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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무척 좋아했다, 아주 특별하게

골든벨 울려 인간승리 지관순양 … “특별한 사람 취급 영 불편, 수능 못 봐 걱정”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책을 무척 좋아했다, 아주 특별하게

책을 무척 좋아했다, 아주 특별하게
150cm 남짓한 키에 이마를 덮는 더벅머리, 웃으면 사라져버리는 두 눈과 씩씩한 목소리를 가진 소녀가 지금 전국을 사로잡고 있다. 11월7일 방송된 고등학생 출연 퀴즈 프로그램 ‘도전! 골든벨’에서 50개 문제를 모두 맞혀 골든벨을 울린 경기 파주시 문산여고 3학년 지관순양(20). 그가 초등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할 만큼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나 혼자 책을 읽으며 실력을 쌓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일약 ‘인간 승리’의 상징이 됐다.

손에 잡히는 것 무엇이든 읽어

하지만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끝난 다음날인 18일, 문산여고 교정에서 만난 지양은 “저는 전혀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며 손사래를 쳤다. 책을 좋아하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사람’이 되어버린 게 영 불편하다는 것이다. 지양이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책을 좋아하는 아이’, 그것이 전부다.

지양은 정말 책을 좋아한다. 골든벨이 방송된 뒤 수능 준비로 한창 바쁠 때 자꾸만 기자들이 찾아오는 걸 거절할 수 없었던 이유도 상당 부분은 책 때문이었다. ‘지금껏 읽었던 책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좋았나요’ 같은 질문만 나오면 자신도 모르는 새 정신없이 대화에 빠져들었던 것.

지양은 “그 탓에 마무리 공부를 제대로 못해 수능 점수가 영역별로 10점 이상씩 떨어졌다”며 “어제 시험이 끝나고 하도 울어 눈이 퉁퉁 부었다”고 속상해했다.



책을 무척 좋아했다, 아주 특별하게

지양의 손때 묻은 백과사전.

지양이 처음 책을 만나게 된 것은 어려운 환경 탓이었다. 또래 친구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라는 지론을 가진 아버지와 가난한 가정형편 탓에 학교에 갈 수 없었던 그는 혼자 남아 외로울 때, 그리고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너는 이런 거 모르지’ 하며 놀릴 때 책을 읽었다. 아버지가 고물상에서 얻어다주는 헌 책에서부터 동네 노인정에 쌓여 있는 ‘어른’ 책까지 가리지 않고 읽었다. 톨스토이부터 삼국지까지,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읽었다고 한다.

“어찌나 책을 읽어대는지, 어느 날 보니까 동네에 오는 책 외판원의 도서목록에 있는 걸 다 읽은 거예요. 그 많은 책을 보는 동안 한 권도 못 사준 게 미안해서 큰맘먹고 백과사전 한 질을 할부로 들여놓았지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더라고요.”

어머니 곽계숙씨(46)는 30만원이나 하는 이 전집 값을 내느라 머리가 다 빠질 정도로 스트레스에 시달렸지만, 백과사전은 10년이 넘는 지금 지양의 보물 1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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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짝친구인 박지형(왼쪽), 채연희양(오른쪽)과 나란히 앉아 웃고 있는 지관순양.

지양이 사는 곳은 파주시 문산읍 운천2리. 시내에서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이다. 뒷산에는 산토끼들이 뛰어다니고 새벽이면 산에서 노루 가족이 내려와 논을 망치기 일쑤라는 그곳에서 지양은 다섯 살 때부터 살았다. 몇 차례 살던 집이 철거당해 이사를 다니다가 지금은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단층집에 살고 있는데, 책 한 권 꽂아둘 공간이 없는 이 집에 유일하게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손때 묻은 그 백과사전이다.

“아버지는 같이 사극을 볼 때면 항상 뒷이야기를 물어보셨어요. ‘저 다음에 사도세자가 죽는 거야?’ 하는 식인데, 대답을 못하면 큰일 났거든요. 드라마 보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재빨리 백과사전을 뒤져서 다음 내용을 알아두곤 했죠.”

