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0

2009.01.20

지상의 재료, 신화에 도전

히프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

  • 김지은 MBC 아나운서·‘예술가의 방’ 저자 artattack1@hanmail.net

    입력2009-01-13 17: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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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의 재료, 신화에 도전

    요헴 헨드릭스, ‘Pack’(2003~2006), taxidermied dogs, 가변 설치(좌) 빔 델보예, ‘D11 Scale Model’(2008), 스테인리스 스틸, 157x157x115 (우)

    뉴욕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신세를 많이 진 친구는 하버드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일하다 저와 같은 대학원에 진학한 펠리샤(Felicia)란 여성입니다. 필리핀 출신으로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그녀에게 늘 제 과제를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는데요, 자신의 과제를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끝까지 강의실에 남아 성심성의껏 문법을 교정해주던 고마운 친구입니다. 제가 미안해할까 봐 먼저 이렇게 얘기하곤 했죠.

    “네 글을 통해 많은 걸 배우고 있어. 나와는 작품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르거든. 얼마나 즐거운 시간인지 몰라. 그러니 언제든 망설이지 말고 얘기해, 알았지?”

    아니나 다를까요? 감원이다, 해고다 미국의 미술판이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그녀는 졸업생 중 가장 먼저 모두가 선망하는 뉴욕 ‘Haunch of Venison’의 전시 큐레이터로 채용됐습니다. ‘Haunch of Venison’은 자본주의의 꽃인 옥션하우스와 대표적 현대미술 갤러리가 결합된 곳으로 큐레이터들 사이에서 꿈의 무대로 불립니다.

    그런 그녀가 저를 전시 오프닝에 초대했습니다. 수석 큐레이터인 마이클 룩스(Michael Rooks)를 도와 처음 참여한 전시였는데요, 저는 전시장 입구의 개들 때문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어찌나 살아 있는 것 같은지 부딪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하다 오히려 사람들끼리 부딪쳐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아야 했죠. 요헴 헨드릭스(Jochem Hendricks)의 ‘Pack’(개떼, 2003~2006)은 투견장에서 죽어간 개들을 그대로 박제화한 작품으로, 개들 속에 감춰진 공격성에 대한 인간의 공포심과 개들을 투견장으로 내몬 인간들의 잔인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모두 17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를 하나로 묶는 주제는 바로 ‘히프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Hypnerotomachia Poliphili)’였는데요, 15세기 프란체스코 콜로나의 소설 제목인 히프네로토마키아는 그리스어로, ‘hypnos+eros+mache’는 ‘잠+사랑+투쟁’을 의미하는 복합어라고 합니다. 주인공 폴리필로가 꿈속에서 자신의 이상적 사랑인 폴리아를 찾기 위해 여정에 나서면서 벌어지는 모험담을 담은 이야기로 용과 늑대, 온갖 환상적인 건축물이 등장하는 꿈속에서 그는 또다시 꿈을 꾸게 되고 거기서 애타게 기다렸던 폴리아를 만나지만 두 사람이 키스하려는 순간 그만 꿈에서 깨어난다는 줄거리입니다.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결국 꿈에서나 가능한 일임을 알면서도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존재라는 건데요, 이 전시의 수석 큐레이터 마이클은 오늘날의 예술가들을 폴리필로로 해석하며 작품의 물질성과 그것이 담아내는 정신성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들을 선정해 소설의 줄거리를 재구성합니다. 소설 속에서 저승사자로 등장한 늑대 떼를 연상시키는 Pack을 전시장 입구에 설치한 것은 이제부터 현실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또한 빔 델보예(Wim Delvoye)의 ‘D11 Scale Model’(2008)은 폴리필로가 꿈속에서 마주친 신비로운 건축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전체적인 형태는 인간이 만든 지상의 모든 건축물을 밀어버리려는 불도저의 모습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딕식 성당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감히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는 인간의 야망을 드러내는데요, 스테인리스 스틸을 재료로 한 이 작품은 보면 볼수록 그 정교함에 감탄하게 됩니다. 과연 예술가들은 지상의 재료로 얼마만큼이나 예술적 이상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인지 곰곰 생각하게 됩니다. 비록 꿈속의 꿈일지라도 그것을 찾아 떠나는 것이 예술가의 운명이겠죠. 전시장을 나서며 17 작가의 작품을 역동적으로 구성한 큐레이터의 노력 또한 폴리필로의 도전만큼이나 험한 길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그 여정 앞에 선 친구 펠리샤에게 큰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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