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6

2008.12.23

싫다 싫어! 얄미운 ‘진상 남녀’

즐거운 송년회, ‘폭탄’ 제거 방법 알면 즐거움 2배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08-12-17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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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반성 16’, 김영승

    송년회는 오랜 시간 보지 못한 사람을 반갑게 만나고 회포를 푸는 소중한 자리다. 반면 혹자에게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고역의 자리이기도 하다. 어느 자리에나 ‘진상 남녀’는 있게 마련이다. 송년회도 예외는 아니다. 진상들은 즐거워야 할 송년회 자리를 피곤하게 만든다. 특히 진상 남녀가 술을 만나는 날은 그야말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자랑형’에서 ‘수금형’까지 진상 남녀는 해가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그래서 ‘진상 남녀 제압법’은 즐거운 송년회를 보내기 위한 필수 아이템이 됐다.

    당신을 사랑했었다

    대기업 과장인 최모(37) 씨. 대학 동기들 가운데 그의 연애 스토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술자리만 있으면 언제 첫사랑을 만났고 헤어졌으며, 그 뒤로 누구를 만났는지 시시콜콜 다 말하기 때문이다. 과 동기 송년회에서도 여지없이 흘러간 레코드를 틀어댄다. 캠퍼스 커플로 5년을 사귄 상대의 얘기를 본인 앞에서 버젓이 할 때는 분위기가 여간 어색하지 않다. “너랑 참 좋았는데, 아직도 네 생각 나더라.” “우리 다시 만날까? 요즘은 애인도 많이 둔다잖아.”

    결국 그 ‘첫사랑’은 재작년부터 송년회에 참석하지 않고 있다. 다른 여자 동기들도 덩달아 나오지 않아 반쪽 송년회가 돼버렸다. 보다못한 동기들은 송년회 성격을 부부동반 모임으로 바꿔버렸다. 아내에게 잡혀 사는 최씨가 아내 앞에서 첫사랑 얘기를 할 정도로 ‘간 큰 남자’는 못 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최씨는 친구들 앞에서 다시는 흘러간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 자랑을 늘어놓는 모습에 다들 씁쓸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나불나불 자기 자랑

    개인 사업을 하는 박모(38) 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아주는 자랑꾼이었다. 박씨 앞에서 다른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결혼 전에는 애인 자랑, 결혼 뒤에는 마누라 자랑이더니 이제는 아들 자랑이다. 가족 자랑만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번에 주식으로 몇천만원 벌었지” “내가 골프를 치면 최경주가 울고 가잖아”…. 술이라도 진탕 먹여 입을 닫게 하고 싶지만 술도 잘 취하지 않는다. 참다못해 어쩌다 한마디 빈정대기라도 하면 삐쳐서 눈도 맞추지 않는다.

    궁리 끝에 동기 대표는 자랑이라면 남에게 지지 않는 친구 한 명을 더 불러냈다. 그러고는 서로 자기 얘기하기 바쁜 그들을 한쪽 테이블에 붙여놨다. 서로 누가 잘났는지 불꽃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이번에 차를 외제차로 바꿨어” “야, 우리 애가 명문 사립초등학교에 들어갔다고”…. 둘이 한쪽에서 입씨름을 하자 그제야 다른 친구들이 대화를 시작한다. “난형난제로군.” 다른 친구들은 웃으면서 건배를 한다.

    작업의 정석

    대학생 김모(22·여) 씨는 연말이 두렵다. 동아리의 송년회 자리에 ‘그분’이 오시기 때문이다. 동아리 선배 박모(26) 씨는 타고난 바람둥이다. 사귀었다는 여자 선후배도 여럿이다. 지난해 송년회 때는 괜히 그 선배 옆자리에 앉았다가 술을 따라주며 ‘작업’을 거는 통에 난감했다. 송년회 때마다 작업을 거는 통에 여자들은 박씨라면 혀를 내두른다. 박씨 때문에 송년회에 나오지 못하는 여자 선후배가 수두룩하다. ‘그 사람만 오지 않으면 되는데….’ 김씨는 이번 기회에 그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작심했다.

    김씨는 먼저 박씨와 스캔들이 있었던 동아리 선후배에게 모두 연락해 이번 송년회에 꼭 나오라고 부탁했다. 송년회 당일 10분 정도 일찍 모여 한쪽 자리에 그들을 앉혀놓고 박씨가 오기를 기다렸다. 박씨 자리는 이들이 모여 있는 자리 한가운데. 마침내 박씨가 들어와 자리에 앉으며 이들을 봤다. “어…!” 외마디를 내뱉었을 뿐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온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급한 약속이 있다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만 마시면 최홍만도 두렵지 않다

    직장인 이모(36) 씨는 술만 마시면 ‘헐크’로 변한다. 기분 좋게 분위기를 이끌다가도 2차에서 술이 과해지면 여지없이 폭력성을 드러낸다. 후배들을 불러모아 욕하는 것은 물론 때리기까지 해서 옆자리에 앉기를 꺼려하는 1순위로 꼽힌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모습으로 변해 후배들은 한숨만 내쉴 뿐이다.

    팀 송년회가 있었던 그날도 어김없이 술이 들어갔고, 이씨는 “야, 너 어디 가! 대가리 박아” 운운하며 후배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후배 한 명이 삿대질을 하며 대들었다. “네가 선배면 다야? 나랑 한판 붙어볼래?” 평소 순종적인 데다 조용한 후배이기에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배가 덤벼들자 당황한 이씨는 잠을 자는 척했다. 다음 날 후배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이씨에게 커피를 건네자 이후 이씨의 술버릇은 깨끗이 사라졌다.

    수금의 시간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이모(27·여) 씨는 고등학교 송년회 연락을 돌리면서 깜짝 놀랐다. 졸업 이후 코빼기 한번 보이지 않던 김모(27·여) 씨가 참석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송년회날 이씨가 가져온 두툼한 쇼핑백에 든 것은 청첩장. “결혼식에 꼭 와야 해.” ‘낯짝도 두껍다’는 주위의 표정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김씨는 열심히 청첩장을 돌렸다. 그리고 바쁘다며 쌩하고 돌아서는 김씨. 송년회가 끝난 뒤에도 수시로 연락하며 결혼식 날짜를 알렸다.

    얄미운 그에게 이씨는 지난 친구들의 경조사 명단을 정리해서 내밀었다. ‘김○○ 결혼식, 장□□ 할머니 장례식’ 등이 나열된 종이를 보자 김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뒤로 김씨는 예전처럼 다시 연락하지도, 모임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위 사례들을 보며 그저 웃고 넘기기에는 뜨끔한 사람도 적지 않을 터. 나도 모르는 사이 진상 남녀로 찍힌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면 지금 바로 과거의 행동을 돌이켜보시라! 서로에 대한 예의는 송년회도 예외일 수 없다. 한 해를 보내면서 자신의 진상도 떨쳐보내자. 송년회를 올해만 하고 그만둘 것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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