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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콘텐츠 왕국 日本 03

‘일본 스토리’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일본 스토리’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일본 스토리’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현대인 불안을 먹고 크는 ‘괴담’
언제 어디서나 등장해 공포감 키워 … 끊임없이 재탄생, 영원히 증식


‘야오요로즈노카미(八百万の神)’라는 말이 있다. ‘800만의 신이 사는 나라’란 뜻으로 일본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800만’이라는 수는 양을 이야기한다기보다 그만큼 많은 신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일본 전통사상에서는 ‘산에 자라는 나무에서부터 돌 따위의 무생물까지 신은 삼라만상에 깃들어 있으며, 그렇기에 세상은 사람뿐 아니라 온갖 자연물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곳’이라고 여긴다. 서양의 신이 교회에 있다면 일본의 신은 발길에 차이는 돌에도 있다.

이처럼 공포와 외경의 대상인 신이 만물에 깃들어 있으니 일상이 곧 괴담의 세계나 마찬가지다. 일본의 괴담 전통은 이런 사상적 배경에서 시작한다. 그렇기에 서양의 호러 전통이 특정 대상에 대한 비현실적인 폭력성을 기반으로 한다면, 일본 괴담은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 사는 나와는 다른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다.

서양에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는 악마나 괴물 같은 폭력의 집합체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 삶에 급작스럽게 끼어들어 생명을 위협한다. 하지만 그들의 폭력에 영향을 받는 것은 주로 ‘어떤 이유’에 관여한 특정 인물이나 집단에 한정되고, 논리적인 이유로 그들을 피하거나 퇴치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를테면 비정상적인 폭력성을 내재한 연쇄살인범이다.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할로윈’의 마이클, ‘나이트메어’의 프레디가 대표적인 경우이며, 특히 최근에 와서는 점점 잔인한 살인마를 내세우는 영화가 주를 이룬다.



자가증식 거쳐 정점에 이르는 괴담

반면 일본에서 공포의 근원이 되는 존재는 폭력적이라기보다 존재론적이다. 서양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알아차리지 못한 순간 삶에 편입되지만, 그들의 행동이나 존재에서 아무런 논리적인 이유도 의미도 찾을 수 없거나 모호한 경우가 많다. 하굣길에 만난 빨간 마스크 쓴 여자가 자신이 예쁘냐고 묻는 말에 예쁘다고 대답하면, 마스크를 벗고 양쪽으로 찢어진 입을 보이며 이래도 예쁘냐고 묻는다.

빨간 마스크를 한 여자의 정체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고 등장하며 왜 이런 행각을 벌이는지 또한 짐작할 수 없다. 때문에 더욱 공포스럽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며, 생명의 위협이 아니더라도 이들의 존재가 우리 삶 가까이 있다는 자체로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일본의 괴담은 일상의 소소하고 보편적인 불안이 커져 발전한 형태가 많다. 실제로 일본 공포영화를 할리우드에 전파시킨 ‘링’에서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가 공포의 근원이며, ‘주온’에서도 소름끼치는 공포를 안겨주는 것은 이불 속, 머리카락, 지붕 아래 빈 곳 등으로 우리 주변 곳곳에 있다. 공포만화의 대가 이토 준지의 작품을 보면 그런 점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소재로 삼는 공포의 대상은 배수관, 허수아비, 골목길, 곰팡이, 아이스크림 버스, 전화, 달팽이, 벽, 금붕어 등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작가는 얄궂게도 삶에 가장 밀착한 사물들에서 삶과 완벽하게 동떨어진 존재들을 창조해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일본에는 오래전부터 많은 괴담이 전해져왔다. 전해져왔다기보다 사람들의 삶에 유입돼 함께 생멸했다. 에도 시대(1603~1867)부터 이어진 괴담들은 현대에 이르러 자가증식을 거쳐 정점에 다다르고 있다.

