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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대 특파원의 중국 차세대 지도자 열전(26)|왕이(王毅)

‘신언서판’ 겸비한 외교가의 샛별

뒤늦은 공직 입문 초고속 승진 거듭 … 소문난 ‘일본통’에 한반도 문제 전문가

  • 하종대 동아일보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신언서판’ 겸비한 외교가의 샛별

6월3일 중국 공산당 대만공작판공실 주임 겸 국무원의 대만사무판공실 주임에 임명된 왕이(王毅·55·사진) 외교부 상무부부장은 중국 외교가에서 떠오르는 샛별이다.

문화대혁명(1966년 5월~1976년 10월·이하 문혁)으로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외교부에 들어왔지만 남다른 노력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최연소 부부장에 오른 데 이어, 과거와 달리 업무가 막중해진 대만사무판공실 주임 자리에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왕 주임은 장관급 이상 간부 가운데 보기 드문 베이징(北京) 출신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1969년 9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헤이룽장(黑龍江)성에 지식청년으로 하방된 그는 7년5개월간이나 농촌에서 생활했다. 그는 문혁이 끝난 뒤인 77년 2월에야 베이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왕 주임은 그해 12월, 문혁 이후 10년 만에 치러진 대학입학시험에서 베이징 제2외국어대 아시아아프리카어학부 일어과에 합격했다. 농공병단(農工兵團)에서 일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한 결과였다.



대학 입학 당시 만 25세로 학과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는 늘 조숙했고 거동도 신중했다. 또한 식견이 넓은 데다 논리적이고 주견도 뚜렷해 시류에 흔들리지 않았다.

왕 주임을 지도했던 교수들은 그의 대학 졸업논문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친밍우(秦明吾) 당시 교수에 따르면, 그가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중국과 일본의 역사 비교’ ‘일본어와 몽롱시(朦朧詩)의 비교’는 다른 학생들의 졸업논문보다 수준이 지나치게 높아 이를 심사, 평가할 수 있는 교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몽롱시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사회 불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무형식의 시를 말한다. 그의 졸업논문은 일어계 잡지 ‘일어학습과 연구’라는 권위지에도 실렸다.

1982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외교부에 들어간 뒤 그는 승진가도를 달렸다. 외교부에 들어갈 때는 만 29세의 늦깎이였지만, 5년 만에 아시아를 담당하는 아주사(亞洲司) 처장에 올라 그보다 10여 년 전 외교부에 들어간 선배들을 앞질렀다.

이어 1995년 6월 아주사 사장(司長), 98년 4월 외교부 부장 조리(助理)에 이어 2001년 만 48세 나이에 외교부 최연소 부부장(서열 3위)이 됐다.

성실 근면한 근무자세 타의 추종 불허

이 같은 초고속 승진은 윗사람들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외교부 직원의 주요 평가능력 가운데 하나는 문장을 잘 다듬어 완성도 높은 연설 원고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비터우(筆頭)’라 불리는 이 분야에서 왕 주임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82년 후야오방(胡耀邦)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연설 원고를 기초할 때다. 왕 주임이 쓴 원고 초안을 본 후 총서기는 단 두 곳만 고치고 원고에 ‘아주 잘 썼음’이라는 비점(批點)까지 찍어 내려보냈다.

보통 담당 직원이 초고를 쓰면 상급자를 거칠수록 빨간색 펜으로 수정되는 자리가 점차 늘어 외교부장까지 올라가면 원고가 온통 빨간색인 게 상례인데, 그가 쓴 원고는 늘 거의 고칠 데가 없었다고 한다.

성실 근면한 근무태도 역시 외교부에서 그를 따라올 자가 없다. 밤 12시 넘어 퇴근하는 것은 보통이고 바쁠 때는 새벽 2, 3시까지 일을 하는데도 그는 어김없이 오전 6시면 사무실에 나온다.

