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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

돈독 잔뜩 오른 ‘꽃뱀의 진화’

치고 빠지는 수법서 장기간 ‘단물’ 쪽쪽 … 잘못 걸리면 패가망신

  •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돈독 잔뜩 오른 ‘꽃뱀의 진화’

돈독 잔뜩 오른 ‘꽃뱀의 진화’
‘꽃뱀’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최근 전국 각 경찰서에선 겉보기엔 ‘멀쩡한’ 여성들에게 상습 공갈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되는 경우가 잦다. 지난 8월 말에는 21년 전 불륜관계를 미끼로 상대 유부남에게서 1억원을 챙긴 40대 여성이 구속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춘천에선 꽃뱀을 동원해 50대 남성에게 접근한 일당 7명이 체포됐다.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경찰 관계자들이 “요즘은 사기사건 중에서도 꽃뱀 사건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라고 할 만큼 흔한 범죄 유형이다.

경기불황을 꽃뱀 범죄 증가의 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지만, 여성의 사회활동 증가와 권위 향상, 이혼 급증, 독신녀 증가 등 다양한 요인이 범죄율을 높인 측면도 분명히 있다.

이처럼 꽃뱀 범죄가 만연해지면서 수법도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다. 원래 꽃뱀은 ‘여자 제비족’의 속칭. 보통 나이트클럽 등 유흥업소나 술집에서 남자를 꼬드겨 성관계를 맺는 식으로 유인한 뒤 돈이나 금품을 훔치는 여성들을 지칭한다. 남자가 유부남일 때는 이를 미끼로 성관계 사실 등을 가족한테 알린다고 협박한 뒤 돈을 뜯어내는 게 대표적 유형이다. ‘한 방’으로 사기를 치는, 단발성 범죄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엔 애인 모드·알고 보니 ‘먹튀녀’



그러다 판단력이 흐려진 60, 70대 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도 늘어나면서 ‘실버 꽃뱀’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범행 전체를 기획하는 ‘설계사’와 호구로 보이는 남자를 찍어 유인하는 ‘찍새’와 ‘바람잡이’, 그리고 남자와 직접 성관계를 맺는 꽃뱀으로 전문 조직화한 꽃뱀 공갈단도 활개를 쳤다.

요즘 꽃뱀 범죄에선 이런 고전적인 양상이 여전히 나타나지만, 신종 수법도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과거와 구별되는 것 중 하나는 단발성 사기에서 장기 범죄 수법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 꽃뱀들이 마치 결혼이라도 할 것처럼 애인 행세를 하면서 장기간 이득을 취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제 남성들도 단발성 꽃뱀에는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기다 보니 꽃뱀 아닌 꽃뱀이 새로운 수법으로 등장한 것이다.

38세 유부남으로 모 증권회사 법인영업팀에 근무하는 박모 씨는 요즘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얼마 전 거액의 금전 사기를 당했는데, 자신에게 사기를 친 여성이 ‘꽃뱀’이라는 사실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박씨는 3년 전 서울의 유명 호텔 라운지에서 한 살 연상의 여성 A씨를 만났다. 박씨는 라운지 바에 홀로 앉아 있는 A씨를 보자마자 호감을 보이며 다가갔다. 아나운서처럼 단아한 이미지에 금세 매료된 것.

“안녕하세요. 앉아도 될까요?”
“아 네, 그러세요. 뭐 하시는 분인지 물어도 될까요?”
“증권 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뭐, 그리 능력 있는 놈은 못 되고요. 하하.”
“아, 그러세요? 저도 주식투자를 하는데 도움 좀 받을 수 있을까요? 호호.”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급속도로 친해진 두 사람은 그날 그 호텔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은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A씨는 자신이 미국에서 패션디자인 스쿨을 졸업했고, 부모님 사업을 돕고 있다고 행세했다.

돈독 잔뜩 오른 ‘꽃뱀의 진화’

최근 ‘꽃뱀’은 자신을 철저하게 감추며 애인처럼 오랜 시간 상대와 교감한 뒤 일을 벌인다. 사진은 부자를 노리는 꽃뱀과 그런 꽃뱀에게 반한 가난한 웨이터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프라이스리스’의 한 장면.