현재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괴담 가운데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지금 일상에 맞게 변형된 것도 적지 않다. 에도 시대 한 관리가 당시의 기이한 이야기를 수집해 기록한 ‘미미부쿠로(耳袋)’라는 괴담집은 ‘소문을 모아 수집한 이야기 주머니’라는 뜻으로 총 10권에 1000편의 기담이 담겨 있는데, 이 중에는 형태만 바뀌어 현대의 도시 괴담이 된 이야기도 많다.

실제로 이 형식을 본떠 현대의 괴담을 모은 ‘신(新)미미부쿠로’라는 괴담집과 드라마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특징들은 한국 태국 중국 등 아시아의 전통적 괴담들과 비슷하거나, 적어도 특별히 다르지는 않다. 일본 특유의 전통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른 점이라면 일본은 괴담을 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여 향유하고 재생산해왔다는 데 있다.

‘나 홀로 숨바꼭질’ 하는 이유

‘일본 스토리’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토미에는 현대 일본에서 성장하는 괴담의 생태와 닮았다. 끊임없이 재탄생하고 증식한다.

최근 일본의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나 홀로 숨바꼭질’이라는 놀이가 유행처럼 번지며 특이한 일들이 벌어져 화제다.

이 놀이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정교하게 마련한 준비물로 새벽 3시에 혼자 행하는, 일종의 귀신을 불러내는 ‘주술’이다. 놀이를 한 뒤 알 수 없는 현상들을 보고 듣고 느꼈다는 경험담이 인터넷에 연달아 올라오면서 누리꾼들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예전에는 원하지 않은 상황에 빠져 공포나 두려움을 느꼈다면, 이 놀이에 와서는 스스로 주술을 행해 공포를 맛본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섬뜩한 경험담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자신 또한 같은 경험에 참여하고 싶다는 특이한 감성을 공유했다. ‘나 홀로 숨바꼭질’은 현대에 들어 새로 등장한 괴담이다.

가족이나 학교 같은 공동체는 점점 사라지고 파편화해 오로지 혼자만을 위해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불안감을 표출한 괴담이라고 할 수 있다. 형태로만 보면 1980~90년대에 유행한 ‘분신사바’와 닮았지만, 분신사바가 여러 명이 모여 무언가를 알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낸 주술이라면 ‘나 홀로 숨바꼭질’은 혼자서 하는 놀이라는 특징이 있다. 일본에서 괴담은 단순히 무섭고 두려운 마음을 해소하려는 수단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문화처럼 향유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탄생한다.

예를 들어 ‘링’의 원작자이기도 한 소설가 스즈키 고지의 신작 소설 배경이 공중화장실이라는 점에 착안, 그 내용의 일부를 인쇄한 화장지가 생산되기도 했다.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귀신이나 도깨비 등 무서운 이야기들이 상대적으로 자리를 박탈당하거나 억눌려 있는 한국과는 다른 상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몇 작품이나 영화로 만들어진 이토 준지의 작품 ‘토미에’는 매우 상징적이다.

토미에는 처음 작품에서 지나친 아름다움 때문에 학생들의 질투와 교사의 욕망에 희생됐다 되살아난 존재다. 그녀는 토막난 상태로 곳곳에 버려지는데, 각각의 신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토미에가 되어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 되살아난 토미에는 기괴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예전보다 큰 매력을 풍기며 사람들을 유혹하는데, 유혹당한 사람들은 토미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동시에 그를 살해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결국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이 만난 토미에를 죽이지만 그 죽음 속에서 토미에는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며 영원히 증식한다. 토미에는 현대 일본에서 성장하는 괴담의 생태와 닮았다. 사람들은 무서움에 떨면서도 괴담이나 공포영화의 매력에 빠진다. 때로는 익숙하고 때로는 새로운 모습의 괴담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장소,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재탄생한다.

