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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주고 ‘짝퉁학위’로 학력 세탁 사회지도층 낯 두꺼운 행세

주간동아 확인 美 PWU 출신 인사 40명 넘어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돈 주고 ‘짝퉁학위’로 학력 세탁 사회지도층 낯 두꺼운 행세

돈 주고 ‘짝퉁학위’로 학력 세탁 사회지도층 낯 두꺼운 행세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얼굴만 비치고 졸업장을 받는 사람이 수두룩했어요. 남들은 그 졸업장으로 출세했지만, 가난해서 등록금을 못 낸 나는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연구비 신청도 못했죠. 책을 많이 읽고 논문을 발표해도 대학을 나오지 않아 무시당한 겁니다.”

역사학자 이이화(70) 선생이 어느 강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수학했다. 하지만 학비가 없어 중퇴하고 동아일보 출판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일하다 한국사 연구에 천착해 이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다. 그런 그가 학술진흥재단에 연구비를 요청했다 박사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능력보다 학벌 우선하는 문화

한국은 학력(學歷)이 대접받는 학벌사회다. 국어사전을 보면 ‘학벌’에 대한 정의가 ‘① 학력이나 출신 학교의 지체 ② 같은 학교 출신자로 이뤄진 파벌’이라고 돼 있다. 한국에선 ①, ②가 모두 힘을 발휘한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가 웅변하듯 출신 학교의 지체가 능력을 가늠하고 외국대학의 학위는 부러움의 대상이요, ‘같은 학교 출신자’는 사회생활의 윤활유 구실을 한다.

신정아(35) 전 동국대 교수의 학위 조작으로 불거진 ‘가짜 학력’ 파문의 후폭풍이 거세다. 경찰이 서울 강남의 스타강사를 상대로 ‘허위 학위’ 수사를 벌이고 있고, 대학에는 기업의 학력 조회 요청이 몰려든다. ‘가짜 학위’ ‘학력 세탁’이 판치는 까닭은 학력(學力), 능력(能力)보다 학력(學歷), 학벌(學閥)이 중시되는 문화 탓이다.



전공과 무관하게 키재기 하듯 줄선 ‘대학 서열’ 탓에 한국에선 편입제도도 ‘학력 세탁’ 수단으로 이용된다. ‘하위 서열’ 대학에서 ‘상위 서열’ 대학으로 학교를 옮길 때 상당수가 같은 전공을 선택한다. ‘간판’을 바꾸려고 6년에 걸쳐 두 대학을 다니면서 같은 과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많은 것. 선진국에선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사문서 위조를 통한 학위 조작을 ‘높은 수준’의 학력 세탁, 한국식의 편입을 ‘낮은 수준’의 학력 세탁이라고 한다면, 학위 제조공장을 의미하는 이른바 ‘디플로마 밀(diploma mill·DM)’에서 학위를 얻는 것은 ‘중간 수준’의 학력 세탁이다. 미국 영국 호주 등의 DM을 통한 ‘학력 세탁’은 한국을 포함한 일부 아시아 국가에 만연돼 있다. 이들 대학도 아시아인을 주요 소비자로 여긴다.

방앗간에서 곡식 찧듯 학위가 남발되는 DM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으로는 범여권의 Y 의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자리한 PWU(퍼시픽웨스턴대)에서 석사(정치학)를 마쳤다. 한나라당에서 15, 16대 의원을 지낸 L 전 의원도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사회학)를 받았고, K 전 의원과 또 다른 K 전 의원 역시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동문’이다.

아시아인이 주요 소비자

PWU는 통신을 이용한 원거리학습(Dis- tance Learning)을 통해 학위를 주는 ‘대학’으로, 미국에서 정규 교육과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16대 총선 때 자민련 공천을 받은 한 미국 동포도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경영학)를 받았는데, 미국 동포사회에서 이 대학은 DM으로 벌써부터 유명한 곳이다. 미국 동포로 영어학습 교재를 저술해 유명해진 C씨도 이 대학에서 언어학(박사)을 공부했다. 비전통 교육(Nontraditional Education)을 표방한 이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한국의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는 ‘주간동아’가 확인한 것만 40명이 넘는다.

한 대학의 도서관장을 지내고 은퇴한 명예교수를 비롯해 전·현직 대학교수, 사학법 문제로 정부와 대립한 한 사학단체의 수장,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 인사 등이 이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일부 인사들은 자신이 받은 학위를 ‘명예박사’로 소개한다.