A씨는 누가 봐도 애인처럼 행동하면서 박씨를 단번에 농락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오히려 알찬 주식 정보를 수시로 알려주며 박씨의 환심을 샀다. A씨가 알려주는 종목마다 기가 막히게 상승곡선을 그리자 박씨는 어느 순간 A씨에게 주가상승 이익에 대한 대가를 주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A씨는 박씨에게 접근한 방법으로 증시 정보를 잘 알고 있던 한 코스닥 상장법인 대주주와도 만나고 있었다.

2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300만~400만원씩 주던 돈이 3년쯤 되니 억대에 육박했다. 박씨는 A씨 덕분에 실적이 나아졌고 돈도 벌었기 때문에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때로는 A씨가 값비싼 명품을 원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신용카드를 긁었다. 전화번호를 일주일에 한 번씩 석 달에 걸쳐 바꾸는 게 좀 수상했지만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는 남자 때문”이라는 A씨 말을 듣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러던 지난 5월 A씨는 본심을 드러냈다. 박씨에게 부동산 투자를 권유한 뒤 매입 단계에서 돈을 빼돌리려 한 것. 경기도 남양주 부근 별장 부지와 건물을 반반씩의 지분으로 매입하자는 A씨의 제안을 박씨는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1차로 1억5000만원을 건넨 박씨는 2차로 다시 1억5000만원을 A씨에게 송금했다. 이 중 1억원은 아내에겐 오피스텔 전세 구입비라 거짓말을 하고, 아파트 담보 대출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A씨에게 송금 여부를 확인해준 박씨는 한 시간 후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30분 후엔 아예 ‘고객의 사정상 착신이 불가능한 전화’라는 메시지만이 흘러나왔다. 꽃뱀으로 돌변한 순간이었다. 박씨가 수소문한 결과 A씨는 대포통장과 대포폰을 사용해왔고, 수시로 거주지를 옮긴 것으로 드러났다. 주민등록도 말소된 상태. 순식간에 당한 박씨는 수개월째 ‘꽃뱀’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스폰서 계약 ‘종합세트형’도 등장

이처럼 장기간 상대 남성과 접촉하며 조금씩 이득을 취하는 신종 수법이 늘고 있는 가운데 고전적 수법과 새로운 수법을 병행하는 이른바 ‘종합세트형’ 꽃뱀들도 등장하고 있다. 서울 강남지역의 한 경찰 관계자는 “‘탕치기’와 ‘스폰서십’으로 무장한 유형인데, 돈 있는 사업가들과는 스폰서 관계를 맺고 그 중간중간 유흥업소에서 만난 남자들과 몇 차례 관계를 맺고 돈이나 명품을 뜯어내다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꽃뱀들”이라고 전했다.

앞서 언급한 A씨도 박씨와는 길게 교제하면서 코스닥 법인대주주와도 월 500만원에 스폰서 계약을 맺은 종합세트형 꽃뱀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꽃뱀들을 사전에 알아챌 방법은 없을까.

강남 유명 나이트클럽의 베테랑 웨이터 김모(43) 씨는 “나이트클럽 처지에서도 남성 단골손님들을 계속 유치해야 하기 때문에 여성들을 부킹할 때 ‘꾼’인지 아닌지를 주의 깊게 살핀다”며 “대체로 이른 저녁시간에 그리 취한 것 같지도 않으면서 이성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몇 시간씩 룸을 전전하는 30, 40대 여성은 70% 이상 ‘꽃뱀’일 가능성이 높고, 실제 그런 여성과 동행한 남성 손님들로부터 지갑을 잃어버렸다든가 돈을 빼앗겼다는 항의를 많이 받는다”고 귀띔했다.

지난해 20대 ‘꽃뱀’에게 당할 뻔했다는 40대 중견 건설업체 사업가도 “유흥업소 마담 등을 통해 스폰서 관계를 맺고 싶다는 20대 여성들을 소개받는 경우가 있다”며 “그럴 때는 오히려 위험 부담이 없는데, 아예 유흥업소 등에서 여성 스스로 스폰서를 요구할 때는 작정하고 덤벼드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했다.

돈이 전부인 세상, 어쩔 수 없이 꽃뱀은 계속 알을 깨고 나올 수밖에 없다. 되레 여성들을 농락하는 ‘남자 꽃뱀’도 부지기수다. 꽃뱀을 이름처럼 깜찍한 존재로 여기면 큰코다친다. 인간 꽃뱀들에겐 치명적인 독이 있다.



주간동아 2009.09.15 703호 (p54~55)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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