괴담에 크게 놀란 사람은, 다시는 무서운 이야기를 듣거나 보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사실 괴담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는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 사거리에, 손을 씻는 세면대에, 곤한 머리를 내려놓은 베개 아래에, 심지어는 꿈속에 늘 자리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의 일상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공포에 익숙한 서양 사람들에게는 생경할 수밖에 없는 공포다. 일본의 괴담과 호러 전통은 여전히 진화 중이다. 몇몇 작가나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에 내재한 하나의 문화현상이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임지호 북스피어(booksfear) 편집장 jeeho.lim@gmail.com

세분·극단 취향의 사생아 ‘변태’
성적 개방성·다양한 만화 장르 … 자기 세계 추구가 日 대중문화의 ‘진짜’ 근간


‘일본 스토리’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일본인의 변태성은 종종 성적 방종으로 이해된다.

일본인의 긍정적 이미지를 몇 가지로 추려보자. 근면, 성실, 소박, 정확성, 치밀함…. 그렇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일본인의 부정적 이미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 잔학성, 종전 후의 뻔뻔한 태도 등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근래에 쌓인 또 다른 부정적 이미지가 있다. ‘변태성’이다. 일본인의 변태성은 한국 사회에서 성적 개방성 또는 성적 방종으로 이해된다. 일본 대중문화가 철저히 제어되던 시절, 일본을 다룬 몇몇 서양 영화에서 이 같은 성향이 드러났다.

시드니 폴락 감독의 ‘야쿠자’, 미니시리즈를 한 편의 영화로 묶은 ‘쇼군’ 등은 일본인-특히 일본 ‘여성’-의 성적 분방함을 상세하게 드러내 큰 화제가 됐다. 여기까지는 사실 ‘문화 차이’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정작 문제가 된 건 일본 만화가 해적판으로 우리 만화대본소를 장악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다.

다소 변태적 성 묘사를 담은 ‘시티 헌터’ ‘정크 보이’ ‘실험인형 더미 오스카’ 등이 일본의 ‘변태문화’를 청소년에게 인식시켰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비디오데크가 보급되면서 이 같은 현상은 가속화됐다. 애니메이션 마니아층이 ‘공수’해온 ‘우르츠키 동자’ ‘크림 레몬’ ‘레몬 엔젤’ 등 성인용 OVA(오리지널 비디오 아니메·극장이나 TV를 거치지 않은 비디오용 애니메이션)가 음성시장을 강타했다.

수많은 서브 장르가 만든 1조 엔대 거대 시장

1990년대는 일본에서도 AV(어덜트 비디오·성인용 비디오) 전성기였지만, 한국에서도 그랬다. LD(레이저 디스크)라는 새 미디어를 타고 그라비아 비디오가 노래방 화면으로 소화되고 PC통신, 인터넷을 거치면서 우리 정서로는 이해하기조차 힘든 극단적 변태성욕 자극 콘텐츠가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일본 쇼 프로그램에 AV 배우들이 버젓이 등장하고, 급기야 AV 스타 아오이 소라가 내한해 어버이날 서울시민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퍼포먼스를 벌이자 충격은 배가됐다. 일본은 ‘변태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일본은 정말로 성적 변태들의 나라일까. 다른 건 몰라도 성 상품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다.

일본 AV산업은 약 1조 엔대 규모의 시장이라 알려져 있다. 우리 돈으로는 13조5000억원 정도다. 한국 영화시장 전체 규모가 2008년 기준 1조2215억원이었다. 전 세계적 위용을 자랑하는 할리우드 CG산업 규모도 2조원대에 머문다. 그러나 성 상품의 인기와 ‘변태성’과의 연결고리를 쉽게 이을 건 못 된다. 우리가 일본 성 상품에 대해 가진 인식은 상당 부분 ‘지나치게’ 카테고리화한 ‘다양성’에 있다.

모델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니기만 하는 그라비아 비디오가 있는 한편 레이프(강간)물, 난파(헌팅)물 등 기기묘묘한 특정 욕구를 채워주는 서브 장르 또한 즐비하다. 간단하게만 따져봐도 수십 종이다. 또한 장르마다 전문제작사들이 따로 있다. 그런 라벨 자체가 상품 선택의 코드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장르는 이른바 ‘주류’가 아니다.

