한방에서는 득기감을 느끼면 침의 효과가 커진다고 알려져 있다. 한의사들은 득기감을 주고자 침을 시계 방향 또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

랜저빈 박사팀은 초음파 주사 현미경 분석 결과, 득기감은 피부 아래 2~5mm에 있는 ‘연결조직’이 둘둘 말리면서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침을 특정 방향으로 돌리면 콜라겐으로 이뤄진 연결조직이 소용돌이 모양을 이루며 주변 신경을 자극해 침을 맞은 느낌을 갖게 된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 국가들은 오래전부터 침을 보편적인 치료수단으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같은 부위를 치료하면서도 나라마다 사용되는 침 종류는 물론, 침을 꽂는 위치와 시술 방식이 다 다르다. 아시아에서 사용되던 침술이 미국과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침의 국제 표준화가 한·중·일 과학계의 미묘한 신경전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중국, ‘침 종주국’ 자처 15년 전부터 준비



최근 침이 세계 한방산업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침술은 한·중·일 3국 등 주로 아시아권에서 사용돼왔다. 최근 대체의학 바람을 타고 미국과 유럽에서 주목받으면서 지역성을 점차 벗어나고 있다. 미국 공군은 지난 3월부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는 병사를 위해 침술전문병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미 육·공·해군에서 차출된 군의관 44명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응급환자의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침을 전문적으로 사용한다.

독일에서는 통증 전문의의 70%가 침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침 사용이 이처럼 확대되고 있지만 정작 나라마다 규격과 안전성 기준이 달라 불량품을 적발해도 규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국제 표준이 없다 보니 침을 확산시키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침의 국제 표준화를 둘러싼 움직임은 한·중·일 3개국에서 시작됐다.

침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세 나라가 규격이 서로 다른 호침(일회용 침)의 굵기, 강도, 연성 등 주요 규격을 통일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을 마련하기로 한 것. 호주 베트남 미국 등의 침구 전문가들도 국제 표준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에서 침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중국은 ‘침 종주국’을 자처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자국 주도 아래에 있길 요구한다.

중국은 연간 24억개의 침을 생산해 세계 시장의 64.5%를 점유하고 있다. 한국보다 15년 앞서 일찌감치 자체 표준을 만들어 국제 표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해왔다. 중국 정부는 침을 국가 전략사업으로 지정하고, 1994년 국가표준화관리위원회에서 표준 침을 제정했다. 독자적인 침술 문화를 키워온 일본 역시 이와 동등한 자격을 주장하면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일본은 연간 3억6000만개 침을 생산해 생산량 면에선 중국과 한국에 이어 3위에 머물러 있지만 표준화에선 한국보다 앞서 있다. 2005년 한국보다 한 발 앞서 일본공업표준위원회에서 국가 표준을 만들었다. 한국은 지난 8월에야 비로소 KS 규격을 제정했다. 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제 표준화의 주도권을 둘러싼 지형은 복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국제 표준화 놓고 ‘鍼 삼국지’
국제 표준화의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한 해 수십조원에 이르는 시장 주도권의 향배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종주국 지위 보장을 요구하는 중국과 동등한 참여자 입지를 주장하는 일본 사이에 낀 형국이다.

한국한의학연구원 표준화연구본부 최선미 침구경락연구센터장은 “표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특정 국가가 부각될 경우 훗날 표준화 추진 협상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며 “경쟁이 아니라 공동 모색하는 방향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은 이미 직간접적으로 표준화 과정에서 상당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 호주 베트남 등 여러 나라도 나름의 진용을 갖추고 독자적인 표준화를 추진하지만, 일단 중국 주도의 표준화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가 침 시술법 국제 표준을 정하면서 한국이 제안한 경혈이 부각되자 견제도 심해졌다. 올해 초 국내에서 개최된 표준화 포럼에 중국이 불참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2007년부터 이미 2차례 열린 포럼에 참석한 중국이 3차 포럼에 불참을 통보한 것은 주최국 한국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묶어두기 위한 ‘제스처’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지난해 말 중국 침구학회 주도로 개최하려던 국제 포럼이 한국을 포함한 각국의 불참 결정으로 무산되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과 협력 일본과 공존’ 전략 구사

한국은 “연구 분야는 중국과 협력을 계속하면서 일본과도 공조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계획이다. 최 센터장은 “침체(침이 몸 안에 들어가는 부분)의 길이, 굵기 등 각국의 고유 특성이 담긴 민감한 부분은 협상 분야에서 빠져 있다”면서 “내년부터 ISO(국제표준화기구)에서 진행되는 협상 과정에서 안전성 문제 등이 중점 협의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일부 학자들은 국제 표준화의 논의 속에서 한국이 실리를 찾으려면 침과 뜸 등 한방 시술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연구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침과 뜸은 효능이 있다고만 알려졌을 뿐, 이를 입증할 만한 체계적 연구가 부족했다. 뜸만 해도 제품에 따라 밀도나 질량이 제각각이라 효능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재료와 질량, 대류 환경, 전달되는 온도 등의 관계를 살피면 환경에 따라 어떤 종류의 뜸을 사용할지 예측할 수 있다”면서 “이를 이용해 화상 위험이 있는 뜸을 대체할 장치를 만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연결조직의 형태와 득기감의 관계를 밝히면 덜 아프면서도 침을 맞은 느낌을 주는 신종 침을 만들 수 있다. 흔히 사용되는 침의 표면은 매끄러워 득기감을 주기가 쉽지 않다.

국내에서 개발된 빗살무늬 침도 여기에서 착안됐다. 침이 들어가는 방향으로 무늬를 넣어 찌를 땐 아프지 않고 조금만 돌려도 연결조직을 쉽게 자극하는 방식이다. 과학적 뒷받침과 국제 표준규격을 기반으로 아이디어 기술을 선보여 경쟁력 있는 침을 세계 시장에 내놓는다면, 침 국제 표준화 논쟁에서 한 발 앞서 나갈 수 있을 전망이다.



주간동아 2009.11.24 712호 (p72~73)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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