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8

2005.11.01

뚝심과 자존감의 ‘민족학교’

야인 기질·동문 결속력 강해 … 94년 삼성 인수 후 ‘글로벌 명문’ 성장 위해 박차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5-10-26 14: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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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뚝심과 자존감의 ‘민족학교’

    1930년대 중동학원의 조회 모습. 현재 중동고등학교 전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열린 동문들의 백두대간 100개 봉우리 등반대회(왼쪽부터 시계 방향).

    1906년 세 명의 교사가 서울 종로의 전의감(왕실의 의료기관) 방 한 칸을 빌려 야학으로 시작한 중동학원 100년의 역사는 한 사학의 이야기를 넘어서 한국 현대사 100년의 파란만장한 연대기와 겹쳐진다.

    중동의 역사가 곧 우리나라에서 울분과 분노, 그리고 희망을 품으며 살았던 야심만만한 청춘들의 성장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저히 그럴 법하진 않지만, 이제 30대 후반인 엘리트 공무원과 판사, 지성이 빛나는 교수 정도가 모여도 저녁을 잘 먹고 헤어질 땐 길에서 ‘곤조가’를 부르고야 만다. 그들이 중동인이다.

    설립 당시부터 중동은 황실이나 서양 선교사 또는 지역 유지들에 의해 설립된 다른 사립학교들과 달랐다. 을사조약 이후 ‘우리도 배워야 한다’는 각성을 가진 순수 민간인 교사들에 의해 설립됐고, 입학과 퇴학이 자유로워서 뒤늦게 배움의 열의를 가진 사람들이나 배일감정 때문에 다른 학교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3·1운동 후 중동 학생 수가 1000명이 넘어 3부제로 운영됐다고 하니 ‘민족학교’로서 중동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야인 기질과 자존감은 1926년의 6·10 만세사건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의 적극적 참여로 이어진다. 당시 전교생이 시위에 참여해 종로경찰서에만 200여명의 중동 학생들이 검거됐다. 일제는 머리가 굵은 학생들로 골치 아픈 중동을 ‘건달’ 학교로 낙인 찍었다.



    촌지·편애·불신 없는 ‘3무 학교’로도 유명

    밖에서 탄압받는 만큼 안에서 중동인들의 결속력은 더 강해졌다. 그래서 몇 차례 닥쳤던 중동학원 재단의 위기 때마다 동문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1992년 결국 재단이 부도 나는 최악의 사태에 동문들은 ‘모교정상화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현재 중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장인 김무성 의원(한나라당)과 9대 중동총동문회 회장을 지낸 안동선 전 의원이 삼성이 중동을 인수하도록 이건희 삼성 회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전 회장이 중동 동문인 데다 1970년대에 중동과 합쳐진 수송학원을 사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삼성은 중동학원을 인수, 400억원을 투자해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명문 사학’으로 발전시키기로 결정한다.

    뚝심과 자존감의 ‘민족학교’

    11박12일 동안 미국에서 진행되는 삼성글로벌리더 스칼라십 연수(왼쪽).1940년대 중동 학생들이 금강산 수학여행에서 찍은 사진.

    “1994년 6월 삼성이 중동을 인수해 삼성 간부와 중동 교사 등 6인이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했는데, 어느 날 이건희 회장이 직접 ‘우리나라에서 뭐 하고 있느냐, 당장 외국에 나가 선진 학교를 보고 오라’는 특명을 내렸어요. 바로 짐을 싸서 9월14일부터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을 돌았죠. 그래서 부시 대통령 부자가 나온 미국 필립스 아카데미와 일본 미쓰이 상사의 도인다쿠엔 학교가 벤치마킹됐습니다. 필립스 아카데미가 중시하는 사회지도층의 봉사정신은 중동고를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교육계 전반에 확산되었지요.”(윤태익·중동총동문회 부회장·전 중동고 교감)