다른 식으로 접근해보자면, 일본 AV시장에 딱히 ‘주류’란 없다. 수많은 서브장르가 각자 극단적으로 분화된 시장을 나눠가지며 1조 엔짜리 거대시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서브 장르, 그중에서도 극단적인 서브 장르들이 한국으로 불법 유입돼 ‘변태성욕자들의 천국 일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넓게 보면, 이 같은 다양성의 문제가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에 ‘변태’ 딱지를 붙여주는 셈이다.

일본 대중문화 산업 중 가장 경쟁력 있는 만화시장을 살펴보자. 일본에는 장르가 많다. 학원물만 해도 학원 스포츠물, 학원 폭력물, 학원 판타지물, 학원 성애물, 학원 동성애물 등 수도 없다. 물론 우리도 이런 장르를 소화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일본에서 소화된 장르 중 상당수가 척박한 한국 만화 현실에서도 기어이 도입됐다. 그러나 한국은 ‘유행’을 탄다. 예컨대 1980년대 초반은 시대극의 시대였다.

항일물과 중국고전물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이후 스포츠물이 강세를 보였다. 야구, 축구, 농구 심지어 씨름까지 만화화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선 시대극이 뜸해졌다. 그러나 일본 시장에는 이런 식의 붐이 없다. ‘슬램덩크’가 인기를 끌었다면 수없이 갈라진 장르 시장 중 스포츠물 쪽에 ‘농구’ 카테고리가 하나 더 정착될 뿐이다. 히트작이 늘수록 서브 장르는 더 세분화한다.

그리고 그 상태로 더 고도화한다. 이른바 ‘하드코어’ 장르 만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림보다 동작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이 더 많은 면을 차지하는 만화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현상은 만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 음악, 공연 등도 같은 맥락에서 세분화한다. 일본에는 아직까지도 단관상영을 중심으로 한 독립영화 시장이 살아 있고, 도쿄 시부야를 중심으로 한 인디음악 신(scene), 실험극단들이 존재한다.

이미 그 자체로 세분화 시장이 성립된다. 그러나 이것이 더 극단화한다. 독립영화 중에서도 기괴한 취향을 챙겨주는 비디오용 영화들이 나온다. 여고생이 좀비들과 유혈낭자한 사투를 벌이는 스플래터(피가 튀고 신체가 절단되는 등 잔인한 공포영화지만 분위기는 대개 코믹하다) ‘최강 여고생 리카’ ‘오네찬바라’ 등이 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신중현 음악만을 연주하는 카피밴드 ‘곱창전골’까지 활동할 수 있는 마니아적 서브시장이 생성됐을 정도다. 한국 트로트 가수 이박사가 부도칸(武道館) 공연까지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서브 시장이 탄탄해서다. 몇십 년째 셰익스피어극만 공연하는 극단도 같은 서브 지향을 바탕으로 한다.

세상 유행과 관계없는 나만의 붐

‘일본 스토리’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일본 만화시장에 주류는 없다. 수많은 서브 장르가 존재할 뿐이다.

일본에는 그래서 ‘마이 붐’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세상 유행과 관계없는 ‘나만의 붐’ ‘나만의 유행’이라는 의미다. 조금 기괴한 취미를 갖고 있더라도 ‘마이 붐’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당화된다.

그리고 ‘마이 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요건은 어느 분야라도 충실히 갖춰져 있다. 일단 그 지식적 요구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출판시장이 단단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마니악한 취미, 예컨대 종이 글라이더 접기 같은 것만 해도 관련 서적이 수십 종이며, 심지어 고대 화살촉에 대한 서적도 수권이 나와 있을 정도다. 그러니 극단적 취미, 극단적으로 세분화한 취향이 만족된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변태성’으로 비친다. 일본 AV에 빠져 있지 않더라도, 누군가 쌀 한 톨에 깨알 같은 그림을 새겨넣는 취미가 있다면 우리 눈에는 그 사람 역시 변태로 보인다.

