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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강 기자의 ‘溫故而知新’

팍팍한 주변환경 ‘어쭈구리’가 절로 나오네

  • bsk@donga.com

팍팍한 주변환경 ‘어쭈구리’가 절로 나오네

팍팍한 주변환경 ‘어쭈구리’가 절로 나오네

9월12일 추경예산안을 강행 처리하려다 실패한 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맨 앞)와 지도부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중국 한나라 때의 일이다. 어느 연못에 잉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연못에 큰 메기 한 마리가 들어왔다. 배고픈 메기는 잉어를 보자마자 잡아먹으려 들었다. 잉어는 메기를 피해 연못 이곳저곳을 헤엄쳤다. 하지만 메기의 추격을 피하기에는 역부족. 피하다 못한 잉어는 ‘초어(超魚)적’ 힘을 발휘해 뭍에 오른 뒤 꼬리를 다리 삼아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잉어가 뛰는 걸 본 한 농부가 그 뒤를 쫓았다. 잉어가 ‘뛴’ 거리가 9리(九里) 정도였을까. 잉어가 안심하고 멈췄을 때 농부는 이렇게 외쳤다. “물고기가 9리를 뛰었다(魚走九里).” 그러고는 뛰다 지친 잉어를 잡아 가족들과 맛있게 먹었다. 연못 메기를 피해 뭍에 올랐다지만 아무렴 잉어가 9리를 달렸겠는가. 그때부터 능력도 없는 사람이 능력 밖의 황당한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이 표현을 쓴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어쨌든 사전 표제어로도 등록되지 않은 ‘어쭈구리’가 요즘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즐겨찾기 용어’가 되고 있다. 발음은 같지만 의미는 각양각색. 그들은 왜 어쭈구리를 연발할까.

이름만 들어도 믿음직하던 리먼브러더스와 메릴린치가 파산, 매각되고 ‘따르릉~’ 보험광고로 익숙한 AIG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세계경제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대한민국 1가구당 적립식 펀드 1개’ 시대는 이런 미국발(發) 위기 속에 부메랑으로 꽂힌다. 펀드 수익률을 ‘클릭’하는 게 작은 기쁨이던 그들은 요즘 클릭과 동시에 이 감탄사를 내뱉는다. “어쭈구리?” 손절매 타이밍을 놓친, 혹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나오는 탄식이다.

354억여 원의 재산 중 펀드가 없었던 이명박 대통령이 9월17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펀드라도 사겠다”고 하자 수익률이 ‘-30%’를 넘어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보통의 직장인들은 다시 이 감탄사를 찾았다. 이번엔 “No, Thank you(됐거든요)!”라는 의미.

추석연휴 전날(9월12일) 새벽, 추경예산안을 강행하던 한나라당은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는 블랙코미디로, 민주당은 ‘독재’ ‘날치기 통과 미수사건’ 등 갖은 용어로 연휴 기분을 망쳤다. 9월18일 4조5685억원의 추경예산안에 합의하면서 각 당은 자화자찬이다. 역시나 어쭈구리가 등장했다. 이번엔 “한 시간 만에 합의할 것을 굳이 국민의 연휴 기분을 망쳐가며…”라는 뜻이다. 민주당 원혜영 원내대표가 추경 강행 실패로 코너에 몰린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를 보이지 않게 도왔다는 분석에는 ‘어쭈구리×2’.



한동안 잠잠하던 한나라당의 수도권 친이(이재오 정두언 중심) 의원들이 추경 강행 실패를 이유로
팍팍한 주변환경 ‘어쭈구리’가 절로 나오네
홍 원내대표를 공격하며 부활의 나래를 펴자 ‘어쭈구리×∞’가 작렬한다. “먹고살기 팍팍한 요즘, 가뜩이나 위기설 등으로 국민의 불안지수가 높아지고 있는데 권력 다툼이나 하고….” 유래야 어떻든, 그나마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어 고맙다.

한편 충북대 조항범 교수(국어국문학)는 ‘어쭈구리’는 ‘어쭈(아주)’+‘그리(그렇게)’의 변형으로 추정되며 우리 고유어라고 주장한다. 유래가 명확하지 않아 한자성어로 설명되는 것 같다는 얘기다. ‘새국어생활’ 제14권에서다.



주간동아 2008.09.30 654호 (p4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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