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6

2005.12.27

디지털 군중에겐 고삐가 없다

인터넷 익명성 새 군중 형성 최적의 인프라 … ‘애국심’은 공격 본능 분출 껍데기 역할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입력2005-12-26 1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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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군중에겐 고삐가 없다

    87년 6월26일 부산시 중심가에서 시민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도중 한 청년이 진압경찰을 향해 “최루탄을 쏘지 말라”며 절규하고 있다. 이 같은 국민적 저항은 끝내 군사독재 정권을 굴복시켰다.

    87년에 나는 군 복무 중이라 시민항쟁의 거대한 흐름에 동참하지 못했다. 당연히 100만의 군중 속에 섞여서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는 느낌이 어떤지 알 수도 없었다. 물론 대학 다닐 때 시위에는 열심히 참가했지만, 주로 경찰에 쫓겨 도망 다니느라 바빴지, 87년의 여름처럼 경찰을 쫓아가 무장해제시켜 버리는 제대로 된 군중 체험은 해볼 기회가 없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 가운데 인상적인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돌변한 시민들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바로 어제만 해도 시위를 하면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웬 데모냐”고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시위대를 열렬히 지원하는 게 아닌가. 이 말을 전해준 나의 후배는 시민들의 이런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한 여자 후배에게서 들은 얘기다. 그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 100만 인파 속에 실려 이리저리 흘러다니며 황홀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개인들을 나누던 벽이 무너지고 거대한 군중 속에서 구별되지 않는 하나로 결합될 때, 사람들은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 엑스터시를 체험하는 모양이다. 실제로 386세대에게 더 중요한 것은 혹시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근원을 갖는 이 몰아의 체험이 아니었을까?

    무너진 군중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은 군중의 붕괴였다. 1990년대에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도 무너졌다. 이 신념의 붕괴는 동시에 그 믿음 아래 똘똘 뭉쳐 있던 군중의 붕괴이기도 했다. 수많은 대중조직에 묶여 있던 이들이 참담한 환멸과 함께 집단에서 풀려나 얌전한 개인이 되어 시민사회 속으로 돌아갔다.



    그 후 90년대의 지성계에는 이른바 ‘포스트’ 담론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강하게 무정부주의적인 성향을 띠는 이 새로운 사조는 80년대의 집단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해방의 상징이었던 강고한 ‘조직’이 이제는 외려 훈육의 기관으로 여겨지고, 미덕으로 간주되던 집단주의는 억압의 이데올로기로 비난당하기 시작한다.

    90년대에 들어와 집단보다는 개인을, 이념보다는 현실을, 생산보다는 소비를 선호하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면서 거리에서 ‘군중’의 체험을 하는 것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기꺼이 ‘군중’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욕망일까? 우리는 거리의 정치가 끝난 시대에도 새로이 거리를 점령하고 나선 새로운 군중을 보게 된다.

    붉은 악마들

    2002년 거리에서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군중을 보았다. ‘빨갱이가 되라’는 글귀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무리들이 전국의 거리를 점령했다. 나 역시 그 무리들 틈에 끼여 있었으나 그들이 입은 붉은 유니폼에 거부감을 느껴, 그들과 온전히 하나가 될 수는 없었다. 수십만의 군중이 똑같은 색상과 모양의 유니폼을 입고 일제히 양손을 벌려 “대~한민국”을 외치는 장면에는 어떤 섬뜩함이 있다.

    디지털 군중에겐 고삐가 없다

    2002년 6월 월드컵 당시 거리 응원에 모인 군중.

    그 후로 또 한 번의 군중 체험이 있었다. 이번에는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하는 광화문 촛불집회였다. 그곳에서 수만 개의 촛불을 밝힌 사람들은 모종의 엑스터시를 느꼈을 것이다. 나 역시 야당의 부당한 탄핵 시도에는 분개했지만 그 촛불의 무리 속에 선뜻 몸을 섞는 데에 불편함을 느낀 것은, 촛불이 어쨌든 ‘대통령’이라는 이름의 최고 권력자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1년 반이 흘러 또 다른 형태의 군중이 등장했다. 이번에 등장한 군중은 현실의 거리가 아니라 사이버 공간을 점령했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의혹을 제기한 MBC ‘PD수첩’에 누리꾼들의 무차별한 공격이 가해졌다. 권력과 언론의 지원을 받아 ‘애국’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거국적 인터넷 여론몰이를 보며 나는 1930년대 나치가 등장하던 독일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군중과 권력

    사람들은 왜 ‘군중’이 되는 것일까? 거기에는 권력의 정치학, 관계의 사회학, 욕망의 심리학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은 이 문제에 관한 한 현대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카네티는 어린 시절 영국에서 3년을 보낸 뒤,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한다. 그 이듬해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은 이 유대인 소년에게 큰 정서적 혼란을 준다. 영국과 적국이 된 빈의 학교에서는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선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네티가 군중을 부정적으로만 본 것은 아니다. 1922년 독일의 수상 라테나우가 국수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한다. 거기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조직된 시위를 보고 카네티는 후에 술회했다. “나는 그때까지 군중을 마치 나를 향해 습격해오는 위협적인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때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 어떤 저항하기 힘든 힘에 의해 군중 속으로 빨려 들어가 나 자신이 군중의 일원이 되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부터 군중의 이미지는 그의 뇌를 떠나지 않아, 가능한 한 여러 군중을 관찰해보려고 애를 썼다. 그에게도 군중이 되고 싶은 욕망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때때로 내 자신의 육체 속에서 군중을 강렬히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선뜻 동화하기 어려운 어떤 잔재가 내부에 남아” 끝까지 군중과 하나가 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대신 그는 군중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는지 연구하는 길을 택한다.

