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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진로 지도 부탁합니다 … ‘교실의 굴욕’

일부 고교, 학원강사 초빙 입시설명회 … 공교육 사실상 ‘아웃소싱’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진로 지도 부탁합니다 … ‘교실의 굴욕’

진로 지도 부탁합니다 … ‘교실의 굴욕’

수도권 한 고교에서 사설학원 관계자가 강사로 나선 입시설명회가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다.

3월31일 오후 6시, 경기도에 있는 한 인문계 고등학교 운동장이 붐비기 시작했다. 이 학교가 마련한 ‘2010학년도 대학입시 설명회’에 참석하려는 학부모 차량이 속속 도착하면서부터다. 고3 학생들은 각자의 교실에서 TV로 생중계될 ‘설명회’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사는 M학원 입시분석팀장. 학교는 사교육계에서 ‘입시전문가’로 통하는 그를 강사로 섭외하고, 고3 학생과 1·2·3학년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참석을 독려하는 등 행사 주최자 구실을 했다. 학원 강사가 교내 시청각실에서 M학원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대입 성공전략 설명회 자료집’을 토대로 ‘수업’하는 동안 교사들은 학부모 안내, 현장 질서 유지, 학생 감독 등 행사 진행 업무를 도맡았다.

교사들이 행사 진행업무 보조

공교육이 학교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 교사가 철저하게 배제된 진학지도가 교단에서 버젓이 이뤄진다. ‘주간동아’는 이 학교뿐 아니라 전국 곳곳의 고등학교가 ‘입시전문가’를 강사로 내세운 입시설명회를 열고 있음을 확인했다. M학원, C학원, J학원 등 ‘입시 명문’으로 통하는 사설학원 강사들이 교단에 선다. 한 강사는 “3월부터 이미 30여 개교에서 입시설명회를 했다. 학교 쪽에서 먼저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수험생활 잘하는 방법, 2010학년도 대학 입시전략 등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요청해온다. 신청 학교를 다 하면 올 봄에만 최소 50개교 이상 찾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열기’ 때문인지 M학원은 홈페이지에 ‘고교 방문 입시설명회 신청서’ 양식을 올려뒀다. 학교 측이 ‘참석 대상, 예상 인원, 희망 강연 내용’ 등을 기록한 공식 신청서를 보내면 학원에서 내용을 검토한 뒤 대상 학교를 ‘선정’, 방문하기 위해서다. 학원의 교내 입시설명회는 이처럼 공공연하게 이뤄진다.

한 학원 관계자는 “2005년부터 대학 입시가 복잡해져 학교 선생님이 직접 진학지도를 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학교에서도 대학마다 천차만별인 입시요강을 분석하고, 합격 전략을 세우려면 외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처음에는 교사들을 상대로 비공식적인 설명회를 열면 교사가 그 내용을 학생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언제부턴가 학원 강사가 직접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게 일반화됐다”고 전했다.



3월 초 학교 인근 사설학원의 ‘평가실장’을 초청해 입시설명회를 연 서울 한 고등학교 연구부장도 이 같은 현실을 인정했다. 그는 “설명회를 계획할 때 일부 교사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학원에 맡기는 것 아니냐. 사교육을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상당수 교사들은 학원이 입시에 관한 한 나름의 전문성을 갖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아이들 진학에 도움이 된다면 사교육 전문가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게 큰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전국에 4년제 대학만 202개에 이릅니다. 교사들이 직접 진학지도를 하려면 각 대학에서 발행하는 20~30쪽짜리 입시요강 안내책자를 일일이 읽고 정리해야 하죠. 수업 준비하고, 학생 지도도 하면서 사설학원 수준의 정보 수집까지 하는 건 불가능해요. 예전처럼 배치표 보고 점수에 맞춰 진학지도를 하는 시대가 아니지 않습니까.”(서울 H고 교사)

