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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 더 이상 이공계를 중시 말라”

KAIST 로버트 러플린 총장 … “학생에게 교수 선택권 주고 한국적 관계를 뒤엎어야”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한국, 더 이상 이공계를 중시 말라”

“한국, 더 이상 이공계를 중시 말라”

시골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의 러플린 KAIST 총장은 한국 과학계를 \'시장주의\'충격에 빠뜨렸다.

지난 여름, 우리는 또 한 명의 ‘히딩크’를 한국에 받아들였다. 7월14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으로 취임한 로버트 러플린(54)이 그 주인공이다. 노벨 물리학상(1998년) 수상자이자 세계적 명문인 스탠퍼드 대학 교수였던 그의 갑작스러운 ‘한국행’은 침체에 빠져 있는 ‘한국 과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인재를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왜 한국으로 오는가’라는 의혹 어린 눈초리 또한 적지 않았다. 과학 인재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설립된 KAIST의 당초 취지를 아는 이들은 외국인 총장 영입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의혁신을 이끌 새로운 경영자를 찾던 KAIST는 러플린을 반갑게 맞이했고, 이후 한국 과학계는 ‘러플린 충격’에 빠져 있다. 그는 각종 기고문과 강연을 통해 “한국은 더 이상 이공계를 중시하지 말라” “한국의 성장은 민족적 우수성이 아닌 값싼 고급 인력에서 기인했다” “이공계는 오히려 사업가 정신이 중요하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펼침으로써 상아탑에 매몰돼 있던 한국 과학계에 ‘시장경제’란 충격파를 던졌다.

새하얀 머리에 건장한 체격, 친절하고 겸손한 태도까지 첫인상이 패스트푸드 업체 KFC의 안경 쓴 할아버지를 닮은 러플린 총장에게서 한국 과학계의 위기탈출 전략과 과학 분야의 ‘시장경제론’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정부와 기업들에 학문 팔아야 할 상황

-한국에서의 생활과 일과가 궁금하다.



“성실한 학생이 된 기분으로 바쁘게 생활한다. 아침 4시에 일어나 오전에 행정 업무를 마무리하고, 오후에는 각종 강연과 면담을 한다. 휴일에는 피아노를 치거나 자전거를 타고 인근 갑천을 달린다. 대전은 대단히 아름다운 도시다.”

-의사 소통에는 별 문제 없는가.

“전혀 문제 없다. KAIST 교수들과 학생들 수준은 대단히 훌륭하다. 누구나 영어에 능통하기를 바라지만 나 역시 한국 말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역지사지로 그들이 쓰는 영어를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신임 총장에게서 ‘한국인도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격려를 기대했는데 ‘시장경제’를 강조해 좀 의아해했다. 과학자의 고정관념에 대한 편견을 깬 셈인데, 어떤 방식으로 ‘경제’나 ‘경영’에 대한 관점을 세웠는지 궁금하다.

“(웃음). 경영이라는 것은 아이들의 학습 과정과 유사하다. 처음에는 지식은커녕 모호함 속에서 오로지 경험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현대 과학자들은 ‘경영자’에 가깝다고 본다. 과학자들은 정부나 기업들과 실질적인 상행위를 한다. 자신의 학문을 구매자에게 성공적으로 팔아야만 성공하는 시장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실물경제를 익혔다.”

“한국, 더 이상 이공계를 중시 말라”
-과학자들이 정부나 기업과 거래를 했다는 발상이 신선하다.