    다섯 개의 군중

    ‘군중과 권력’에서 카네티는 군중을 다섯 가지 부류로 나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의 예를 들면, 87년도의 시민항쟁은 권력을 전복하는 ‘역전군중’에 해당한다. 87년 말에 쏟아져 나온 노동자 대투쟁은 하던 일을 멈추고 연장을 내려놓는 군중, 즉 ‘금지군중’의 예에 해당한다. 80년대 말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곧이어 권력이 연출한 공안정국 속에서 목표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 군중은 ‘도주군중’이라 할 수 있다.

    앞의 것이 고전적인 군중의 형태라면, 최근에는 디지털 미디어와 연결된 또 다른 형태의 군중이 등장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군중은 카네티에 따르면 ‘축제군중’에 해당한다. 탄핵반대 촛불집회의 군중은 ‘축제군중’의 형태를 띤 ‘역전군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국적으로 ‘MBC 죽이기’에 돌입한 누리꾼의 무리는 아마도 유대인인 카네티가 가장 두려워했을 ‘추적군중’에 해당한다.

    누리꾼들이 폭언과 협박과 테러를 가하는 것은, 그 모든 잘못을 덮어줄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애국심’이다. 하지만 나는 MBC에 대한 누리꾼의 집단폭력이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라 믿지 않는다. “군중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동물적 힘과 열정을 강하게 느끼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드러나 있는 온갖 사회적 핑계와 요구를 모조리 이용하려 든다.”

    디지털 군중에겐 고삐가 없다

    MBC 뉴스데스크가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 결과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뒤 인터넷 시청자 게시판에는 ‘MBC가 과학적 연구를 검증할 능력이 있느냐’ ‘광고를 중단해야 한다’`는 등 누리꾼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군중은 네 가지 속성을 갖는다. “군중은 언제나 성장하기를 원한다.” 어떤 한계를 설정해도 군중은 성장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군중의 내부에는 평등이 지배하고 있다.” 정의를 위한 모든 요구는 군중이 되어본 체험에서 그 에너지를 얻는다. “군중은 밀집상태를 사랑한다.” 그 어느 것도 군중의 틈새로 끼어들어 이들을 갈라놓을 수 없다. “군중은 하나의 방향을 필요로 한다.” 모두에게 공통적인 이 목표는 개개인의 사적인 목표들을 지워버린다.

    어쩌면 고전적인 군중의 시대는 끝났는지도 모른다. 나치즘의 대중운동, 스탈린주의적 집단운동, 마오이즘의 문화혁명은 더 이상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군중이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영원한 모양이다.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현실의 거리를 점령했던 군중은 자신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즉 사이버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간과 공간의 격리를 없애주는 인터넷은 언제 어디서라도 새로운 군중의 형성을 위한 디지털 인프라다. 현실에서라면 개인으로 존재할 이들이 사이버 공간에서는 친구와 적군, 카네티가 말하는 이중군중의 상태로 들어간다. 최근 여야의 정당들이 인터넷 공간의 정치적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인터넷은 늘 “자기편은 더 많이 살아 있는 자들의 군중이고 상대편은 더 많은 시체더미이기를 바라는 전쟁 상태”가 되었다.

    심리적 공황

    황우석 사건은 사이버 공간에서는 오늘날에도 파시즘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터넷의 익명성은 사람들이 고유한 개성과 자율적 인격을 버리고 쉽게 군중이 될 수 있게 해준다. 양극화로 인한 경제적 박탈감, 군대식 위계질서 속의 사회적 억압. 일상적으로 폭력을 당하는 대중은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기를 원한다. 이때 애국심은 공격 본능의 분출을 위한 좋은 껍데기가 되어준다.

    “공황이란 군중 속에서의 군중의 와해다.”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도 결과는 알 수 없지만, 황 박사에게 불리한 증거가 속속 드러나면서 사회는 또 다른 위험을 예감하고 있다. 만의 하나라도 논문이 허위로 드러난다면? 그때는 아마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참상을 남기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사태는 ‘심리적 공황’이라는 형태로 군중의 내면에 깊은 상처를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심리적 공황에 빠진 군중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다음의 세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눈치 빠른 이들은 “군중으로부터 이탈해서 도피하려고” 할 것이다. 미련이 남은 이들은 공황으로 인한 와해를 피하려고 “공동의 두려움 속에서 기적을 행하도록 공동의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릴 것이다. 그보다 심성이 독한 이들은 “패배를 자인하고 군중의 와해를 체험하느니 차라리 눈을 뜬 채 파멸해”버리는 길을 택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왜 이렇게 무서워졌을까? 이번에 처음으로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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