    중동은 삼성이란 대기업 재단이 운영하나, 외국 명문학교의 경쟁력을 교훈 삼은 덕에 자유로운 분위기를 자랑한다. 논술교육 칼럼니스트인 안광복 철학 교사는 “교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학교”라고 말한다. 또한 삼성 인수 이후 ‘깨끗한’ 운영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현재 중동은 촌지와 편애, 불신 없는 ‘3무 학교’로 유명하다. 중동인의 전통과 기질은 사회 각계에 진출한 6만 졸업생 개개인에게서도 드러난다. 남과 다르면 비난받기 쉬운 사회에서 뚝심 있게 자기 목소리를 낸 인사들 중 중동 출신이 적지 않다. 고 이희승 서울대 교수, 고 양주동 동국대 교수 등 독보적 지위의 어문학자들과 초대 동문회장을 지낸 고 김광섭 시인, 서예가 일중 김충현, ‘오적’의 김지하 시인, 소설가 안정효,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송월주 스님 등 학술과 예술 분야에서도 중동인들의 개성은 잘 드러난다. 한류의 주역인 ‘겨울연가’의 윤석호 PD, 배우 이병헌은 신세대 중동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문화계 선배들이다.

    중동이 워낙 남성적이고 조직적이다 보니 다른 100년 사학에 비해 정·관계 인사들이 많다는 것도 특징이다. 17대 의원으로 열린우리당의 염동연·원혜영·정장선·양승조·우제창 의원과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 등이 있다.

    김무성 의원은 “68 부정선거 때 중앙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당시 방성희 교장선생님께서 우리를 격려해주었다. 그 말씀을 결코 잊지 못했다”고 말한다.

    에베레스트 등반·동문회관 건립 등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 ‘착착’

    누구든 중동 몇 회라고 말하면 바로 형님 동생이 되고, 남편이 중동 동문이라 하면 무작정 ‘시집 잘 갔다’고 말하는 게 중동인들이라 중동인과 결혼한 김선미·김영주 의원(이상 열린우리당)과 이혜훈 한나라당 의원도 2005년 중동 명예동문이 됐다. 특히 고 심규섭(70회) 전 의원과 결혼한 뒤 사망한 남편의 지역구를 이어받아 정계에 입문한 김선미 의원은 “선거운동 당시 가장 열성적으로 지원을 해준 사람들이 남편의 중동 동문들이었다”고 말한다.



    ‘합법적으로 일본을 이길 방도’로 1922년 창단한 중동축구단은 지금까지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다. 특히 1974년 축구부는 전국대회 5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는데, 그즈음 명문대학의 진학률이 높고 연극부와 문예부까지 각종 대회를 휩쓸어 중동은 명문 사학으로 황금기를 맞는다.

    또 1988년 히말라야 추렌히말(7317m)를 오른 중동산악회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이 동문(57회)이다.

    “중동 학생들은 인왕산을 맨발로 뛰어다녔어요. 그때 홍성기 감독이 촬영을 왔는데 남석훈이란 배우가 산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찍으며 하도 벌벌 떨어 내가 스턴트맨으로 데뷔를 했답니다.”

    이 회장은 2006년 3월로 예정된 중동 100주년 기념 에베레스트 등반대 단장을 맡았다. 올해 9월25일 백두대간 100개 봉우리에 전국의 중동 동문이 동시에 오르는 대규모 등반대회로 100주년 기념사업을 시작한 중동 동문들은 동문회관과 기념탑 건립, 음악회와 연극제 등을 주요 기념사업으로 추진한다.

    “예전의 의리와 의협심을 그리워하는 중동인들이 많지만, 과거가 늘 좋았던 건 아니다”라고 한 원로 동문은 회상했지만, 중동 100년사에는 ‘중동판 말죽거리 잔혹사’라 부를 만한 역사가 존재하고 그것은 중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다른 학교 남학생과 빵집 가는 것조차 참을 수 없던 숙명여고에 대한 짝사랑,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때 축구장에서 선생님 심정 아랑곳하지 않고 라디오 생방송으로 흘러나가던 곤조가, 1등 아니면 차라리 ‘죽었던’ 축구부와 연극부, 학생과 교사들 모두를 불행하게 한 재단의 위기와 극복의 과정, 그리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학원 비화’ 등등.

    이 같은 시련 속에서 과시된 중동인들의 단결력이 1000년의 역사를 시작하는 중동의 후배들에게 진정한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닐까.

    다시 돌아보자. 1906년 ‘민족학교’ 중동의 문을 열게 했던 학생들의 열정, 그리고 100년을 이어온 선후배들의 사랑이야말로 글로벌 경쟁시대 세계 명문으로 도약하는 중동의 프런티어들이 갖춰야 할 제일 덕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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