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6

2005.12.27

풍년 든 북한 … 그래도 배고프다

농사에 올인한 덕 95년 이래 최대 풍작 … 식량 필요량에는 여전히 100만t 이상 부족

  • 곽대중/ 데일리 엔케이 기자 big@dailynk.com

    입력2005-12-21 15: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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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처럼 농촌 동원을 많이 나가본 적도 없다.”

    최근 중국에서 만난 북한 주민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탈북자들은 물론이고 친척 방문 등의 이유로 공식 여권을 갖고 국경을 건넌 사람들, 장사꾼들까지 이렇게 이야기한다.

    북한은 원래 육체노동을 통한 사상 개조와 ‘전 인민의 일심단결’을 이유로 농번기에 도시 주민들을 농촌에 집단 동원시키거나, 고위 간부들을 정기적으로 노동현장에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는 사상 어느 때보다 농촌 동원을 다그친 것으로 보인다.

    6월9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인터넷판 기사를 통해 “생산 단위인 공장, 기업소들을 내놓고는(제외하고는) 평양의 모든 사무기관에서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라고 평양의 분위기를 전했다. 사람들이 모두 농촌 동원을 떠나 ‘혁명의 수도’인 평양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친북 매체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정도이니 북한이 올해 농업 문제에 얼마나 사활을 걸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올해 신년 공동사설에서 농업을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주공(主攻)전선’”이라고 표현했다. 먹는 문제를 일차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지나칠 정도로 농업 문제를 강조했다.



    노동신문이 ‘쌀은 곧 사회주의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는가 하면(6월5일), 조선중앙방송은 “현 시기 농업전선은 반미 대결전, 사회주의 수호전의 가장 첨예한 전선의 하나”라고(6월8일) 주장했다. 모내기를 앞두고는 ‘전민 총집결 총동원령’을 내려 무직자는 물론이고 생산시설이 가동되지 않는 공장의 근로자들을 ‘쓸어 모으다시피’ 농촌으로 데리고 가 한 달 동안 간단한 숙식만 제공하고 ‘모내기 전투’를 벌였다고 북한 주민들은 전한다.

    추수기에는 아예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당면한 가을걷이 전투를 와닥닥 불이 번쩍나게 끝내자”(9월23일)고 촉구하면서 모내기 때와 같은 동원령을 내렸다. 탈북자들의 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이 입수해 공개한 북한의 근로청년 대상 교육문건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올해 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올 한 해 사상교육의 주된 내용은 농업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한다.

    모내기 때 공장 근로자들까지 총동원

    그런 덕분인지 올해 북한은 대풍(大豊)을 맞았다. 어느 정도의 풍년인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주민들의 육안에 의한 평가로도 “최근 10년간 이렇게 풍년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북한 관료들도 남북 간 회담이나 국제회의 자리에서 풍년을 자랑하고 있다.

    1995년 이후 북한은 세계식량계획(WFP)과 추곡평가조사를 실시해 지금까지는 WFP를 통해 북한의 대체적인 수확량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올해 북한은 이 조사를 거부했다. 올해 북한은 WFP의 식량지원 방식의 대북지원을 거부하고 내년부터는 개발지원, 즉 경제개발 인프라를 구축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추곡평가조사를 거부한 것은 이러한 조치의 연장으로 보인다.

    풍년 든 북한 … 그래도 배고프다

    올해 한국은 35만t의 비료를 지원해 북한의 풍년을 도왔다.

    따라서 올해 북한의 곡물 수확량은 그동안 국제기구 요원들이 북한 내부에서 눈으로 보아왔던 작물재배 상황, 추수기의 인공위성 사진, 강우량이나 자연재해 상황, 농업 분야의 인력투입 상황 등을 종합해 추측해볼 수밖에 없는데, WFP는 1995년 이래 최대인 390만t 규모로 파악했다. 지난해 WFP의 평가조사 결과는 350만t이었다.

    10월 국가정보원의 한 대북정보 파트에서는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장사꾼에게 수확기에 이른 벼를 몇 포기 뜯어오도록 해 낟알의 숫자를 세어보는 가장 초보적이면서도 실증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상당한 풍작인 것은 확실하다”고 보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이 올해 이렇게 풍작을 거둔 데에는 몇 가지 ‘비결’이 있다.