일본인이 이런 성향을 지니게 된 데는 여러 분석이 따른다. 기본적으로 ‘혼네’(本音·속마음)와 ‘다테마에’(面前·겉으로 드러난 태도)가 철저히 나눠진 생활양식 탓에 내적 개별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는 조건이 있다. 사회적 통일성을 강조하다 보니 그에 따른 개개인의 반발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원인이야 명확히 알 수 없겠지만, 이 같은 경향을 쉽게 드러내는 사회 분위기는 분명히 있다.

결국 지극히 세분화한, 극단적 성 관련 콘텐츠를 통해 널리 홍보(?)된 일본 문화의 ‘변태성’은 사실상 일본 문화 자체에 깊이 배어 있는 ‘자기 세계 추구’ ‘마이 붐’ ‘혼네’ 풍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 대중문화 시장의 근간을 일궈낸다. 작지만 충성도 높은 서브 시장들이 모여 큰 시장을 만들어낸다.

일본은 이런 점에서 작은 문화 콘텐츠 공급업자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라벨이라도 자기 시장을 찾아간다. 하다못해 아마추어들이 그린 만화 동인지 시장조차 정착된 나라다. 그러나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 데 빼놓지 말아야 부분도 물론 있다. 일본 대중문화 시장은 ‘작은 것’과 ‘세분화’한 것, ‘극단적인’ 것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장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절대다수는 여전히 ‘해리 포터’를 보러 줄을 서고, 아이돌 그룹 ‘아라시(嵐)’의 음반을 산다는 것이다.

DVD 매장의 AV 코너에는, 고객들이 여전히 서로 눈치를 보며 잘 얼씬거리질 않는다. 그들만의 ‘소중(小衆)문화’가 일본인 절대다수가 즐기는 ‘대중문화’라 착각해선 곤란하다. 일본의 문화환경은 ‘변태’도 받아들이고 만족시켜주는 환경으로, ‘변태’들이 탄탄히 기반을 받쳐주고 있을 뿐 ‘변태들이 중심에 선’ 환경은 아니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l.com

유치하지만 귀여운 놀이 ‘가와이’
연령 인지력 망각시키는 무국적성 … 창의적 아이디어 경쟁 기능으로 확대


‘일본 스토리’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1974년 11월1일 ‘태어난’ 헬로 키티(ハロ-キティ)는 단순한 얼굴에 입도 없고, 표정도 없다. 그래서 헬로 키티 ‘오타쿠’들은 모두 자신의 얼굴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캐릭터를 볼 때마다 타임머신을 타고 아주 순수하고 착했던 과거 어느 한순간으로 귀환했다고 착각하며, 그걸 믿는 자신을 대견해한다.

헬로 키티 이미지로 집 안의 모든 인테리어와 사물(벽지, 책장, 식탁, 소파, 가전제품 등)을 꾸미고, 작은 물건에까지 헬로 키티 디자인으로 맞추기를 즐기는 마니아를 ‘키티라(キティラ)’라고 부른다(헬로 키티의 캐릭터 상품 목록을 보면, 높은 도수의 술을 제외하고는 상품화하지 않은 것이 없다). ‘키티라’는 일종의 ‘제례적’ 행위로 스스로를 유치하지만 착하고 순수했던 유아시절의 자아로 포지셔닝한다.

역설적이지만, 여성학자들은 헬로 키티를 성적인 상품 코드로 분석하기도 한다. 헬로 키티가 지닌 순수한 ‘기표(記表)’가 다른 성적 상품 코드의 ‘기의(記意)’를 합리화하는 장치로 활용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무표정한 하얀색의 고양이가 섹시하게 느껴지는 해석 과정은 일본에서 가와이 문화가 엽기 문화와 중첩되고 변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독특한 가와이 문화는 유치할 정도의 귀여움을 자신만의 문화로 특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한다. 가와이 문화의 무국적성은 연령 인지력을 망각시킨다. 사람들은 귀여운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의 귀여움을 간접적으로 평가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신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10대의 감성적 취향으로 시작된 가와이 문화가 청년은 물론 중년, 노년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애니메이션 대사로 임명된 도라에몽

일본 정부는 가와이 문화를 국가 브랜드로 활용해 문화상품으로 전략화하고 있다. 미국의 ‘스마트파워’에 대응하는 일본의 ‘큐트파워’로서의 문화 전략은 이른바 의식주 문화의 다양한 아이템, 즉 패션, 음식, 주거용품, 가전용품, 개인 액세서리용품 등과 연계된다.

