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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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과 박수로 32명을 위한 진혼

버지니아공대 추도식 참관기 … 슬픔과 격려 교차, ‘네 탓이오’ 않는 성숙한 의식

  • 블랙스버그=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입력2007-04-25 1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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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과 박수로 32명을 위한 진혼
    사건사고 현장을 취재하다 보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하고 급박하며 여론의 관심을 많이 끄는지 알 수 있는 기준이 하나 있다. 취재 현장에 배치된 방송국의 ‘위성중계 차량’ 대수가 그것이다. 4월16일 발생한 ‘누군가’의 총기난사 참극 현장에 도착하면서 100대가 넘는 중계차를 한꺼번에 목격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건 발생 20시간 만에 사건의 성격은 한국 취재진에게 확 달라졌다. 용의자는 한국인 조승희였다. 그가 쌍권총으로 32명의 동료와 교수를 살해한 이 사건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정신병력의 외톨이가 얼마나 무서운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건 초기만 해도 그는 말 없고 자폐적인 학생 정도로만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정신분열적 수업 태도와 세상에 대한 적개심이 추가로 드러났고, 18일 뉴욕 NBC방송 본사에 배달된 10분 분량의 DVD 동영상은 세상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벤츠와 코냑과 상속재산(Trust Fund)이 부족하더냐…. 약하고 힘없는 사람을 일깨우기 위해 예수처럼 죽는다….

    “조승희는 미국이 책임졌어야 한다”

    세상과 겉돌던 그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광야로 추방된 구약성경의 인물 이스마엘, 1999년 13명을 살해한 뒤 자살한 컬럼바인 고교 살해범 2명과 동일시했다. 하지만 광기어린 그에게 가족을 잃은 버지니아 공대가 보인 반응은 우리네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젊은 영혼 32명을 위한 추도식에 더 어울리는 것은 뜨거운 눈물일까, 서로를 격려한다는 뜻의 박수일까. 기자는 17일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추도식을 지켜보며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 학생, 교직원 가족 1만5000명이 체육관과 인근 미식축구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열린 추도식은 박수 환호를 통한 상호 격려와 슬픔, 그리고 눈물로 절묘하게 버무려져 있었다.

    추도식 말미에 단상에 오른 이는 조승희를 어떻게든 인도하려 애썼던 니키 지오바니 교수(영문학)였다.

    “우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들이거든요. 우린 즐거워야 합니다. 우린 승리할 겁니다. 승리할 겁니다. 승리할 겁니다.”

    연설이 끝나자 운동장에 모인 학생 1만명은 ‘Let’s go Hokies’를 10여 차례 외쳤다. 칠면조 모양의 호키(Hokies)는 학교의 마스코트다.

    눈물과 박수로 32명을 위한 진혼

    4월17일 버지니아공대에서는 밤새 희생자들을 위한 촛불집회가 열렸다.

    사건 발생 나흘째를 맞은 19일 밤 교정에 설치한 위로의 글 게시판을 찾았다. 낮 시간보다 어둠이 내린 곳의 분위기가 궁금했다. 게시판에서 마주친 이 학교 시간강사 제러미 개릿 씨는 “제자 필립 리(중국계 미국인)가 죽었다. 다음 수업 때 수업 동료에게 뭐라고 말할지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취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뒤 새벽녘에 그에게서 e메일이 한 통 날아들었다.

    “오히려 미국이 한국에 그런 감정을 갖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 조승희는 1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으니 미국이 책임졌어야 한다. 버지니아공대를 다닌 3년 반 동안 우리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못했다. 그는 미국의 몫이었다.”

    주목받지 못하는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줄어드는 나라, 9·11 테러의 피해의식 때문에 더욱 장벽을 쌓고 남을 의심하는 나라. 조승희는 32명의 생명을 앗아갔지만, 적잖은 미국인에게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준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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