돈 주고 ‘짝퉁학위’로 학력 세탁 사회지도층 낯 두꺼운 행세

미국 버클리대학 전경. 미국 대학의 석·박사 학위는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훈장’이다.

PWU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인사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한국의 잣대로는 학력이 미흡한 경우가 많다.

금융권에서 승승장구하는 A 회장은 가난 때문에 야간학교를 나온 뒤 자기 힘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와 업계 최고 수준의 회사를 만든 인물로 알려졌다. 그런데 그가 졸업한 학교도 PWU다. 그는 금융회사를 설립하면서 대형 은행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경제계의 B 회장은 자수성가한 기업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년시절은 불우했지만, 지금은 매출액 2조원대 그룹의 회장으로 우뚝 섰다. 그는 현재 장학재단을 통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쾌척하는 선행가이기도 하다. 그런 그도 PWU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이 학위를 디딤돌로 국내 대학에서 늦깎이로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미국에는 아시아인을 상대로 허술하게 학위를 내주는 ‘대학’이 PWU 외에도 적지 않다. ‘퍼시픽예일대’ ‘코헨 신학대’ 등이 유명하다. 브로커를 두고 학위 장사를 한 PWU는 통신을 이용한 원거리학습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나은 편이다. 교재를 나눠주고(판매하고), 함량 미달의 논문을 받은 뒤 학위를 주는 곳도 수두룩하다. 한국어로 된 논문을 받는 학교도 있다고 한다.

미국 고등교육인가위원회(CHEA) 인정을 받지 못한 대학의 학위로 한국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꿰찬 사람도 적지 않다. 서울경찰청 외사과는 7월 괌의 비인가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학술진흥재단에 학위 신고를 한 혐의(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로 박모(46) 교수 등 3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또 이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아 사립대 대학원에 진학한 혐의(업무방해)로 최모(35) 씨 등 2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PWU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명문으로 꼽히는 한국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눈에 띈다. 미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대학 학위를 한국에서는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진짜 못지않은 가짜’가 눈속임하는 것은 뿌리깊은 학력 중심주의 때문이 아닐까.

심각한 사회문제로 자각 필요

PWU는 “그동안 긍정적인 변화가 많았다”(이 대학 관계자 F씨)고 한다. 학교 이름도 CMU(캘리포니아미라마대. 공교롭게도 명문 카네기 멜론대학과 영문 약칭이 똑같다. 그러나 피츠버그의 카네기 멜론대학과 이곳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로 바꿨으며, MBA 과정도 운영하고 있다. 이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으려면 평균 4만6000달러(약 4200만원), 석사학위를 따는 데는 2만4000달러가 든다.

F씨는 “한국에서 100% 온라인 수강으로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 현재 베트남과 중국 학생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학생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엔 “한국 학생도 많다. 하지만 프라이빗한 내용은 알려줄 수 없다”고 답했다. 학교 이름을 바꾸고 아시아 소비자를 여전히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CMU의 학위를 앞세우고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거나 미국에서 공부했다고 자랑하는 한국인이 곧 나타날 듯하다. ‘주간동아’ 취재 결과 ‘수준 높은 재택학습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한국방송통신대학(이하 방통대)과 달리, DM들의 학사 관리는 형편없다. 그럼에도 방통대 학위보다 ‘디플로마 밀’의 학위가 더 대접받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신 전 동국대 교수는 학력(學力), 능력(能力)보다 학력(學歷), 학벌(學閥)이 대접받는 한국 사회가 만든 일종의 피해자가 아닐까. 가짜 학력과 경력으로 성공하려는 사람도 문제지만, 실력만으로는 인정받기 어려운 풍토가 거짓말을 만드는 것이다. 학력주의, 학벌주의는 사회를 좀먹는 병폐다.

“지연, 혈연, 학연을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라고 말한다. 지연과 혈연의 비합리성은 논리적 차원에서 명약관화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학연이나 학벌은 경쟁의 절차와 교육의 신성함으로 위장되고, 담론을 장악한 지식인들의 기반을 형성함으로써 비합리성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우리 모두 학벌과 관련해 고민을 공유할 시점에 이르렀다. 지식인들부터 자신의 학벌에 안주하거나, 자식이 좋은 대학에 진학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보다 학벌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이는 자각이 필요하다.”(연세대 홍훈 교수·경제학)



주간동아 2007.08.07 597호 (p28~30)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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