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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김광화의 슬근슬근 자급자족, 슬렁슬렁 보물찾기

나이 쉰에 둥당둥당 ‘한 곡 피아니스트’로 데뷔

‘자식 덕 보기’ ⑧

나이 쉰에 둥당둥당 ‘한 곡 피아니스트’로 데뷔

나이 쉰에 둥당둥당 ‘한 곡 피아니스트’로 데뷔

1 식구들의 피아노 소리와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듯.

요즘 우리 집에는 음악이 곧잘 흐른다. 아이들과 아내가 틈틈이 피아노를 둥당거린다. 우리 식구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큰아이 탱이가 서울에서 유치원 다닐 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긴 했다. 그런데 중고 피아노를 마련하고 학원을 보냈더니 두 달쯤 다니고는 그만 하겠다 했다. 학원에서 가르치는 피아노가 너무 재미없는 데다 선생은 자꾸 진도에 욕심을 내니 피아노가 싫어졌던 것.

그러고는 세월이 흐르면서 피아노는 집 한 귀퉁이 ‘방치된 교육’을 상징하듯 불필요한 짐이 되었다. 이사할 때마다 적지 않게 성가시기에, 산골로 오면서 어느 대안학교에 기증했다. 누군가 그랬다. 1년 이상 손 한 번 대지 않는 물건이라면 그건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그렇게 싫다더니 … 어느새 ‘터키행진곡’

그러다 몇 해 전부터 탱이가 다시 피아노를 치고 싶단다. 그 무렵 새롭게 사귄 친구들이 피아노를 즐겁게 치는 모습을 보며 자극이 됐던 것 같다. 아내는 또 중간에 포기하지 않을까 긴가민가했으나, 탱이는 스스로 움직였다. 자신이 세뱃돈 모은 걸로 장난감 수준의 값싼 디지털 피아노를 하나 마련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날마다 피아노를 연습하고,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실력이 앞선 친구라면 기꺼이 그에게 배웠다. 학원에서는 기초가 중요하다고 왼손 오른손 연습곡을 지루하게 시켰지만 탱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골라서 연습했다. 막히면 잠시 쉬었다 하고. 그래서인지 조금씩 칠 때마다 성장하는 기쁨을 누린다.



굳이 경쟁을 시키지 않아도 끊임없이 자극받는 세상인가. 누나가 즐겁게 치니 상상이도 자극을 받았다. 차츰 피아노에 관심을 갖고 하나둘 누나를 따라했다. 그러더니 금방 ‘캐넌변주곡’이랑 ‘고양이춤’을 연주한다. 곁에서 보니 참 신기하다. 작은아이 상상이는 피아노를 가까이서 본 적도 없어 도레미조차 몰랐다. 내 식으로 보자면 악보를 언어적으로 이해하기보다 기호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까.

나이 쉰에 둥당둥당 ‘한 곡 피아니스트’로 데뷔

2 투박하고 어설픈 손놀림이다 보니 뼈마디가 다 아파온다.
3 피아노를 치는 상상이. 곁에서 마을 아이들이 지켜본다.

아이들 실력이 느니까 장난감 같은 피아노로는 부족했다. 건반 수가 적어서 아주 높은 음이나 낮은 음을 칠 수가 없단다. 먼저 산 걸로는 충분히 ‘본전’을 뽑았으니 이번에는 식구 모두의 투자를 받아 88개 건반이 다 갖춰진 디지털 피아노로 업그레이드.

갈증이 확 풀린 기분인지 아이들은 신이 났다. 상상이는 드디어 ‘터키행진곡’을 쳤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 곡으로 하루를 여는 맛이 좋다. 아내마저 아이들한테 자극이 됐는지 피아노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피아노 앞에 앉는 걸 망설이자, 탱이가 엄마에게 용기를 줬다.

“엄마, ‘한 곡 피아니스트’라는 게 있어.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열심히 하면 한 곡은 칠 수 있거든. 드라마에서 삼순이도 그러잖아. 엄마도 해봐.”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아내도 피아노 앞에 앉았다. ‘캐넌변주곡’을 둥당거리더니 조금씩 한다. 수시로 아이들에게 도움말을 듣는다. 이렇게 하다 보니 아이와 부모가 서로 시너지효과를 갖는다. 나이 들어 뭔가를 배운다는 것이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지 않는가. 아내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아이들에게 기꺼이 배운다.

또한 아이들은 제 엄마를 가르치면서 다시 자극을 받는다. 혼자만 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할 수 있게끔 가르치는 건 또 다른 능력이 아닌가. 동작이 굼뜬 어른임에도 잔소리 대신에 끈기를 가지고 기다려주고 믿어주고 가르쳐주는 힘을 배운다. 차츰 아내도 한 곡을 넘어 두 곡 피아니스토로 나아갔다. 가끔 중간에 리듬이 엉기기도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놀랄 만한 발전이다. 나이 쉰에 뭔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다니….

삶 속으로 스며드는 감미로운 음악

이렇게 되니 시간이 갈수록 나만 처진 듯했다. 마치 음악세계에서 고립된 듯, 나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졌다. 불쌍한 내 영혼이여. 나도 할 수 있을까. 자랄 때 학교 선생님들이 풍금을 두들기면 그 신기한 악기는 나와는 거리가 영영 멀다고만 느꼈다. 요즘은 절로 이런 생각이 든다.

‘어릴 때 악기 하나쯤 배워두면 어딜 가나 조금은 당당할 텐데. 자기표현까지는 안 되더라도 노래 하나쯤 연주할 줄 안다면 얼마나 근사한가.’

어느새 잠자던 내 마음도 슬그머니 깨어났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겉으로는 늘 주눅 든 음악세계. 그런 나도 정말 한 곡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악보를 뒤적거려 ‘에델바이스’를 골랐다. 용기를 내어 말했다.

“누구, 나 좀 가르쳐줄 사람?”
그러자 아내가 선뜻 나섰다.
“처음에는 오른손으로만 숫자를 따라 쳐봐요. 여기 악보대로 ”

‘에’는 음이 미이고, 첫째 손가락. 그 다음 ‘델’은 솔…. 아내 말대로 따라하는데 이건 숫제 손 따로 머리 따로. 오른손 왼손이 제멋대로 놀려고 하고, 게다가 뼈마디가 굳었는지 나중에는 오른쪽 손목이 경련이 이는 듯 아파왔다. 연습을 할수록 손은 오그라들고, 피아노 건반은 벽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미처 생각지 못한 소득은 많다. 지금 나는 피아노에서 한발 떨어져, 식구들이 치는 음악을 즐기기로 했다. 음악에 아무 관심 없던 지난날에 견주면 나로서는 엄청난 발전이다. 음악이 내 삶 속으로 슬근슬근 스며든다. 아니, 아직도 음악은 잘 모르지만 누군가가 피아노를 치면 그 감정을 같이 느껴보려고 한다. 분명한 건 큰애와 작은애가 같은 곡을 치더라도 느낌이 참 다르다는 것이다. 아이 친구들이 들려주는 음악 역시 그렇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마저 더 감미롭게 들린다.



주간동아 2009.06.30 692호 (p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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