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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창|‘고래사냥’

신비는 간 곳 없고 ‘바다의 로또’ 국제戰

  • 이명재/ 자유기고가 minho1627@kornet.net

신비는 간 곳 없고 ‘바다의 로또’ 국제戰

‘1000만명 관객’ 시대에 수백만 명 정도의 관객 동원은 이제 예삿일처럼 됐지만 1980년대까지는 10만명만 넘겨도 괜찮은 성적으로 여겨졌다. 80년대 최고 흥행작 중 하나에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이 있다. 84년에 개봉된 이 영화의 관객 동원 기록을 찾아보니 42만명이라고 나와 있다. 관객 집계가 정확하지 않고 게다가 지방 관객은 제대로 집계되지 않던 시절이라 숫자는 더 많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얘기하려는 건 관객 수가 아니다.

바로 ‘고래사냥’이란 제목에 대한 것이다. 소심한 남자 주인공이 일상에서 탈출해 떠돌아다니는 줄거리의 이 영화 어느 장면에도 고래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주인공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나는 동해바다에 고래 잡으러 갈 테야”라는 말 속에 언급될 뿐이다. 건장한 작살잡이도 아닌 나약한 대학생의 이 말이 진짜로 고래를 잡겠다는 뜻이 아닌 건 분명해 보인다.

그럼 무슨 의미냐? 그렇게 해서 영화의 인기만큼이나 이 ‘고래’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흔히 말하는 포경수술의 은유는 아닌 것 같고…. 대체로 많은 표를 얻은 것은 순수한 이상향이라는 해석이었다. 좀더 용감한 이들은 독재 타도를 상징한다고도 했다. 사회참여파 작가도 아닌 최인호의 원작 소설에 그런 의도가 들어 있진 않았을 터인데, 아무튼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상상력과 해석은 날개를 달았다. 영화의 제목을 따온 송창식의 노래가 유신정권에 의해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던 상황이 더욱 이런 상상력을 부채질했다.

아마도 당시의 관객들, 특히 젊은이들은 일부러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84년이면 말 한마디 마음 놓고 하기도 조심스러웠던 숨막히던 시대, 그렇게라도 숨쉴 구멍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이렇게 ‘다양한’ 해석을 감독이 의도했다면 그 의도는 충분히 성공한 듯하다. 그리고 그런 의도를 살리는 데는 고래의 이미지가 딱 맞아떨어지는 ‘배역’이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 바다에 사는 포유류. 태고의 기원을 간직한 듯한 이 동물만큼 실재하는 생물 중에서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게 또 있을까.

고래는 수많은 문학서에서도 경외감을 자아내는 대상으로 묘사됐다. ‘요나를 삼켜버린 큰 물고기’(성경, 요나서)이고 ‘신의 창조물 가운데서 가장 크며, 대양을 떠다니는 리바이어던’(밀턴, 실락원)이며 힘이 곧 정의인 그곳, 드넓은 ‘바다의 왕’(전승 고래 노래)이 바로 고래였다.

이 신비로움은 또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동물의 제왕이기에 고래는 왜소한 인간 앞에 버티고 선 가혹한 자연을 상징했다. 멜빌의 ‘백경’에서 한 인간을 필생의 증오에 사로잡히게 하는 적이 거대한 고래가 아니었던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백경’의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처럼 선사시대 이래 인간은 고래를 포획함으로써 고래를 잡은 것이 아니라 자연을 정복했다는 쾌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세기 전만 해도 대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고래가 멸종 위기에 처할 만큼 급감한 것은 그 같은 정복의 유혹보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고래는 그 기름과 고기, 뼈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어 그야말로 ‘일확’하면 ‘천금’을 얻는 고수익 상품이다. 예컨대 에이허브 선장의 다리를 앗아간 흰 고래의 종은 향고래인데, 한 마리당 평균 1만ℓ의 기름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포경선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는 바람에 19세기 초만 해도 약 150만 마리였던 숫자가 지금은 수천 마리도 안 된다고 한다. 이건 다른 종들도 마찬가지여서 86년에 세계적으로 고래잡이를 금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연근해에서 고래를 잡았다는 뉴스가 요즘 심심찮게 들린다. 고래잡이가 금지돼 있으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우연히 그물에 걸린 이른바 ‘혼획(混獲)’이다. 이 혼획이 최근 들어 유난히도 잦아지는 걸 보면 오래 보호를 받는 동안 고래 수가 늘긴 늘었나 보다.

그래서 이 참에 아예 포경을 재개하자는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래 도시랄 수 있는 울산에서는 5월에 ‘국제포경위원회 총회’라는 행사가 열리는데 이 회의에서 ‘상업포경 재개 여부’가 핵심 의제로 다뤄진다고 한다.

특히 근해에 고래가 많아 해제 운동을 주도하는 일본의 로비도 치열하다. 포경 금지령에 대한 미국 등 낙농업자들의 계략이었다는 음모설까지 제기되고 있다. ‘대양의 왕’이라기보다는 ‘바다의 노다지’를 둘러싼 국제전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주간동아 2005.05.03 483호 (p91~91)

이명재/ 자유기고가 minho1627@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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