“어느 정부나 비슷하겠지만 미국에서는 한국보다 훨씬 힘겨운 과정을 겪었다. 학자 스스로 세상에 팔 수 있는 것과 팔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으려면 대단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자신의 학문을 성공적으로 마케팅해야 제자들을 교육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은 과학과 공학 교수들도 사업가적 마인드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좋든 싫든 결국 그것이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과학자들은 ‘보상’에 대한 불만이 많고, 그것이 이공계 기피 현상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내가 7살 때 러시아가 스퓨티니크 위성을 발사해 미국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이에 군사적 압박을 느낀 미국 정부는 그 후 과학 교육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 나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과학자가 됐지만, 1970년대 경제구조가 변하면서 과학 인력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실제로 MIT나 하버드 대학 출신들이 뉴욕에서 택시 운전을 하기도 했다. 이 같은 현상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핵물리학자들의 직장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에서 이공계의 일거리가 줄고 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한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의 실수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닌 세계적인 현상이다. 오히려 한국은 여타 선진국보다 더 나은 조건에 있다.”

역동성 넘치는 한국 과학계 낙관

-그렇다면 이공계 기피 현상을 어떻게 극복해냈나.



“과학 교육의 성과는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창조성’이라는 유발 효과가 있다. 90년대 초 스탠퍼드 대학에 부임했을 당시, 옛 소련의 체계적 교육에 의해 길러진 똑똑한 러시아 학생들이 미국에 몰려왔다. 그들은 물리학보다 금융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즉시 월스트리트로 달려갔다. 그리고 금융계가 침체에 빠지자 다시 실리콘밸리로 가서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지식이었지만 그들은 현장에서 그것을 습득해버렸다. 능력 있는 인재라면 자신이 해낼 수 있는 몫을 찾게 마련이다.”

-아시아의 미래, 특히 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예견하는가.



“세계경제의 중심이 급속하게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난 아시아에 관심이 많았는데, 한국·중국·일본 가운데 특히 한국의 ‘역동성’에 더 후한 점수를 주겠다. 2002년 대통령 선거도 지켜봤지만, 대단히 역동적인 민주사회라는 점에서 잠재력이 더 많아 보였다. 중국은 민주화가 부족하고, 일본은 역동성이 떨어진다. 한국은 역동성과 민주화를 바탕으로 빠르게 과학계를 개혁할 수 있고, 나 역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남아 있는 과학도들은 열등감에 시달리고 결국 해외로 눈길을 돌린다.



“알고 있다. 한국에서 내가 고치고 싶은 문제 중 하나다. 현대인들은 두 개의 정체성을 안고 살아간다. 국내적·국제적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국제적 자아(international self)’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 강하지 않을 때 열등감이 생겨난다. 지금도 한국에는 6·25전쟁에 기인하는 지적, 문화적 열등감이 존재한다. 어떤 국가든 열등감이나 약점은 존재하게 마련이지만 ‘한국’에 그것은 과거의 일일 뿐이다. 나는 한국인들의 열등감은 이해하지만 극복하리라고 본다.”

-한국에 세계 100위권 대학이 없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는 이들과 한국 같은 나라엔 초일류 대학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만일 제3세계 국가를 한 번이라도 가봤더라면 한국은 확실하게 제1세계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세계적인 대학이 필요하고, 그렇게 될 것이다.”

-한국 대학의 문제점을 알고 있나. 예를 들어 교수에 종속된 대학원생들의 처우 개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원칙적으로 명쾌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 학생에게 교수를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주면 된다. 보통 이 같은 선택은 매우 수치스럽기에 학생들은 최악의 상황까지 버틴다. 그래서 내가 구상하는 모델은 그 과정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바꾸는 것이다. 사실 교수와 제자 사이의 ‘한국적인’ 관계는 시장 논리를 완벽하게 거스르는 것이다. 지금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친절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들에게 배척받을 수 있다. 미국의 상황 역시 생각보다 열악하다. 왜냐하면 교수와 학생 관계가 고용주와 노동자 관계이기 때문이다. 교수는 학생에게 임금을 주고 학생은 돈을 위해 일을 도울 뿐이다. 결국 진짜 문제는 과학이 경제에 종속됐다는 점이다. 만일 경제가 잘 돌아가 직업 문제가 해결된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한국의 과학자들은 정ㆍ재계 요직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하곤 한다.



