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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꽃보다 드라마 13

“한 작품 열 달 끙끙 , 애 낳는 고통이죠”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경희 작가 “시청률 의식 않고 창의력 발산하는 게 희망사항”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한 작품 열 달 끙끙 , 애 낳는 고통이죠”

“한 작품 열 달 끙끙 , 애 낳는 고통이죠”

‘상두야 학교 가자’(왼쪽) ‘꼭지’를 쓴 이경희 작가는 “깔깔대며 본 뒤 이불 덮고 누우면 왠지 눈물이 나는 드라마를 쓰고 싶다”고 했다.

이경희 작가는 ‘웃음 밑에 숨은 눈물을 그리는’ 사람이다. 딸아이의 치료비를 대느라 라면만 먹고 사는 제비족 상두(‘상두야 학교 가자’)도, 에이즈에 걸린 딸을 키우는 미혼모 영신이도(‘고맙습니다’) 눈물을 숨긴 채 웃고 살았다.

‘깔깔대며 본 뒤 이불 덮고 누워 생각해보면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는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이 작가는 웃음을 통해 눈물을 전달하는 것이 진심을 더 잘 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회적 편견에 대해 얘기할 때 정색하고 덤비면 부담스러울 수 있잖아요. 무거운 얘기를 하더라도 밝게 해보자 싶었죠. 배우가 울지 않아야 시청자들이 울 거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의 작품 속 또 다른 특징은 따뜻한 ‘엄마 냄새’가 진하게 담겨 있다는 것. 부모에게 버림받은 무혁을 보듬는 은채(‘미안하다 사랑한다’), 정 모르는 청년을 감싸주는 치매 노인 미스터 리(‘고맙습니다’)가 그랬다.

“드라마에 모성이 느껴지는 건 ‘해처럼 살자’는 제 가치관 때문일 거예요. 저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의 힘을 믿거든요. 종갓집 맏며느리인 제 어머니가 평생 친척 뒷바라지하면서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사셨는데, 결국엔 온 식구들로부터 사랑받으시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해와 바람 이야기’란 동화가 떠올랐어요. 나그네 옷을 벗긴 건 차디찬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해였잖아요.”



시골에서 자란 이 작가의 성장 배경도 ‘따뜻한’ 드라마를 쓰는 데 도움이 됐다.

“남해 시골에서 자라선지 자연의 섭리를 웬만큼 알아요. 얼어죽을 듯 힘든 추위를 견디고 나면 어김없이 새싹이 돋는다는 것, 비 오는 날만 있는 게 아니라 바람 부는 날도 있고 햇빛 드는 날도 있다는 것. 그러한 섭리를 느끼면서 ‘긍정의 힘’을 얻게 됐습니다.”

미국은 20~30명, 한국은 한두 명이 집필

한국에서 드라마 작가로 산다는 것은 어떨까. 한국인이 유난히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 왜 그렇게 많은 드라마가 만들어지는지도 궁금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게 작가에게는 큰 힘이 되죠. 우리가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서에 깔린 한(恨)과 정(情) 때문인 것 같아요.”

한국인들은 상대방의 말, 행동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는 예민한 정서를 가졌다는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뒤끝 있고’, 좋게 말하면 ‘사려 깊은’ 한국인 특유의 정서가 드라마 속 캐릭터의 감성을 이해하고 감정을 몰입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

“또 외환위기 때의 금 모으기 운동이나 한일월드컵 때 보여준 단합된 힘에서 볼 수 있듯 남이야 어떻게 살든 관심 없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찾아보기 어렵고, 남의 삶에 관심이 많은 것도 드라마 팬이 많은 이유가 됩니다. 드라마는 태생적으로 ‘타인과 집단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아시아 주변국은 물론, 유럽 중동 미주지역의 서양인들 중에도 한국 드라마에 열광하는 ‘마니아’가 적지 않다. 하지만 “한국이 어떻게 드라마 선진국이 된 것인가”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제작 여건은 여전히 열악합니다. 그런 환경에 비해 잘 만들고 있을 뿐이죠. 세계 어느 나라에도 70분짜리 드라마를 일주일에 2개나 방영하는 데가 없어요. 더욱이 미국 드라마는 20~30명이 달라붙어 일하는데 우리는 겨우 한두 명의 작가가 집필합니다.”

드라마를 찍다 배우가 사고를 당해 방영이 잠시 중단되는 웃지 못할 사건도 발생한다. 사전 제작보다는 ‘순발력 있게’ 급히 찍는 데 익숙한 드라마 제작구조 때문이다.