일본 외무성은 최근 일본 패션을 세계 브랜드로 홍보하기 위해 ‘가와이 대사(大使)’ 3명을 임명했다. 가와이 대사로 뽑힌 3명의 여성은 각각 여고생의 청순한 교복 패션, 계급적 판타지를 내재한 공주풍의 롤리타 룩, 10대들의 패션 거리 하라주쿠(原宿)의 차별화한 유행 패션을 상징한다. 이런 이벤트는 일본 특유의 귀여운 패션코드가 국가적 상품 브랜드로 특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외무성은 스테디셀러 만화 캐릭터인 ‘도라에몽’을 애니메이션 문화대사로 임명, 태국 대만 등 아시아에서 홍보활동을 펼쳐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자평했다. 미국이 소프트파워로 대변되는 블록버스터 영화로 미국식 꿈의 문화를 상품화하는 것처럼 일본도 큐트파워를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로 연계해 일본식 문화상품의 세계화를 선도하고 있다.

‘일본 스토리’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일본 사회는 가와이 문화를 국가 브랜드로 활용해 문화상품을 만들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도라에몽의 애니메이션 문화대사 임명식.

실제로 올해 서른다섯 살이 되는 헬로 키티는 여전히 가와이 키드의 표상으로 70개국에서 매년 5만 종류의 신상품이 쏟아져나올 만큼 세계적 판타지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패션업체 크리스찬 디올, 스와로브스키 등이 헬로 키티를 이용한 휴대전화 액세서리를 선보였고, 패스트푸드업체 맥도널드는 미국과 대만에서 어린이 메뉴를 구입하면 헬로 키티 손목시계를 나눠주는 마케팅을 펼쳤다. 지속적인 마케팅은 세대 간 간극을 허물며 키티 세대를 끊임없이 증식하고 있다.

가와이 문화는 좁은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섬나라 사람들의 문화에서 출발한다.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독자층을 늘려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축소지향의 본능적 욕구와 시각적 귀여움, 순수한 감성을 동시에 충족하는 자국 문화 덕분이다. 귀여움을 놓고 벌이는 자발적 경쟁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오타쿠 문화를 기반으로 일본식 삶의 방식이 되고 있다.

20세기 말 일본의 세기말 증후군과 함께 개인주의가 극대화한 젊은 세대들의 소비유형이 자신만의 특화된 공간문화로 축약됐다. 오타쿠의 문화적 행태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동일화로 연계되면서 가와이 문화는 더욱 심화됐다. 가와이 문화의 여러 행태 중에서 최근 특화한 장르가 ‘모에(萌え)’다. ‘모에’는 ‘움트다’라는 뜻의 일본어 동사 ‘모에루(萌える)’에서 유래한 말로, 젊은 세대에서 사랑스럽고 귀엽고 예쁜 느낌을 표현하는 구어체다.

휴대전화, e메일, 인터넷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최근에는 특정 캐릭터에 한정되지 않는 외형적 특징이나 성격, 그리고 직업이나 사회 지위 등 속성을 기호화하는 말로 쓰인다. 예를 들면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F4 같은 꽃미남 주인공이나 ‘바람의 화원’에서 배우 문근영의 남장여자 역할처럼 유치함과 귀여움이 심화된 코드를 문화 소비자들이 스스로 조합해 새롭게 만들어내는 과정을 ‘모에 문화’라고 한다.

일본에서 모에와 관련한 시장 규모는 크게 증가하고 있다. 영화, 드라마, 가요는 물론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등 문화 전반에 모에 코드가 활용되고 있으며, 관련 상품 매출액만도 한 해 1000억 엔(약 1조3500억원)을 넘고 있다.