하지만 ‘도깨비 방망이’처럼 무엇이든 알려줄 것 같던 백과사전도 나날이 커져가는 지양의 호기심과 지식을 다 채워줄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친구와 선생님이 필요했다. 언젠가 봐두었던 신문광고를 떠올리고 별다른 준비 없이 아버지 몰래 검정고시를 치렀는데 단번에 시험에 합격했다. 또래 친구들이 중학교에 입학한 뒤 한 해가 지난 다음이었다.

딸의 간절한 바람에 아버지가 마침내 학교 가는 것을 허락해, 지양은 1999년 문산여중에 입학한다. 학교에 가서도 독서에 관한 한 그를 따라올 친구는 없었다.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에게 주는 ‘다독상’은 늘 지양의 몫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교과서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학교에 들어온 지양에게 일반 과목 공부는 힘에 부쳤다. 게다가 공부할 시간조차 내기 어려웠다.

‘공부보다는 사람 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원칙으로 지양을 키운 아버지 지의준씨(61)는 “공부는 학교에서 충분할 텐데 집에 와서까지 교과서를 펴는 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책을 읽는 것은 괜찮지만, 공부하는 것 같으면 ‘건강이 우선이다. 불 끄고 자라’고 채근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부터 독서 진가 발휘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있는 아버지와 오른팔이 불편한 어머니를 대신해 생계를 꾸리기 위해 나서는 것도 지양의 몫이었다. 지양 가족의 생업은 오리 사육. 마을 개울에 2000여 마리의 오리를 내놓고 키우는데, 지양은 어릴 때부터 뒷산의 풀을 베어 이들에게 먹이고 개울가를 뒤져 알을 주워 모으는 일을 해왔다. 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이 일은 지양이 해야 했던 것이다. 학교가 파하는 대로 집에 달려가야 했고, 중학교 3학년 때부터는 동네 꼬맹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책을 무척 좋아했다, 아주 특별하게

담임인 김진희 교사(왼쪽)와 지양.

하지만 바쁜 틈에도 공부는 늘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중하위권에서 맴돌던 성적이 2학년 때는 전교 270명 가운데 100등 권으로 크게 오르더니, 3학년 첫 시험에서는 78등을 기록했다고 한다. 반에서 10등 정도 수준의 상위권이 된 것이다.

지양의 중학교 2, 3학년 담임이었던 이인자 교사(48)는 당시 지양에 대해 “성실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다음 시험에서는 60등 안에 들도록 해보자고 격려했다. 하지만 번번이 수학이 발목을 잡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지양이 치른 모의고사의 수학 점수는 30점 만점에서 7점. 반에서 1등인 학생의 점수는 27점이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이 한계를 좁혀준 것은 ‘평소 실력’이 뛰어난 인문 사회 과목, 특히 역사였다. 지양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학교에서도 유명해서, 심지어 가정 시간에 나오는 복식사, 체육 시간의 올림픽사 같은 역사에도 눈을 반짝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양의 중학교 때 친구들은 그가 역사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쓰레기 반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청소도 잘했다고도 기억했다. 교실이 지저분하면 자청해서 치우고, 다른 친구들의 분리 수거까지 도맡아 해 3학년 때는 환경부장으로 뽑히기도 했다는 것. 동그랗고 귀여운 외모 탓에 ‘불량감자’라 불리기도 했다.

교사들이 기억하는 지양은 애틋하고 귀한 제자다. 스승의 날에도 가난한 형편 탓에 별다른 선물을 준비할 수 없었던 그는 오리알을 예쁘게 포장해 가져오거나, 그도 안 될 때는 종이학을 접어 유리병에 담아왔다고 한다. 이 교사는 “한번은 집 앞에 피어 있는 백합을 떠내 화분에 심어온 적도 있었다. 관순이가 쑥스러워하며 백합 화분을 내놓는데, 그 마음이 너무 예뻐서 보는 앞에서 차에 싣고 ‘나 이거 집에 가져간다. 잘 키울게’라고 말했다.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구김살 없이 자란 지양이 평소 독서를 통해 쌓아둔 실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발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막 중학교에 갔을 때는 적응도 힘들고 이게 내가 바라던 학교 생활인가 싶어 실망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선생님들이 도와주시고 조금씩 모든 게 익숙해지면서, 평소에 책을 읽은 게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됐지요.”

