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영화의 창ㅣ달라진 인디언 이미지

호전적인 악당 ‘옛말’ … 최초의 생태주의자 ‘찬사’

  • 이명재/ 자유기고가 minho1627@kornet.net

호전적인 악당 ‘옛말’ … 최초의 생태주의자 ‘찬사’

호전적인 악당 ‘옛말’ … 최초의 생태주의자 ‘찬사’
‘미타쿠예 오야신’.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또는 ‘모두가 나의 친척이다’라는 뜻으로 아메리카 인디언인 다코타족의 인사말이다. 이 말이 이제 아주 생소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몇 년 전부터 일고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한 열풍 덕분이다. 일종의 유행처럼, 또는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삶과 문화가 주목받으면서 이 말은 일종의 경구처럼 받들어지고 있다.

인디언 열풍을 타고 인디언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고착시켜온 이미지도 바뀌고 있다. 평균적인 한국의 중년이라면 인디언들에 대한 기억은 호전적이고 잔인한 악당들이다. 서부로 가는 백인들의 역마차를 습격하고, 사람의 피부를 벗기는 야만인들. 백인들이 만들어낸 서부 영화 속 인디언들은 늘 그런 모습이었다.

아마도 상당수 한국인들이 영화를 통해 인디언에 대해 그와 다른 인상을 받았다면 그건 ‘늑대와 춤을’(사진)이라는 작품에서였을 것이다. 백인이면서도 인디언화된 시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영화 속에서 전통적인 선악의 위치는 뒤바뀌었다. 할리우드 주류 영화에서 이런 친인디언적인 시각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오랫동안 악당 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인디언들은 그러나 이제 불명예 회복을 넘어서 찬사와 숭배 대상으로까지 떠오르고 있다. 국내뿐만 아니라 서구를 중심으로 일고 있는 최근 몇 년간의 인디언 열풍, 그 핵심에는 이들이야말로 ‘최초의 생태주의자’라는,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재발견이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인디언 추장 하면 떠올랐던 제로니모의 자리를 시애틀 추장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대체하고 있다는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미국 시애틀 시 이름의 어원이 된 시애틀 추장은 생태주의의 전도사와도 같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떻게 공기를 사고판단 말인가”라는 그의 연설은 생태주의의 경전과도 같다. 1850년대 백인들의 인디언 학살이 끝나가는 시점에 미국 정부가 땅을 넘길 것을 강요하며 조약에 서명을 요구하자 이렇게 말했다는(설이 있는) 연설이다.

“하지만 어떻게 땅과 하늘을 사고팔 수 있나? 이 생각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신선한 공기와 물방울이 우리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을 사가겠다는 건가 …강은 우리의 형제다. 우리의 갈증을 달래주고 우리의 카누를 옮겨주고 우리 아이들을 키운다. 그러니 당신들은 형제를 대하듯 강을 친절히 대해야 한다.”

최근 시애틀 추장의 연설이 복음처럼 받들여지고 있는 데는 서구 문명의 자기반성과 각성이라는, 정신사적 전환이 놓여 있다.

자연재난을 그리고 있는 최근의 이른바 ‘환경영화’들은 이를테면 그 반성문인 셈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아 해류의 흐름을 바꾸면서 결국 지구가 빙하로 뒤덮인다는 영화 ‘투모로우’. 환경영화로 봐야 할지, 자연재해가 빚어내는 스펙터클물로 봐야 할지 혼돈스럽긴 하다. 그러나 ‘타워링’이나 ‘포세이돈 어드벤처’ 같은 옛날 영화들이 화재나 난파 같은 대형 재난을 다뤘다면, 이 영화는 자연재해라는 점에서 환경주의의 흐름을 담아내고 있다.

환경이 21세기의 핵심 화두가 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미 자연의 복수는 시작됐다. 그런데 그 복수가 불합리해 보이는 까닭은 복수의 칼날이 가해자가 아닌 열등생을 향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동남아를 휩쓴 지진해일은 자연재해도 ‘남북 문제’를 비켜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지진이 남반구의 빈국과 북반국의 부국을 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같은 재난을 당했을 때 어떤 피해를 보느냐다.

분명 엄청난 규모의 지진해일이었지만 사상자가 수십만명이나 나왔던 것은 천재와 인재(人災)가 겹쳤기 때문이다. 해안가에 호텔과 리조트를 짓느라 울창한 숲과 산호초를 없앤 것이 천혜의 방파제를 앗아갔다. 산호초를 잘 보전한 몰디브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자신들이 원인을 제공한 환경 재앙에 대비하는 서구 선진국들, ‘환경 비용’을 감당하기 벅찬 가난한 나라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있기에’ 서구 나라들에서 줄 잇고 있다는 성금의 물결은 자선이 아닌 최소한의 ‘수익자 부담금’이다.



주간동아 2005.01.25 470호 (p85~85)

이명재/ 자유기고가 minho1627@kornet.net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218

제 1218호

2019.12.13

“긴 터널 빠져나오자 우울의 고장”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