신중하고 근엄한 그의 표정은 외교부의 많은 직원들에게 ‘쿨’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사람이 그리 살면 무슨 재미가 있느냐”는 반응을 보이는 직원도 있다. 평소 테니스를 즐기고 외교부 등산협회 명예회장으로서 등산도 자주 한다.

왕 주임은 ‘일본통’이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을 뿐 아니라 주일 대사 3년을 포함해 7년6개월간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또한 1982년 외교부에 들어간 뒤 줄곧 아시아를 담당하는 아주사에서 일했다.

대만관계 개선 중책 새 시험대

그의 일본어 구사능력은 일본인이 탄복할 정도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총리와는 사적으로도 가깝게 지내며 아키히토(明仁) 일본 왕 부부와도 교분이 깊다. 하지만 그가 주일 대사로 임명된 2004년 9월,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양국관계는 냉각되기 시작했고, 일본의 평화헌법 수정과 최근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한 동중국해 가스전 분쟁,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치치하얼(齊齊哈爾) 화학무기 방치사건 등이 겹치면서 양국관계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가 주일 대사로 취임한 지 3개월 만에 일본은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에게 비자를 발급해 중국을 더욱 자극했고, 2005년 5월 고이즈미 전 총리가 “올해 안에 또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발언하자 방일 중이던 우이(吳儀) 부총리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까지 터졌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와세다대 등 여러 민간기관을 돌면서 일본이 지난 역사를 반성하고 중국과 일본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는 중국의 기본 외교정책을 설파했다.

이런 것들이 밑거름이 돼 2006년 10월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일본 총리로서는 5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지난해 4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일본을 방문했고, 올해 5월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일본을 답방했다.

꽁꽁 얼어붙었던 양국관계가 아베 전 총리의 ‘파빙지려(破氷之旅)’, 원 총리의 ‘융빙지려(融氷之旅)’, 후 주석의 ‘난춘지려(暖春之旅)’를 거치면서 해빙을 넘어 완연한 봄날 관계로 바뀌었다.

왕 주임은 앞서 2003년 8월 제1차 6자회담의 중국 측 수석대표로서 북한 핵을 푸는 첫 단추를 잘 끼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왕 주임은 이제 대만과의 관계 개선과 통일이라는 중책을 부여받았다. 그는 임명 발표 직후 “양안관계 발전과 조국 통일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새로운 이 임무는 그에게 도약의 발판이자 또 다른 시험대다. 그가 이 시험대를 잘 통과해 부총리 이상의 영도자급에 오를지 주목된다.

왕이 프로필

·한족(漢族)

·1953년 10월생

·베이징 출신

1969. 9 고등학교 졸업

1969. 9~1977. 2 헤이룽장(黑龍江)성 농촌 단련

1977. 2~1978. 3 베이징(北京)으로 돌아옴

1978. 3~1982. 2 베이징 제2외국어대 아시아아프리카어학부 일어과 졸업

1982. 2~1984. 9 외교부 아주사(亞洲司) 직원

1984. 9~1987. 8 외교부 아주사 부처장

1987. 8~1989. 9 외교부 아주사 처장

1989. 9~1993. 4 주일 대사관 정무참사관

1993. 4~1994. 3 주일 대사관 공사참사관

1994. 3~1995. 6 외교부 아주사 부(副)사장

1995. 6~1998. 4 외교부 아주사 사장

1997. 8~1998. 2 미국 조지타운대 외교연구소 방문학자

1998. 4              난카이(南開)대 세계경제 전공 경제학 석사

1998. 4~2001. 2 외교부 부장 조리(助理) 겸 정책연구실 주임

1999. 9              외교학원 국제관계 전공 박사

2001. 2~2004. 9 외교부 부(副)부장

2004. 9~2007. 9 주일 대사

2007. 9~2008. 3 외교부 부부장, 당조(黨組)서기

2008. 3~2008. 6 외교부 상무부부장, 당조서기

2008. 6~현재 당 중앙위원회 대만공작판공실 주임 겸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주임

              제17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주간동아 2008.07.01 642호 (p58~60)

하종대 동아일보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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