“좋은 지적이다. 일반적인 현상인데, 우선 과학자들의 ‘수사력(word skill)’에 문제가 있다. 대개 과학자들은 자신이 글과 문학보다 수학에 더 자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위직으로 갈수록 언어능력이 절대적 요소가 된다. 이 점이 과학자들을 지도자 위치에서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다. 결국 ‘과학기술 발전’ ‘연구중심 대학’ 따위의 구호가 최선의 교육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어와 마케팅 능력 또한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에 창조성 있는 국제적 교양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이 요구된다.”

-과학고등학교나 KAIST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된다. 그래서인지 과학에 등돌리는 학생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있다.



“의사나 변호사가 되면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누가 말릴 것인가. 국가의 세금이란 산업체나 다음 세대를 위한 재투자에 쓰인다. 지금은 확실하게 과학계보다 사람들을 고용해 회사를 운영하는 CEO에게 그 혜택이 더 돌아가야 한다. 시장의 위치에서 생각한다면, 어떤 가치가 사회에 더욱 많은 효용을 가져다주는지 고려해야 한다. 만일 KAIST 학생들이 과학을 포기하고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면, 그것이 사회의 효용을 더욱 극대화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그 선택을 지원할 생각이다. 경제적 가치를 더하는 길이 노벨상을 타는 것보다 더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KAIST는 어떤 자질을 갖춘 인재들을 기다리는가.



“이 질문은 ‘어떤 아이가 이상적인 아이인가’라는 말과 비슷하다.(웃음) 아주 허무할 수도 있는 답인데, 나는 서로 다른 장점을 갖고 있는 학생들을 좋아한다. 노벨상 수상자로서 여러 기업이나 국가에서 ‘과학인재 육성’에 관한 교육을 해왔는데 답은 항시 똑같았다. 천편일률적인 시험제도는 학생들을 모두 똑같이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창조성’ 같은 귀한 특성은 시험을 치르지 않은 학생들에게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나는 배울 점이 있는, 아이디어 넘치는 학생들을 원한다.”

-수능 같은 현행 제도 이외의 대안이 있는가.

“한마디로 없다. 한국의 대학입시 제도는 매우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갖고 있다. 결국 시험 제도는 한국인이 결정할 문제이지 외국인인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

-‘후기 산업사회’에 걸맞게 한국의 과학교육을 재창조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렇다. 후기 산업사회란 서비스 산업이 우위에 서는 시대를 말한다. 산업 구조가 바뀌고 직업을 택하는 환경이 완벽하게 달라졌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면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전략이 과거와 달라야 한다는 뜻이다. 만일 당신의 아들 딸에게 당신의 잣대로 구상한 직업을 강요한다면 그들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포착할 수 있는 기회를 가로막는 일이기 때문이다. 후기 산업사회에서 아이를 잘 키우는 길은 최대한 ‘유연(flexible)’하게 교육해야 한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아주 상이한 가치가 존재하고 있고,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그 차이를 직시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줘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고 도전할 수 있는 모험정신 또한 필요하다. 말은 쉽지만 ‘도전’이란 대단히 힘들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넘치는 학생 원한다”

-직접 경험한 사례로 끝맺음해달라.

“오랜 기간 한 분야를 공부한 학생은 자신의 전공을 쉽게 포기하기 힘들지만, 대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해낼 능력을 갖게 마련이다.

성적은 우수했지만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학생이 있었다. 그의 잠재력과 끈기가 좋아 계속 데리고 연구를 시켰더니 시간이 지나서야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왜 그의 성과가 부진했는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낮에는 학생이었지만 밤에는 나이트클럽에서 코미디언 일을 하고 있었다. 교수와 부모의 눈을 피해 다른 일을 하며 고생했지만 그는 기술 컨설턴트가 됐고, 금융 분야를 공부해 벤처캐피털 회사에 진출했으며, 이후 바이오 벤처 CEO로 변신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방법으로 성공한 셈이다. 나는 창조적이고 능력 있는 국제인을 키우고 싶을 뿐, 결코 노벨상 수상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주간동아 2004.12.02 462호 (p68~70)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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