‘모에산업’ 매출 1000억 엔대

모에 상품 코드가 이처럼 대중적인 호응을 끌어내는 사회적 이유는 소비세대의 전면에 배치된 젊은이들의 오타쿠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베이비붐 부모세대의 산업화 노력 덕분에 경제적인 풍족함을 누리며 전쟁 없는 성장과정을 경험한 20, 30대 오타쿠 세대는 TV와 콘솔게임의 발달로 풍요로운 문화적 경험과 혜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성장했다.

그렇기에 놀이문화에 대해 본능적인 동질의식을 지녔으며, 실제 공간과 사이버 공간을 혼동하는 일상 속에서도 잘 적응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생활방식을 기반으로 만화, 게임의 캐릭터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코스프레(‘복장’을 뜻하는 ‘코스튬(costume)’과 ‘놀이’를 의미하는 ‘플레이(play)’의 합성어) 이벤트를 일상화한 패션쇼처럼 인식하고, 시간을 앞서가는 패션의 한 유형으로 이해한다. 모에 코드는 의식주 문화의 변형을 통해 캐릭터의 판타지를 일상으로 동질화하는 기능을 한다.

2006년에 시작된 라이트 노벨(light novel·10, 20대를 겨냥해 만들어진 일본 소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는 국내에서도 3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교복 입은 미소녀가 주인공인 이 시리즈는 ‘우울’을 시작으로 ‘한숨’ ‘무료’ ‘소실’ ‘폭주’ ‘동요’ ‘음모’ ‘분개’ ‘분열’로 이어져 9권까지 발간됐다. 라이트 노벨은 장르의 혼합을 의미하는 ‘미디어 믹스’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미스터리, SF, 공포, 로맨스 등이 섞여 있고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그리고 소설의 요소가 다른 층위에 복합화해 가와이 문화의 한 유형이면서도 모에 코드가 적절히 상품화한 오타쿠 맞춤형 장르로 분석된다. ‘캐릭터 벤토(도시락)’의 줄임말 ‘캬라벤(キャラ弁)’도 일종의 가와이 문화 음식 장르다. 본래 도시락 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 1970년대 이후 어린이들의 학교 도시락을 예쁘게 장식하면서 시작됐다.

캐릭터 도시락 문화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 문화의 활성화로 더욱 확대됐고, 이젠 먹기보다는 보여주기 위해 만드는 캬라벤으로 특화하고 있다. 가와이 문화가 대개 자신만의 내성적인 오타쿠 문화로 출발하지만, 결국 외향적 상품으로 확대되는 전형적인 형태를 캬라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오사카 유니버설스튜디오 재팬에서 판매하는 스파이더맨 컵라면 3종 세트는 만만치 않은 가격인 1050엔(약 1만4000원)이다. 하지만 내용물을 보면 가와이 문화의 창의적인 개그 소재가 돋보인다. 우리나라 컵라면에도 많이 첨가된, ‘나루토(なると)’라 부르는 소용돌이 어묵은 ‘나루토마키(鳴門捲き)’의 약칭으로 원래 일본식 어묵 2종류를 말아서 만든 고급 음식이다.

‘스파이더맨’ 컵라면에 든 스파이더맨 모양의 나루토를 보는 순간, 가와이 문화의 창의적 발상에 웃음을 짓게 된다. 보통 초밥 1개에 밥알이 230개 정도 들어가는데, 밥 한 톨만으로 만들어진 초(超)미니초밥이 국내 TV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다. 이러한 축소지향의 음식문화가 이벤트화하면서 가와이 문화는 일상화한 삶의 방식으로 점차 녹아들고, 의식주 전반에 새로운 아이디어의 경쟁적 지향성을 유도하고 있다.

오타쿠의 차별화한 내성적 문화로 출발한 가와이 문화. 하지만 이제는 일본 문화의 경쟁력을 키우는 스토리텔링의 한 전략이자, 창의적 아이디어의 경쟁을 일상화하는 기능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창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htank@sejong.ac.kr



주간동아 2009.09.15 703호 (p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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