“드라마가 방영 중에 중단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이렇게 아찔하게 일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큰 문제입니다.”

조정래의 소설을 즐겨 읽던 그의 원래 꿈은 국어교사. 그러나 대학졸업 후 ‘폭풍의 계절’을 쓴 최성실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드라마 작가의 길로 입문했다.

“드라마를 쓴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영화를 볼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는 서민들도 드라마를 보며 살아갈 위안을 얻는다고 해요. 그런 점에서 ‘막장 드라마’도 폄하하면 안 된다고 봐요. 누군가에는 살아갈 힘을 주니까요.”

드라마를 쓰기 전에는 여행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 아이디어를 얻는다. 오늘의 ‘이경희’ 브랜드를 만들어준 대표작 ‘상두야 학교 가자’도 남해 여행의 결과물이다.

“열심히 집필한 드라마 ‘순정’의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아 작가 인생을 끝낼까 생각하던 때가 있었어요. 그 무렵 남해에 사는 친구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막걸리 한 잔에 웃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됐죠. 그들을 보며 상두라는 인물을 찾아냈어요.”

그는 드라마의 성공 요인을 배우의 공으로 돌렸다.

“감정 표현이 자유롭고 순수한 성격의 배우들 덕분에 좋은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어요. 더러는 작가가 캐스팅된 배우의 스타일에 맞춰 캐릭터를 만들어가기도 해요.‘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무혁이도 소지섭 씨 분위기에 맞춰 그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작가는 무혁처럼 마초 성향이 강한 남자를 그리는 데 익숙해 보였다.

“경상도에서 자라서 그런지 지나치게 살가운 남자들을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경상도 남자들은 100가지 할 말이 있어도 ‘밥 무라’(밥 먹어라) 한마디로 끝내잖아요. 요즘 남자들은 이게 왜, 어떻게 됐네 구구절절 설명하는 수다쟁이들이지만….”

그러나 무혁은 “내게 남은 시간, 이 여자만 곁에 주신다면 여기서 다 멈추겠습니다. 나 당신에게 약속합니다” 같은 낯간지러운 대사를 읊어 여성들의 애간장을 녹인 바 있다. 남자다운 남자를 묘사하려다 보니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대사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대사는 ‘멋있게 써야지’ 하고 작정하며 쓰는 게 아니고, 캐릭터의 힘으로 저절로 쓰여지는 거더라고요. 물론 생각이 안 날 땐 이틀이고 사흘이고 샤워기에 머리 갖다대고 쓰기도 하지요.”

샤워기 물세례 때문일까. 회색 티셔츠에 검정 카디건을 입은 그의 머릿결이 푸석해 보였다.

“한 작품 열 달 끙끙 , 애 낳는 고통이죠”

작가는 배우의 스타일에 맞춰 캐릭터를 만들어간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무혁(오른쪽)도 그랬다.

“다양한 소재 다룰 수 있기를”

드라마 작가로 산다는 것은 당연히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다. 창작의 고통이다.

“1회분을 만들 때마다 11포인트로 A4용지 35장 분량의 글을 써야 해요. 그러다 보니 16부작만 진행해도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죠.”

그는 드라마 한 편을 세상에 내놓는 일을 ‘출산’에 비유했다.

“드라마 한 편 준비하는 데 열 달이 걸리니까 아이 하나 낳는 것과 같다고 보면 돼요. 드라마 쓰는 동안은 눈앞에 컴퓨터가 없으면 불안해서 침대에서 자지도 못해요. 피자 한 판 시켜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결할 때도 많고요. 캐릭터를 그리기 위해 건축가, 한의사 같은 전문직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면 현장 취재도 나가야 합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쪽대본’을 써본 적이 없는데, 늘 빠듯하게 대본을 넘기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마감이 코앞에 닥쳐야 글이 더 잘 나오거든요.”

그는 사진촬영을 정중히 거절했다. 한예슬·고수 주연으로 12월부터 방영되는 SBS 드라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를 쓰고 있어 “몰골이 형편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가 드라마 작가로서의 ‘희망사항’을 이렇게 얘기했다.

“피 터지게 시청률 경쟁을 펼치다 보면 좋은 드라마를 쓸 수 없어요. 다양한 소재를 다룰 수 없고 대중이 좋아하는 것에만 집착하게 되니까요. 시청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주간동아 2009.11.24 712호 (p52~53)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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