    일단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연중 농업에 ‘올인’한 것이다. 올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현지시찰은 여전히 군부대에 편중되어 있었지만, 농번기에는 농업현장을 시찰했다는 보도를 더욱 많이 편성해 ‘최고지도자가 농업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전쟁이나 군사용어를 빌려 사안의 긴박성을 강조하곤 하는 북한에서 농업 문제를 ‘주공전선’이라 이름 짓고 이를 되풀이해 강조함으로써 선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태풍이나 홍수, 가뭄, 냉해와 같은 특별한 자연재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농작물의 재배방식도 약간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북한은 고 김일성 주석이 고안했다는 ‘주체농법’을 절대적 원칙으로 여겨왔는데, 이 농법은 작물을 조밀하게 심는 밀식(密植)재배 방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농법은 북한의 자연환경에 맞지 않을 뿐더러 토양을 산성화한, 북한 농업 낙후화의 주된 원인이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북한의 농업 전문가라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영원한 수령’의 유훈(遺訓)이라 누가 감히 ‘바꾸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12월9일) ‘조선신보’에는 눈에 띄는 기사 하나가 실렸다. 평양시의 대표적인 국영농장의 기술책임자가 “높은 소출과 안전성이 증명돼가고 있는 소식(疎植)재배의 도입 비율을 13% 선에서 50%로 높일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남측의 비료·농기구 지원도 식량증산에 한몫

    그의 말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올해부터 주체농법을 벗어난 농법을 실시해왔다는 말이다. 이것이 올해 수확량 증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한편 올해 우리 정부에서 지원한 35만t의 비료와 민간단체에서 꾸준히 지원해온 농기구도 식량 증산에 큰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남북 관계는 지난해 7월 탈북자 468명이 집단 입국한 이후 장기간 냉각상태에 있었는데, 올해 5월 북한은 조건 없이 차관급 회담을 제의하고 나섰다.

    이유는 첫째도, 둘째도 역시 ‘식량’ 때문이다. 신년 공동사설에서 농업을 ‘주공전선’이라고 한 만큼 체념과 염치를 모두 제쳐두고라도 일단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북한은 식량차관 40만t과 비료 35만t을 얻어갔다.

    그런데 북한은 왜 올해 유독 농업 문제, 즉 먹는 문제를 강조했을까.

    일단은 주민들의 여론을 다독이려는 의도와 대외선전 의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이후 10여년간 만성적인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다. 주민들의 최대 관심사는 오로지 먹는 문제인데, 북한 정권은 지금껏 선군(先軍)정치, 강성(强盛) 대국과 같은 정치적 구호를 앞세우면서 핵개발, 미사일 개발 같은 것을 성과와 치적으로 내세웠다. 이는 내부적인 불만 요소도 되었지만 외부적으로도 “주민은 굶주리게 하면서 군사력 확장에만 혈안이 된 무능한 정권”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올해 조선노동당 창건 60주년(10월10일)을 맞아 조금이라도 배가 부른 상태에서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도록 만들고, 엉망이 된 사회질서를 정상화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북한 당국은 10월, ‘배급제를 다시 실시한다’고 내부적인 지시를 하달하기도 했다.

    이러한 ‘농업 올인’ 전술과 ‘10년 만의 풍년’이 결과적으로 주민들의 배를 부르게 했을까. 답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북한의 식량 필요량은 기관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510만~650만t으로 추정된다. 올해 북한의 곡물 생산량은 390만~420만t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부족량은 최소 90만~최대 260만t이다.

    올해 북한은 51만t을 외국에서 수입했고, 한국으로부터 40만t을 지원받았으며, 국제기구에서도 35만t을 지원받았다. 따라서 총 126만t의 부족분을 채웠으나, 북한의 ‘최소 식량부족분’이란 그야말로 ‘굶어 죽지 않을 정도’를 말한다. 노동생산을 활성화할 수 있을 만한 정상 소요량에는 여전히 100만t 이상 부족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 시각이다.

    대풍을 거두었다고 자랑하고 있으나 여전히 주민들은 배가 고프고, 정권은 상황을 오판해 배급제로 회귀, 지난날의 영광(?)을 재현해보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 오늘의 북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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