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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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을 교장으로 모십니다”

일본 소학교들의 신선한 실험 … 새로운 발상으로 교육현장 자극 ‘긍정적 변화 바람’

  • 조헌주/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hanscho@donga.com

    입력2004-11-26 18: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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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인을 교장으로 모십니다”

    고탄노소학교의 학부모 참관 수업 풍경.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동서고금을 따질 것도 없이 자식 둔 부모의 한결같은 걱정거리다. 공교육 체제 아래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한 이 고민은 어떤 학교에, 어떤 교사에게 우리 아이를 맡길 것이냐는 문제가 된다.

    요즘 일본에서는 다양한 사회 경험을 쌓은 민간인을 교장으로 영입하는 소학교(초등학교)가 늘고 있다. 시대 변화에 어울리는 새로운 발상을 하는 외부인사를 통해 교육현장에 자극을 주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10월1일 현재 일본 문부과학성 집계를 보면 도쿄 오사카 홋카이도 등 28개 도도부현의 총 79개 초등학교에서 교장이 민간인 출신이다.

    교직원회의 없애고 전달사항은 게시판으로

    수도인 도쿄 아다치(足立)구의 구립 ‘고탄노(五反野)소학교’도 올해 4월 새 학기부터 공모를 통해 뽑은 민간인 교장에게 학교 운영을 맡겼다. 변화 바람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디즈니 그림이 그려진 넥타이를 맨 미하라 도루(三原徹·55) 교장은 날마다 아침 8시경이면 교문 앞에서 ‘손님’ 맞을 채비를 한다.

    “짝, 짝.”



    그는 교문에 들어서는 학생들과 일일이 손바닥을 마주치는 ‘하이파이브’로 등교를 환영한다.

    “선생님, 오늘은 뭐예요?” 하며 발길을 멈추는 아이들도 있다. 넥타이에 뭐가 그려져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이다. 오늘은 구피, 내일은 미키 마우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수십 종류의 넥타이를 골라서 맨다. 오늘은 교장 선생님이 무슨 캐릭터가 그려진 넥타이를 매고 있을지 내기를 하며 등교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미하라 교장은 영어학원, 통신교재, 참고서 출판, 교육용 소프트웨어 등 교육관련 전문 그룹인 ‘베네세’ 직원 출신이다.

    “저는 아이들을 소중한 손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이들을 윽박지르고, 야단치고, 꾸중하고, 끌고 나아가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교무실 풍경도 크게 달라졌다. 아침마다 관행적으로 열리던 교직원회의. 회사원 출신인 그의 눈에는 이상한 풍경이었다. 사무적인 연락사항 몇 가지를 전하기 위해 교사들이 모두 모여야 하는 회의가 꼭 필요할까. 미하라 교장은 교직원회의를 없앴다. 학교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 연락사항을 띄워놓는 것으로 대체했다.

    노트북이 없는 교사가 많아 교사 전원에게 노트북을 지급하도록 교육위원회에 특별 요청했다. 교육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경험이 있는 그에게 이 정도는 별 고민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교육계의 관행에 익숙한 교사들에게는 천지개벽 같은 일이었다.

    “민간인을 교장으로 모십니다”

    고탄노소학교 전경(왼쪽)과 올 봄 고탄노소학교의 수업을 참관하고 있는 의원들(오른쪽).

    이후 교사들은 PC를 활용해 통지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현재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라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통지표에 몇 줄 적힌 천편일률적인 내용으로 자녀를 평가하는 것을 보고 실소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탄노소학교 교사들은 여백이 많은 PC상의 통지표에 수시로 아이들에 대해 메모해두었다가 학기말에 종합할 수 있게 됐다.

    사실 교육관련 기업 출신이 교장으로 부임한 것은 교육의 전문성을 무시한 처사라며 은근히 적대감을 드러낸 교사도 있었다. 하지만 반년이 지난 현재 교장과의 마찰은 없고, 교장의 새로운 발상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돼가고 있다고 한다.

    미하라 교장이 전교생 443명을 지도하는 교육목표로 내건 것은 인내심 있는 아이, 건강하고 밝은 아이, 약속을 지키는 아이, 친절한 아이 등이다.

    학력 증진을 위해 국어, 산수는 실력 수준에 맞춰 소그룹으로 나눠 지도하고 있다. 매일 아침 정규 수업시작 전 독서시간을 갖도록 했다. 피동적인 습관을 만드는 영상문화에 찌든 아이들에게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위함이다. 또 아이들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약시(弱視)교실 등도 운영하고 있다.

    학교에만 교육을 맡겨두지 않고 학부모회와 지역사회가 학교와 삼위일체가 되어 책임의 일정 부분을 나눠 지려는 자세도 이 같은 학교 변화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미하라 교장은 학력 향상에만 힘을 쏟지 않는다. 그는 ‘학력 향상은 좋은 생활습관의 확립에서 시작된다’는 신념 아래 ‘인사 잘하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학부모회 간부들에게 ‘인사 카드’를 나누어준 다음 길거리에서, 공원에서 인사하는 학생들에게 카드를 전해주도록 했다. 카드를 많이 모은 학생은 따로 표창할 계획이다.

    그러나 민간 출신 교장들이 모두 학교 운영에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감독기관인 교육위원회나 교사들과의 알력, 그리고 변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려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민간인을 교장으로 모십니다”

    도쿄에 있는 한 소학교 학생들의 하교 모습.

    자리 부담에 실패한 경우도 있어

    아다치구 내의 다른 초등학교 교장은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의 의견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네트워크를 갖춘 점, 효율적인 상호의사 전달 능력은 참으로 배울 만하다”고 고탄노소학교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원 출신 학교장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자 미하라 교장의 친정인 ‘베네세’ 그룹에 걱정거리가 생겼다. 베네세가 혹시라도 학교 교장 직위를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을까 하는 동종업계의 조바심이나 의혹의 눈초리는 문제 되지 않는다. 교육산업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다양한 문화활동을 지원, 일본 교육산업계의 ‘얼굴’로 통하는 베네세로서 불과 몇 푼의 돈을 위해 여타 학교와 고탄노소학교를 달리 대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베네세의 걱정은 실력이 출중한 사원들이 이러다 죄다 학교로 가버리는 게 아니냐는 것.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이 사내에 오가고 있다.

    도쿄도 내 연구시범학교 9개 가운데 하나인 고탄노소학교의 실험이 일본 교육계의 근본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지만, 일본 교육계의 신선한 시도는 한국 교육계에도 참고가 될 것이다. 특히 허울뿐인 교육자치와 아직도 획일적인 교원 채용 방법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과 교단에 설 만큼 풍부한 경험을 갖춘 민간인들이라면 일정한 심사절차와 훈련기간을 거쳐 교육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교원 채용 방법을 다양화해야 한다. 동료교사가 보아도 한심한 이들이 교육계에 진입해 학생을 ‘손님’ 아닌 ‘머슴’으로 다뤄온 것은 폐쇄적인 교사 인력 채용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한 가지, 고탄노소학교의 변혁은 민간인 출신 교장의 영입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하겠다는 학부모와 지역사회의 의지가 변혁의 큰 힘이 됐다. 시험 성적표에만 매달리는 부모는 이미 교육의 절반 이상을 포기해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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