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4

2008.07.15

전문 감정인이 법원·검찰 봉이냐

사나흘 투자해 재판 도왔더니 수당 2만7000원 … 일반 증인과 같은 대우에 불만 고조

  •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2008-07-07 1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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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 감정인이 법원·검찰 봉이냐

    국민배심제가 도입되면서 전문 감정인 처우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A씨가 법원으로부터 받은 소환장.

    “협박이나 다름없다. 배려도 없고…. 돈 문제를 떠나 자존심이 무척 상한다.”

    최근 기자와 만난 정신과 의사 A씨는 검찰과 법원의 감정인 활용 실태에 불만을 토로했다. A씨는 강력사건이 터질 때마다 바쁜 시간을 쪼개 전문 감정인으로서 검찰 수사와 법원 재판에 여러 차례 협조했다. 하지만 남는 것은 손에 쥔 몇만원과 구겨진 자존심뿐.

    A씨는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차원의 불만이 아니다”라고 전제한 뒤 “검찰과 법원의 전문 감정인 활용과 처우 방식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A씨는 “감정인에게 지급하는 수당부터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검찰이 누구나 알 만한 강력사건을 수사할 때는 도움을 주고도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법원의 경우도 마찬가지.

    미국에선 시간당 200달러 수준 … 한국과 처우 천양지차

    “한번은 법원에서 감정인 소환을 해와 몇 시간 동안 차를 타고 달려가 한참을 기다린 끝에 진술을 했다. 그런데 재판이 끝나니 수당으로 3만5000원을 주더라. 피고인 증인으로 나온 사람도 똑같은 액수를 받았다. 일반 증인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돈 문제가 걸려 있기에 어디에 하소연도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돈 액수를 떠나 감정인의 업무와 노력을 비즈니스적 시각에서 보지 않는다는 점이 상식적으로 잘못됐다.”



    형사소송법 13장(감정) 178조는 감정인의 여비와 감정료에 관한 부분을 법률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감정인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여비, 일당, 숙박료를 받고 여기에 감정료를 청구할 수 있다.

    여비 항목과 금액은 대법원 규칙으로 정한 범위 내에서 결정한다고 돼 있다. 감정료 역시 ‘법원이 인정하는 금액’이라고 규정해놨다. A씨의 경우를 이에 대입해보면, 교통수단을 이용해 몇 시간에 걸쳐 해당 법원에 찾아가 재판 시간을 기다린 뒤 법정에서 진술하기까지의 여비, 일당, 감정료 등을 3만5000원으로 산정한 것이다. 더욱이 감정료 조항에선 법원이 정한 범위에서 법원이 정한 기일, 장소에 출석한 경우에만 감정료를 지급한다고 못 박아놨다.

    이는 미국 등 다른 나라의 사례와 대조적이다. A씨는 “미국의 경우 수사나 재판에 참여하는 전문 감정인을 상당히 배려한다. 감정인이 수사나 재판 등에 기여한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일당을 지불하는데 시간당 평균 200달러 수준이다. 즉, 전문지식을 갖춘 감정인들이 생업에 나서지 않고도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요구하는 수사 감정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고 있다”고 전했다.

    모 대학에서 범죄심리학 교수로 재직 중인 B씨는 큰 민·형사 사건에 여러 차례 전문 감정인으로 참여했다. B씨 역시 A씨와 비슷한 처우를 많이 받았다. 기자가 전문 감정인 처우 문제를 거론하자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문하면서 “법원 등은 아직 전문 감정인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일침을 가했다.

    B씨는 “공익을 위한 민·형사 사건에선 감정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강조한 뒤 “앞으로 국민배심재판이 활성화돼 공판 과정에서의 감정 증거가 양형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 부각되면 감정인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도, 법원 등에선 아직 개념조차 형성이 안 된 형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B씨는 수당 얘기를 꺼내자 “한번은 사나흘 시간을 투자해 피의자 정신감정 조사에 참여하고 법원에 출두해 감정인 진술을 했는데 수당으로 2만7000원을 받았다”면서 “감정인 처우 등에 관한 관련 제도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점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단면”이라고 전했다.

    불출석 땐 7일 이내 감치 … 당근은 작고 채찍만 세

    감정인에 대한 처우 문제가 단지 비용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인 소환 과정에도 상당한 불만이 존재한다. A씨는 한번은 법원으로부터 살인사건 재판에 출석해 피의자 정신감정 결과를 진술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런데 A씨는 소환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환장에 ‘정당한 사유 없이 불출석하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에 처하거나 구인할 수 있으며, 과태료 명령을 받고서도 다시 출석하지 않을 때는 7일 이내 감치에 처해질 수 있다’는 문구가 삽입돼 있었던 것. 이는 형사소송법 151조(증인이 출석하지 않았을 때의 과태료) 조항이 적용된 것이다. 법원 처지에선 전문가들을 감정인이라기보다 증인으로 간주하고 증인 관련 법규를 적용한 셈이다.

    그러나 A씨 등 법원 감정에 참여해본 전문가들은 사실상 법원의 협조 요청을 거부할 의사가 없으며, 더욱이 출두 시간이나 날짜도 사전에 조율할 수 있는 감정인의 처지에선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A씨는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어 법원에 항의했다. A씨는 “도와주고 싶어도 막상 그런 소환장을 받으니 기분이 상하더라. 감정에 한 번쯤 참여해본 전문가라면 마찬가지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은 증거 조사 결과를 양형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 위해 A씨에게 감정인 신분으로 법원 출두를 요청했음에도 사실상 일반 증인과 같은 소환 기준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A씨에게 일반 증인소환장을 그대로 보낸 것이다. 확장해보면 법원 등에선 아직도 재판 증거 조사 과정에서 감정에 투입되는 감정인, 재판에서 감정 결과를 진술하는 감정 증인이 모호한 기준에서 구별되고 있는 것이다. 형사소송법 179조에는 실제 감정 증인 규정이 있는데 ‘특별한 지식에 의해 알게 된 과거의 사실을 신문하는 경우에는 감정이 아닌 증인 규정을 적용한다’고 돼 있다.

    A씨는 “미국에선 감정인들이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 걸맞은 처우를 받는다. 의사들의 경우 감정의학을 생업으로 하는 사례도 흔하다. 그만큼 감정 분야 전문가들도 점점 늘고 있다”고 전했다.

    B씨도 “앞으로 국민배심제도가 도입돼 활성화되면, 특히 형사사건의 경우 변호인 쪽에서 감정의 필요성이 증가할 것이다. 그런데도 감정인들의 처우에 변화가 없다면 피해자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감정인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사나 재판에서 당사자들의 인권보호가 강화되려면 감정인들의 역할과 처우에 대해서도 심각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법원 관계자는 “그동안 재판부가 감정인을 출석시킨 사례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곤 많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일부 전문 감정인들의 문제제기가 있는 만큼 정확한 실태 분석을 통해 구체적인 보완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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