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6

2007.10.16

디지털 시대를 예견한 발명품 ‘한글’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07-10-15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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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시대를 예견한 발명품 ‘한글’

    <b>한글</b> 김영욱 지음/ 루덴스 펴냄/ 272쪽/ 1만2000원

    문자는 실용성이 생명이다.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쉽게 쓸 수 있다. 세종대왕이 1446년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래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문맹률이 낮은 나라로 자리매김한 이유다. 이 지구상의 문자가 모두 사라지더라도 한글은 가장 마지막에 사라지지 않을까. 그래서 ‘한글’의 저자 김영욱(서울시립대 국어국문과 교수)은 한글에 대해 “세종이 발명한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한글은 불과 24개의 글자로 한국어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언어를 음성적으로 표기할 수 있으며 자연의 소리, 동물의 소리까지도 섬세하고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자체계다. ‘한글’은 한글이 우수한 까닭과 한글의 유전자적 특질, 한글을 만든 세종의 인간적인 면모 등을 다룬다. 세종 10년에 벌어진 한 살부(殺父) 사건의 대책을 세우는 과정에서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세종의 어진 마음이 한글 창제에 이르게 됐다는 가정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하다. 하지만 그 논리적 근거가 확실해 이 책을 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한글은 21세기를 맞이해 더욱 빛나고 있다. 체계성과 경제성, 과학성으로 한글은 언어전달의 기능 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문자체계로 떠오르고 있다. 예를 들어 기자회견장에서 기사를 작성해 무선 인터넷으로 보낸다고 하자. 중국과 일본 기자들은 글자를 입력하려면 별도의 변환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회견장에서 기사작성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국 기자들은 작성한 문서를 바로 e메일로 보낼 수 있다.

    머지않아 기자들은 휴대전화로 기사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도 한글은 최고의 기능을 구가한다. 한글은 알파벳과 달리 음성학적 특징까지 고려한, 정밀하게 설계된 문자시스템이다. 한글은 기본 자음인 ㄱ, ㄴ, ㅁ, ㅅ, ㅇ 5개를 가획해 글자를 늘려가며 우주를 상징하는 둥근 점인 ‘·#51902;’(天)과 땅을 상징하는 ‘―’(地), 하늘과 땅 사이에 우뚝 서 있는 ‘ㅣ’(人)의 세 기본 모음으로 모든 모음자를 만들 수 있게 설계됐다. 이런 설계원리를 이용해 휴대전화의 자판을 만들었기에 불과 10개 내외의 자판으로 ‘가장 쉽고 간단하게, 그러면서도 가장 풍부하게 인간의 언어를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총, 균, 쇠’의 저자인 문명비평가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라고 극찬한 이유이기도 하다. 영어 알파벳만 해도 26개의 자모 글자가 모두 기본자이기에 도저히 8자로 축소할 수 없다. 어쩌면 세종은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15세기에 이미 내다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가 빠르게 디지털 문화를 선도하는 것도 ‘미래지향적’인 문자체계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한글은 실용성뿐 아니라 미학적인 면에서도 세계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예를 들어 ‘아시아의 책, 문자, 디자인’이라는 책에서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두 디자이너가 나눈 이야기를 살펴보자.

    “알파벳의 문제점은 균일하다는 것입니다. 한 점, 한 획이 단순화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글자 한 글자의 획수나 농도가 거의 같습니다. 기능적으로 기억하거나 표기하기는 쉽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재미가 없어요. 단순한 날들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느낌이랄까요. (중략) ‘문자의 성’은 균일하고 균질한 문자의 흐름만으로 구축되는 게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치기도 하고, 의미가 드러나기 쉬운 농도의 얼룩을 지닐 필요도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바뀌어갈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때 ‘한글의 복합성’이나 ‘한자의 조자법(造字法)’이 다시 문제가 되겠죠. 암호의 미지성도 주목될 것입니다. 한글 합성법이나 이모티콘, 암호나 부적 문자의 복합성 등은 그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스기우라 고헤이)

    “네, 한글이 갖는 우주적 상형성 바탕과 삼차원적 조합성, 소리 무늬의 표현, 그리고 이모티콘이 지향하는 또 다른 상형을 추구하는 ‘한자적 조자법’이 전자 인터넷 시대에 새로운 글자 상상의 재료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평면적인 알파벳을 사용해온 사람들이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부분, 그 허전한 곳을 채우려는 이모티콘이 장난스럽게 등장했지만, 그것은 새로운 상형 표현법으로서의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안상수)

    이모티콘은 한글의 생성구조와 닮았다. 양성과 음성 모음을 활용하는 이치도 음양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이모티콘이 새로운 상형문자로 성장할 가능성마저 있다는 게 아닌가? 한글은 표음문자지만 상형문자 속성도 있어 영상이미지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한다고 한다. 저자 또한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유산인 한글이 미래를 힘차게 열어갈 것으로 내다본다.

    오늘날 모든 문화는 임팩트가 강해야 한다. 영상이미지 시대에는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다. 인간의 몸 가운데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눈이다. 우리가 늘 접하는 문자도 이제 정보전달 기능뿐 아니라 이미지 요소가 강해야 한다. 그래서 상형적인 속성이 큰 한글은 이제 물 만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한국사회에서 한글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려면 이 책 ‘한글’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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