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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시골의사’의 책장

죽거나 미치지 않고 어떻게 전쟁을 설명할까

커트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

죽거나 미치지 않고 어떻게 전쟁을 설명할까

죽거나 미치지 않고 어떻게 전쟁을 설명할까

박경철
의사

쉽게 읽히지만 놓치기가 쉽다. 미국 현대문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만큼 예사롭지도 않다. 시간관은 보르헤스를 떠올리게 하고, 전개 방식은 ‘플랑드르의 길’을 연상케 한다. 시점은 난마처럼 얽히고 이야기도 타르 덩어리처럼 엉켜 있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아이필드 펴냄)은 그만큼 난해하다.

주인공 필 그림은 정신분열증 환자다. 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이 분열증 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지만 누가 봐도 그는 명백하고 확실하게 ‘미쳤다’. 그가 미친 이유는 책을 펼치면 바로 추론이 가능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참가했다가 독일군 포로가 됐고, 이후 아군의 오폭을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그 과정에서 2차 대전 최대의 살육이라는 드레스덴 폭격 현장을 목격했다. 그의 정신분열은 전쟁 후유증인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는 드레스덴 폭격을 설명하면서 한 미군 장성이 썼다는 ‘드레스덴 파괴’라는 책의 문장을 인용한다.

“나는 영국인이나 미국인들이, 죽임을 당한 적국 민간인을 두고 울면서도 잔인한 적과 싸우다 죽은 우리의 용감한 군인들을 위해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영국과 미국 폭격기들의 드레스덴 공습으로 13만5000명이 죽은 것을 심히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지난번 전쟁을 누가 시작했는지 잊지 않는 나로서는 나치즘을 철저히 패배시키고 파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500만명 넘는 연합군이 목숨을 잃은 사실이 훨씬 더 애석하다.”

죽거나 미치지 않고 어떻게 전쟁을 설명할까
‘드레스덴 파괴’라는 책이 실제 있는지, 아니면 보네거트가 임의로 설치한 소설 장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 문장은 ‘제5 도살장’을 관통하는 주제다.

폭격을 승인한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도 잔인한 사람들도 아니지만, 전쟁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공중폭격의 위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와 똑같이, 공중폭격에서 사망한 13만5000명의 민간인도 본성이 선하든 악하든 이 전쟁을 시작하거나 수행하는 것과는 하등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거기서 출발한다. 소설은 내내 주인공의 망상과 독백으로 이어진다. ‘flight of idea’, 즉 ‘사고와 의식의 비약’이 심하게 나타난다. 독자는 정신이 없다.

시점이 앞뒤로 넘나들고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상의 배경을 응시하면 점차 가닥이 잡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주인공의 분열은 ‘외면’과 ‘회피’를 위한 도구다. 하지만 그가 목격한 ‘비참한 장면’은 ‘이성’의 언어다. 즉 이성으로는 차마 그 ‘비참함’을 감당할 수 없기에 ‘망상’으로 도피한 것이다.

‘so it goes’. 책에서 주인공이 죽음을 대할 때마다 읊조리는 말이다. ‘그렇게 가는 거지’로 번역돼 있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전쟁기간에 사냥하러 갔다가 오발사고로 죽었다. 그렇게 가는 거지”라든가 “양초와 비누는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공산주의자 등 독일의 적에게서 짜낸 지방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식이다. 이 말은 주인공을 납치한(그렇게 믿는) 외계인 ‘트랄파마도어’인들이 죽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로 설명된다. 이 독백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평면적으로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시선’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뒤틀린 냉소’ ‘죽음에 대한 회피’로 해석된다. 구조론적 관점에서 보면 브레히트적 장치로서의 ‘소격효과’를 노린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죽음이나 그 과정에 대한 일종의 ‘거리두기’로 기능하는 셈이다.

작가는 자신의 참전 경험을 트라우마로 안고 20년이나 ‘쓰기’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드레스덴을 다룬 중·단편 모두 출판사들로부터 외면당했지만, 결국 20년 만에 탄생한 이 작품은 불멸의 역작으로 우뚝 섰다. 20년간 내면에서 추스르고 다듬은 뒤 나온 작품이다. 마침 이 작품이 출간된 시점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때. 반전 기류와 맞물려 그의 책은 미국 젊은이들의 레퍼런스가 됐고, 소이탄 공격으로 온몸에 화상을 입고 울부짖으며 거리를 달리는 베트남 소녀의 퓰리처상 특종 사진과 어울려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남겼다.

사람들은 이 책을 ‘블랙유머’ ‘기상천외’ ‘슬프고 유쾌한’ 등으로 표현한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거대한 부조리극이다. 이야기도, 서술도, 시점도, 작가도, 독자도, 드레스덴의 폭격도, 전쟁포로도 모두가 부조리극의 주인공이다. 독자는 가끔 쓴웃음을 지으며 저자의 기행을 따라가다 깊은 곳에서 잉태되는 분노와 슬픔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것이 격렬하지는 않다. 작가가 곳곳에 설치한 ‘거리두기’의 장치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연극으로는 큰 성공을 거뒀지만, 영화로는 그리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후일담이 들려온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미국 랜덤하우스가 고른 ‘우리 시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00권의 책’ 중 한 권. 하지만 필자가 ‘제5 도살장’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보다는 이 코너에서 소개해온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당신 인생의 이야기’ ‘마음’의 연장선에서 거론돼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donodonsu



주간동아 2009.06.02 688호 (p8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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