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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기자의 It-Week | 서른다섯 번째 쇼핑

청담동 탈출

  • 김민경 holden@donga.com

청담동 탈출

청담동 탈출

도산공원 입구에 새로 문을 연 랄프로렌 서울플래그십 스토어의 야경입니다. 러시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랄프로렌은 넥타이 판매영업사원을 하다가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한 인물이자 가장 미국적인 디자이너로 존경받습니다. 또 여배우들의 레드카펫 드레스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죠. 이국적인 쇼윈도는 환상적이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려면 용기가 필요하겠죠?

럭셔리 업계에서는 청담동에서의 성공이 곧 대한민국에서의 성공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청담동에서의 성공은 곧 진리이다. …청담동에서 유행에 뒤떨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청담동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비난마저도 감수하며 유행에 열광하는 것이다. -심우찬, ‘청담동 여자들’
턱을 괴고 쇼윈도를 바라보는 여자가 보인다. …저 여자 이번 시즌 마크 제이콥스 백이 갖고 싶은 거다. 몇 달치 월급을 곱씹으며 ‘아니야!’를 수천 번 외쳤겠지…. 남자보다 마크 제이콥스의 핸드백에 키스하고자 하는 맹렬한 욕망…. -백영옥, ‘스타일’

청담동이란 이름은 대한민국의 욕망과 트렌드를 상징하는 아이콘입니다. ‘젊은 세대의 솔직한 라이프스타일’을 묘사하는 글에는 빠짐없이 이 동네가 등장하죠. 아니, 청담동이 나오면 유행에 강박된 대한민국을 은유하는 겁니다. 여기서 청담동이란 행정구역상의 지역이 아닙니다. 패션칼럼니스트 심우찬 씨가 정의했듯 청담동은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과 청담초등학교 골목에서 학동사거리, 그리고 로데오거리 또는 도산공원 주변까지’로, 뉴욕 컬렉션이 동시적으로 소비되고 럭셔리와 스포츠카에 대한 환상이 손에 닿는 현실로 펼쳐지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그 구역은 경제적이고 심리적인 경계인 거죠.

그래서 “어디 가냐(또는 오늘 뭐 할 거냐)”는 질문에 “청담동!”이라고 대답하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트렌디하고 가장 비싼 레스토랑에서 트렌드세터와 만나 파스타 가락을 돌돌 말고 있거나 드립커피를 홀짝거릴 계획’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또 “청담동 나간 지 오래됐다”는 말은 내가 이렇게 ‘후져’ 보이는 건 요즘 유행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통 모르기 때문이라는 뜻이죠. 어쩌면 슬프지만, 그 말을 들은 상대는 휴대전화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릴지도 모릅니다.

지하철로도 버스로도 찾아가기 어려워 배타적이고, 한적하며, 늘 나른한 공기가 떠돌던 청담동이 요즘 달라졌습니다. ‘아무 데서나 당당하게 주정차하는 차량’이라는 말을 간단히 ‘외국인 관광객 탑승’이라고 써붙인 관광버스들이 이곳에 일본과 중국 관광객을 쏟아놓으면서 소란스러운 관광도시 ‘삘’이 나게 된 거죠. 불경기에 활기는 느껴지지만, 단체 관광객이 청담동 아이템들을 구입해가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많더군요. 그래서 청담동에서 만나자고 하면 ‘아직도?’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유행에 한 인생 걸었다는 그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도산공원입니다. 그들에게 도산공원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아무 관계 없어서 도산공원입니다. 황신혜 밴드가 배우 황신혜와 아무 관계가 없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청담동 끝자락이었던 도산공원 동네가 요즘 트렌드세터 사이에서 청담동의 중심, 아니 ‘피프스 애비뉴’로 꼽힙니다. 청담동 쇼퍼들이 청담동 로데오거리를 피해 이곳으로 옮기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곳에 제법 큰 땅이 나올 때마다 누가 이걸 샀다느니, 그걸 누가 빼앗았다느니 하는 소문이 끊이질 않아요. 대표적인 럭셔리 브랜드 ‘에르메스’의 본가 ‘에르메스 메종’에 이어 최근 미국 최고의 디자이너로 꼽히는 랄프로렌의 대형 서울플래그십 스토어가 문을 열었습니다. 일본 도쿄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랍니다. 불경기에도 클래식한 취향을 가진 상위 1% 소비자 시장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또 다른 대형 플래그십 스토어들이 이곳에 잇따라 문을 열 계획이랍니다. 쇼핑하러 이 동네 가신다고요? 그럼 꼭 도산공원 ‘안’에도 들어가보세요. 트렌드세터인 당신이 찾는 것이 바로 그곳에 있을지 모릅니다.



주간동아 2009.06.02 688호 (p71~71)

김민경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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