이런 현실에서 ‘입시’만을 연구·분석한다고 자임하는 학원 강사들은 빠르게 입시전문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선 학교가 외부 입시설명회를 교내에 유치하는 데 드는 비용은 ‘0원’. 학원들은 자료집 제작비 등 실비도 받지 않는다. 한 학원 관계자는 “사교육 업체가 원칙적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교육자라는 생각도 갖고 있다. 교내 특강에 나설 때는 전문가로서 학생들에게 ‘공공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학원에서 승용차로 한 시간 이상 떨어진 수도권 학교에 입시설명회를 다녀왔습니다. 갓 부임한 교장선생님이 ‘이 학교의 교육 환경이 이렇게 열악한 줄 몰랐다. 교사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 한번 와서 도와달라’고 간곡히 요청했기 때문이죠. 학원 운영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더 뿌듯하고 보람이 컸습니다.”(J학원 기획실장)

그들에게 ‘서비스의 장’을 제공하는 교사들은 교육자라는 ‘명분’도, 진학 전문가로서의 ‘실리’도 모두 잃은 셈이다. 하지만 사교육 업체들이 이 같은 입시설명회를 통해 비공식적인 경제 효과를 누리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교사와 학교가 내놓고 “입시에 대해 모른다. 전문가는 학교 밖에 있다”고 인정하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진학상담을 위해 사설학원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입시 컨설팅’은 교문을 벗어나는 순간 ‘고급 서비스’로 변신한다. 서울시내 유명 학원의 입시 상담료는 시간당 40만~50만원 선. 이곳에서 학생들은 과거에는 담임교사가 담당했던 학교 선택, 원서 작성 등의 도움을 받는다.

김태정 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 집행위원장은 “학교가 사설입시업체를 공교육 제도 안으로 끌고 오면 학교는 제2의 학원이 될 수밖에 없다. 이대로 고액 컨설팅산업이 정착되면 사교육비에 새로운 비용이 추가돼 가계에 큰 부담이 되고, 교육 불평등 문제가 심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학진학지도지원단’ 활동

원칙적으로 ‘진로지도’의 영역에 속하는 ‘진학상담’을 학교가 사설기관에 ‘아웃소싱’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 이남렬 교육연구사는 “일부 학교가 ‘입시설명회’ 등의 이름으로 사설학원 강사를 학교 안에 들이는 상황은 충격적이다. 학교의 존재 이유는 인성교육이고, 진로지도와 진학상담은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인데, 이 분야를 사교육 시장에 통째로 넘겨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뒤틀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도 시작됐다. 서울시교육청은 현직 교사 94명이 참여하는 ‘대학진학지도지원단’을 구성해 수능시험 분석, 대학별 요강 정리, 계열별 지원전략 수립 등을 진행 중이다. ‘대학진학지도지원단’ 구성원들은 대부분 10년 이상 현장에서 진학지도를 해온 각 학교 진학부장들로, ‘지난해 우리 학교에서는 몇 등급, 몇 점, 어떤 특기사항을 가진 아이가 어느 대학에 합격했다’와 같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입시 자료를 만든다. 이들의 목표는 고3 담임교사의 진학지도 역량을 제고해 학생들이 학교를 믿게 만드는 것. 이를 위해 지난 3월부터는 서울시내 112개 학교를 돌면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입시설명회 등을 열고 있다.

‘대학진학지도지원단’으로 활동하는 한영고 김운 교사는 “학생의 합격, 불합격에 대한 구체적인 데이터는 사교육 시장에 없기 때문에 현직 교사의 노하우를 합치면 사교육 시장을 능가하는 힘이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모토는 ‘내 제자의 진학지도는 내 손으로 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공동 제작한 입시 자료를 서울시교육청 진학진로정보센터(www.jinhak.or.kr)에 올려 교사나 학생, 학부모 등 누구나 내려받을 수 있게 한다. 부산시교육청도 부산 지역 고등학교 진학지도 담당교사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대학진학지원센터’(http://jinhak.pen.go.kr)를 만들어 입시 전문 DB를 구축하고 있다.

잠실여고 안연근 교사는 “이제는 교사들이 진학 지도를 하고 싶어도 자료가 없어서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환경이 됐다. 공교육 시스템 안에서 다양한 정책적인 지원이 제공되는 만큼, 머지않아 교사들이 관심과 열의를 갖고 직접 진학 지도에 나서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간동아 2009.04.14 681호 (p64~65)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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