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4

2008.07.15

비상구 없는 ‘막장 사회’ 비틀기

  • 현수정 공연 칼럼니스트

    입력2008-07-07 1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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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구 없는 ‘막장 사회’ 비틀기

    ‘요식업중앙회장’ 선거 당선을 위해 인질까지 잡아온 엄 사장 일행.

    ‘진실은 밝혀지게 돼 있고, 결국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후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 아닐까. 현실에서는 실력은 없으나 잔머리 굴리며 줄타기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제외한 타인에게만 적용되는 ‘원칙’을 밀고 나가는 사람들이 힘 있는 존재가 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돌아온 엄사장’(박근형 작·연출)은 그러한 모순적인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데, 정색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실실 웃음을 흘리며 이죽거리듯 은근하게 풍자한다.

    울릉도 출신의 엄 사장은 포항으로 진출해 불법 선거운동에 열을 올린다. 김 경사, 이 순경, 유 순경 등의 경찰도 그와 한솥밥을 먹으며 돕고 있다. 군대에서 ‘모시던’ 형님의 조카가 포항의 ‘요식업중앙회장’으로 출마했기 때문. 그는‘형님의 조카’에게 위협이 되는 라이벌을 기권시키기 위해 그 아들을 납치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던 중 불쑥 사무실로 들어와 버릇없는 언행으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드는 청년이 있으니, 바로 엄 사장이 오래전에 버린 여인의 아들 ‘엄고수’다.

    고수가 아버지를 찾아온 까닭은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고 엄 사장을 울릉도에 데리고 가서 장례를 치르기 위한 것. 어머니의 뼛가루를 꺼내놓고 석유를 뿌리는 ‘와일드한’ 해프닝을 벌인 끝에 고수는 엄 사장에게서 울릉도에 함께 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러고는 엄 사장이 밀고 있는 후보를 위해 그 라이벌의 아들을 잡아다주고 라이벌을 협박하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한층 더 ‘와일드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 결과 엄 사장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고수 역시 아버지를 데리고 가 성공적으로 장례를 치르게 된다. 극은 엄 사장 일행이 형님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이 작품은 2005년 초연한 ‘선착장에서’의 후편으로, 전편에 이어 ‘비상구 없는 사회’의 모습을 시니컬하게 드러낸다. 전편이 울릉도라는 밀폐된 공간을 배경으로 타락할 대로 타락한 ‘막장 사회’를 상징적으로 묘사했다면, 이번 작품은 포항으로 진출한 엄 사장이 파렴치하게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모습을 통해 뭍으로 나가도 다를 바 없는 부패한 세상을 보여준다. 배경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세상은 악의적이며 비상구는 없다.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엄 사장은 잘 먹고 잘 사는 반면 전편의 ‘명숙’, 후편의 ‘은희’처럼 그로 인해 상처 입은 약자들은 유서 하나로 한바탕 해프닝만 벌이고 잠잠히 사라져준다.

    한편 전편과 비교하면 작품의 무게감은 줄고 시시덕거림은 많아졌다. 반면 시의성 있는 풍자가 한층 밀도 높게 배치돼 쾌감을 준다. 극의 곳곳에서 쇠고기 문제, 학력 위조 문제 등이 은근슬쩍 거론되고, 아예 ‘먹을 것 가지고 장난치는’ 요지경 세상을 비판하듯 형편없는 후보가 ‘요식업중앙회장’에 당선되는 상황이 연출된다. 또 피해자의 대변인인 고수 역시 엄 사장에게 편승하고, 극의 말미에는 엄 사장 일행의 승승장구가 예고되는 등 섬뜩하도록 시니컬한 작가의 시선도 느껴진다. 그리고 ‘전과도 많고 여자도 많지만 민심을 못 얻는 것이 한 가지 흠’이라고 묘사되는 후보가 불법 선거운동을 통해 당선되고, 그에게 줄선 ‘파렴치한’들은 후한 상을 받는다.



    선거 둘러싼 사회 부정적 이면 블랙유머로 그려

    비상구 없는 ‘막장 사회’ 비틀기

    엄 사장의 아들 역으로 출연해 호연을 보여준 탤런트 고수.

    주목할 것은 이처럼 시니컬한 내용이 코믹한 상황들을 통해 전개된다는 점이다. 특히 엄 사장이 보여주는 ‘하수(下手)’의 진면목이 관객의 폭소를 유발한다. 그는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입혀 죽게 만드는 ‘간접 살인’을 저지를지언정, 실제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라이벌의 아들을 바닷가에 묶어놓고 고문하는 척하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은 차라리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권선징악의 메커니즘에서라면 벼락을 맞거나 계곡에서 떨어져 죽어야 할 것 같은 비도덕적인 사람들이 고군분투하며 성공하는 인생역전을 호의적으로 바라본 관객은 뒤돌아 생각해보면 뒤통수를 맞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박근형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뒷골목 인생’들을 만날 수 있고 금기를 깬 ‘비도덕적인’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이힐을 신고 담배를 피우는 황 마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황 마담을 옆에 두고 애인의 가슴을 만지는 김 경사, 사람을 고문하면서 일상적 대화를 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그 예다. 의외성을 자연스러운 상황인 양 제시하는 ‘박근형표 블랙유머’는 사회의 부정적 이면을 묘사하는 그의 ‘사회고발’ 방법이기도 하다.

    한편 연극을 구성하는 것은 사건의 전개보다 상황 묘사인데, 이는 특유의 블랙유머를 돋보이게 하는 구조지만 동시에 작품이 긴장감을 잃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특히 ‘돌아온 엄사장’은 시작 부분부터 느슨하게 전개되는 플롯과 감성적 깊이가 느껴지는 부분을 찾기 힘들어 풍자와 비판에서 냉철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사실적으로 꾸며진 시골 다방의 모습이나 말의 묘미를 살린 대사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가 눈에 띄었다. 고수는 민소매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근육질의 팔로 여심을 사로잡았지만, 그보다도 집중력 높고 자연스러운 연기로 더욱 눈길을 끌었다. 황 마담(황영희 분), 엄 사장(엄효섭 분)의 천연덕스러운 연기 또한 가히 ‘고수(高手)’급이다. 8월3일까지, 원더스페이스 동그라미극장, 문의 02-763-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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