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3

2007.05.01

‘일제강점기’라니? ‘대일항쟁기’다!

  • 복 기 대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학예연구원·역사학 박사)

    입력2007-04-27 18: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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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라니? ‘대일항쟁기’다!
    얼마 전 역사학 관련 강연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앞서 말씀하던 분이 ‘일제(日帝)강점기’‘독립운동’ 등의 용어를 쓰는 것을 보고 필자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보다는 대일(對日)항쟁기, 대일항쟁운동으로 쓰는 것이 더 옳은 표현 아니겠느냐’는 요지였다. 이로 인해 토론이 잠시 샛길로 빠졌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대일항쟁기’라는 표현을 썼다. 너무 당연하게 써왔기 때문에 사실 그 의미를 논리적으로 따져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강연회를 계기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필자는 역사학에 입문한 이후 줄곧 고조선 시대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오고 있다. 고조선은 우리 민족의 궤적에서 ‘사라진 역사’다. 이것을 되찾는 것을 평생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고조선 역사는 1920년 전후에 이르러 마치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자취를 감추듯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일본의 역사날조 때문이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략한 것은 만주로 나아가기 위한 교두보 확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대한제국의 멸망이었다. 일본이 이를 위해 동원한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역사날조였다. 역사가 없는 나라, 그것은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동안 무수히 명멸해간 제국들의 역사적 교훈이지 않던가. 그래서 일본은 당시까지 남아 있던 고조선의 흔적들을 무참히 지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행위를 확인하면서 우리 민족은 무엇을 했는지 조사해봤다. 하나하나 찾아보노라니 가슴이 미어지는 정황들이 펼쳐졌다. 고종 황제는 쇠락해가는 제국을 지켜보고자 몸부림쳤으나 일본군의 군홧발에 종잇장처럼 짓이겨졌다. 대한제국은 순종 황제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며 군주정치의 막을 내리고 민주정치를 준비했다. 그 동력이 3·1운동이었다.



    대한제국 백성들은 3·1운동을 통해 피로써 침략자들에게 이 땅에서 물러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했고, 당시 민족 지도자들은 훗날을 기약하며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대일투쟁에 나섰다. 조국을 지키기 위한 일편단심으로 일본 황궁에, 침략군 무리에게 폭탄을 던지며 항거했다. 또한 광복군을 조직하여 연합군에 합류해 싸웠고, 본토는 임시정부에 성금을 보내 대일항쟁을 도왔다. 그러기를 36년, 우리는 결국 일본을 이겼다.

    우리 안에 잠재된 그릇된 역사인식 바로잡아야

    돌아보면 이들이 그 모든 고통을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은 삼천리강산을 지켜내고 후손에게 당당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의 피와 땀, 눈물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를 대부분의 역사교과서나 학자들은 ‘일본 식민지배 시기’ ‘일본강점기’ 등으로 표현한다. 이는 우리가 일본의 지배와 일본 역사 속에 묻히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아닌가. 필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의 숭고한 노력을 물거품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후손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1987년 개정된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한다’고 적혀 있다. 이는 우리 선조의 피나는 노력을 대한민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일제강점기라는 표현 대신 대일항쟁기를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36년에 걸친 일본과의 싸움과 전쟁을 거쳐 우리는 잃어버린 시절을 되찾기 위해 한곳을 보고 달려왔고, 지금 많은 것을 이루었다. 이쯤에서 한숨 돌리고 지난날을 돌아볼 때가 됐다. 바로 우리 안에 잠재된 그릇된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일이다.

    역사는 객관적으로 해석해야 하지만 주관적인 해석이 필요한 부분도 많다고 생각한다. 일본과 싸운 36년, 그 시기만큼은 분명 주관적으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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