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8

2005.08.16

‘성기노출’이 어찌 ‘행위예술’인가

  •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입력2005-08-11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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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방송 도중 갑자기 바지를 벗은 한 인디밴드 공연 출연자에게 그 이유를 묻자 ‘행위예술’이라 말했다 한다. 언뜻 행위예술 하면 행동으로 표현하는 모든 것이라 이해하기 쉽지만, 그건 아니다.

    영어로 퍼포먼스라 번역되는 행위예술은 본래 미술 상업주의에 반기를 든 저항정신에서 태동했다. 작가의 영혼과 정신을 담은 미술품이 점차 거래의 수단으로 전락하자 일부 예술가들은 아예 몸을 캔버스로 삼아 자신의 상상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몸을 그림처럼 사고팔 수는 없기 때문이다. 행위예술은 출발 자체가 이처럼 저항적, 전위적, 비주류적, 아웃사이더적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강렬하고 충격적이다. 그들은 때로 옷을 벗고 몸에 색칠을 하고 쇠사슬로 구속하고 면도날로 상처를 내는 행동으로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참히 부숴버린다. 그런 ‘행위’를 통해 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자유일 수도 있고 공포일 수도 있으며 두려움일 수도 있고 평화일 수도 있다.

    오노 요코와 존 레넌은 신혼여행 첫날밤 침대 위에서 나체로 사이좋게 앉아 있는 모습을 언론에 공개하는 퍼포먼스로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했고, 프랑스의 여성 행위예술가 오를랑은 명작 속 미인들의 이미지를 택해 자기 얼굴과 신체를 뜯어고치는 성형수술 행위로 현대인들의 미인 숭배 광기에 경종을 울렸다.

    행위예술가들의 파격적인 행동은 관람객들에게 ‘생각’의 충격을 던진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을 의심하고 되묻게 한다. 한마디로 행위예술의 필수조건은 ‘메시지’다. ‘그 행위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행위예술은 대부분 자유와 억압의 문제를 다룬다.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지만, 정신을 억압하는 구속이기도 하다. 따라서 내 몸을 내 맘대로 한다는 자유의지에서 출발한 행위예술은 본질적으로 ‘자유’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 이 ‘자유’는 다름 아닌, 선(禪) 철학의 핵심이다. 선수행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生)과 사(死)조차 뛰어넘는 대자유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집착이 고통을 낳는다고 가르치는 ‘선’에서는 모든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선에서 말하는 자유는 무조건 내 맘대로의 자유가 아니다. 고통과 집착, 생과 사의 자유로운 경지에서는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된다. 하지만 불가에서는 이것은 낮은 수준의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자유, 참자유는 ‘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나의 행동과 생각이 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이 바로 진정한 깨달음이며 그 경지가 바로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자각이다.

    바지를 벗고 성기를 보여주는 행위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다만 진정한 자유에 대한 성찰과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감동을 주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내가 좋아 벗었다. 기분 나빴다면 용서하라”는 말과 행위예술을 들이대며 뒤로 숨어버린 젊은이의 태도는 ‘나’만 있고 ‘남’은 없는 요즘 세태를 대변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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