책을 무척 좋아했다, 아주 특별하게

어머니, 동생 영의, 아버지(왼쪽부터).

지양이 학교에 진학한 후 처음으로 큰 상을 받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축제기간에 열린 ‘봉서벨 퀴즈대회’에서 3학년 선배들까지 모두 누르고 1등을 차지한 것이다. ‘평소 역사와 중국 소설 등을 많이 읽은 덕’에 그해 교내 한문경시대회에서도 우승했다. 여전히 학과 공부할 시간은 내기 어려웠지만, 책만큼은 쉬지 않고 읽었다.

“관순이가 ‘봉서벨 퀴즈대회’에서 받은 도서상품권 30만원어치로 책을 다 샀는데, 그중 하나가 유시민 의원이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였대요. 이번에 ‘도전! 골든벨’의 50번 문제 답이었던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서 그 책을 보고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어머니 곽씨는 지양이 고등학교에 가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한 것은 역시 책 읽기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대학 가면 동양사 공부하고파

지양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경기도가 주최한 학생문예대전에서 은상을 받았는데, 자유롭게 주제를 선택할 수 있는 수필 부문에서 그가 쓴 글의 소재는 ‘백인(百認)’이었다.

“중국 당나라 때 장공예(張公藝)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거든요. 그 사람은 9대가 한집에서 살았는데, 당의 고종이 비결을 묻자 참을 인(忍)자를 100번 써 대답을 대신했다고 하는 내용이에요. 예전에 어디선가 봤는데 참 마음에 와 닿아서 그걸 주제로 글을 썼지요.”

그 또래 아이들이 잘 알지도 못할 이야기를 구성지게 풀어내더니, 안중근 의사가 쓴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라는 유묵까지 소개한다. 언제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기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지식, 그것이 지양의 힘이다.

그가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동양사.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사, 일본사, 베트남 독립운동사 등에 관심이 많다. “베트남은 100년 동안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지만 한 번도 굴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그들의 민족성을 공부하면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지양은 돈을 벌거나 이름을 떨치는 데 별 관심이 없다고 했다. 좋은 책을 마음껏 읽고, 후배들을 위해 더 좋은 책을 남기는 학자가 되어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한몫하고 싶을 뿐이다. 일반 사학과가 아닌 동양사학과를 가고 싶은 까닭은, 그래야 더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지양의 어머니 곽씨는 “관순이가 골든벨 나가기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나더니, 꿈에 이승만 대통령이 나왔는데 권총을 주면서 두 명을 쏘라고 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임금이 칼을 내리는 거면 대단한 꿈이니 혹시 골든벨 되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 정말 됐다. 두 명을 쏘라고 했으니 좋은 일이 아직 하나 남은 것 아니냐. 그게 대학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하고 싶은 관순이의 꿈이 이루어지는 거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재 지양은 ‘골든벨 후폭풍’의 여파로 수능 성적이 예상 점수보다 많이 떨어져 원하는 학과에 진학할 수 있을지 불안한 상태. 게다가 주위의 기대가 높아진 것도 큰 부담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지양의 e메일 주소는 ‘사이고마데’. 그가 동양사를 공부하기 위해 배우고 있는 일본어로 ‘최후의 순간까지’라는 뜻이다.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힘든 고비를 무수히 넘어온 지양은, 꿈이 이루어지는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양의 담임인 김진희 교사도 “관순이는 항상 우직하게 자기 일을 밀고 나가는 아이다. 어느 순간에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나친 관심이나 기대가 그 아이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사회가 이제는 따뜻하게 격려하며 그저 지켜봐주었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주간동아 2004.12.02 462호 (p42~45)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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