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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의 역사와 사람들

경북순흥단종 복위 노리다 숱한 희생 아직도 ‘피끝’이란 지명 남아

사건 후 ‘순흥도호부’ 폐지됐다 200년 뒤 부활 … 금성대군 모신 사당도 세워져

  • 글·사진=신정일/ 황토현문화연구소장 hwangtoh@paran.com

경북순흥단종 복위 노리다 숱한 희생 아직도 ‘피끝’이란 지명 남아

경북순흥단종 복위 노리다 숱한 희생 아직도 ‘피끝’이란 지명 남아

옛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순흥 풍경.

금성대군을 모신 사당인 금성단. ‘봉황이 깃들여 산다’는 의미가 담긴 ‘봉서루’ 누각(왼쪽부터).

가을의 끝자락,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가는 길은 붉게 타오를 듯 매달려 있는 사과나무로 눈이 부셨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나무 가로수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소백산도 가슴 시린 단풍 빛이 한창이었다.

순흥면 초입에서 처음 만난 것은 읍내리 고분벽화(사적 제313호)의 모형. 읍내리 고분은 남한에 두 개뿐인 벽화가 그려진 무덤으로 실제의 것은 거기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있어 길가에 모형을 세워놓은 것이다. 읍내리 고분은 이곳이 원래 고구려 땅이었으므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 고분으로 추정된다.

마을에 들어서니 순흥 안씨의 고향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순흥 안씨들의 잘 정돈된 묘역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고려 말 학자 이색(李穡)의 ‘송안시어시서(送安侍御詩序)’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순흥 안씨는 세세로 죽계(竹溪) 위에 살았다. 죽계의 근원은 태백산에 있다. 산이 크고 물이 멀리 흐르듯, 안씨의 흥성함도 끝이 없을 것이다.”

죽계는 지금도 순흥면 안에 있는 맑은 계곡. 소백산에 둘러싸인 데다 죽계를 품고 있어 예로부터 순흥은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으로 사대부들의 칭송을 받았다.

육수 부어 먹는 순흥묵밥 … 김치 맛 일품 ‘별미’



이중환의 ‘택리지’에 실린 죽계 편을 보자.

“영천(榮川·지금의 영주를 말하는 듯하다) 서북쪽 순흥부(順興府)에 죽계라는 계곡이 있는데, 죽계는 소백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다. 이곳은 들이 넓고 산은 낮으며 물과 들이 맑고 깨끗하다. …참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다.”

조선 초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서거정도 순흥을 병풍처럼 감싸안고 있는 소백산을 두고 “소백산이 태백산에 이어져, 서리서리 백 리(百里)나 구름 속에 꽂혔네. 분명히 동남계(東南界)를 모두 구획하였으니, 하늘땅이 이루어져 귀신은 인색을 끼쳤네”라고 노래했다.

경북순흥단종 복위 노리다 숱한 희생 아직도 ‘피끝’이란 지명 남아

퇴락한 순흥의 오늘을 보여주듯 쓰러져가는 집.

먼저 ‘순흥묵집’에 들어가 이른 점심을 먹었다. 도토리묵이 아닌 메밀묵과 나물을 넣어 만든 비빔밥에 육수를 부어 먹는 순흥묵밥은 밥보다도 김치 맛이 일품이었다. 이제 천천히 순흥 기행에 나서는 길. 골목을 휘감아 돌아나가자 발은 자연스레 순흥면사무소에 닿았다.

지금의 순흥면사무소 뜰 안에는 ‘흥주도호부 봉서루(鳳棲樓)’라는 누각이 있어, 이곳이 순흥의 옛이름인 ‘흥주도호부’의 관아 자리였음을 짐작케 한다. ‘봉서루’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순흥의 진산인 비봉산에서 봉황이 날아가면 고을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누각 앞쪽의 현판에는 봉황이 깃들여 산다는 의미의 ‘봉서루’라는 현판을, 뒤쪽에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의 ‘영봉루(迎鳳樓)’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봉서루’ 앞뜰에는 목이 잘린 석불상과 순흥을 거쳐간 관리들의 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고, 조선 후기 대원군이 나라 곳곳에 세웠던 척화비가 남아 있으며, 순흥 지역의 문화유산을 모아놓은 순흥박물관도 있다.

고구려 시대 ‘급벌산군’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의 기틀을 잡은 뒤 오랜 기간 ‘흥주’로 불리다 고려 말 ‘순흥부’로 승격되며 번성했던 이 고장이 쇠퇴한 것은 조선시대 세조 3년인 1547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일으킨 단종 복위사건 때문이었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당시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돼 유배지를 떠돌다 순흥에 귀양 와 있었고, 단종은 영월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었다. 그런데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또다시 단종 복위를 꾀한 것이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고을의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경상도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리다 거사를 감행하기도 전 밀고로 발각돼 희생되고 만다. 당시 금성대군과 이보흠, 그리고 단종 복위에 동조했던 수많은 영남 선비들이 흘린 피는 죽계천을 붉게 물들이고 40리 아래에 있는 동촌리까지 흘렀다 한다. 그래서 이 지역 일대에는 지금까지도 ‘피끝’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이 ‘참사’로 ‘순흥도호부’는 폐지됐고, 이 땅은 풍기·예천·봉화로 조각조각 나뉘게 됐다. 순흥이 되살아난 것은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인 숙종 37년(1711). 단종이 복위되면서 순흥은 다시 도호부로 승격됐고, 이 지역에는 금성대군을 모시는 사당 ‘금성단’이 세워졌다.

‘금성단’은 순흥부사 이명희가 임금의 윤허를 받아 설치한 것으로 상단에는 금성대군, 오른쪽 단에는 이보흠, 왼쪽 단에는 모의에 연루돼 죽은 사람들을 모셔 제사 지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이 지역 사람들은 단종과 금성대군이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경북순흥단종 복위 노리다 숱한 희생 아직도 ‘피끝’이란 지명 남아

금성대군을 모신 사당인 금성단. ‘봉황이 깃들여 산다’는 의미가 담긴 ‘봉서루’ 누각(왼쪽부터).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의 진원지 ‘청다리’ 남아 있어



금성단 바로 옆에는 어린 시절 어른들이 흔히 놀리곤 하던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의 진원지인 작은 다리, 즉 청다리(지금의 제월교)가 있다. 죽계 상류에 있던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은 종이나 이곳 마을 처녀와 눈이 맞아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처녀와 미리 짜고 청다리 밑에 버리라 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다리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아이를 발견한 것처럼 해서 “불쌍한 아이를 주웠다”며 본가에서 기르게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가 낳은 아이를 고아원이나 경찰서 앞에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버리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낭만적이라 할 수 있고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나 싶다.

소수서원은 고려 때 유학자인 안향을 기리기 위해 1542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의 후신.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를 지내면서 ‘소수서원’이라는 임금의 친필 현판을 받아 이름을 ‘소수서원’으로 바꾸었다.

지금은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에 당간지주만 덩그러니 남았지만, 소수서원 터에는 원래 숙수사(宿水寺)라는 큰 절도 있었다. 이 절을 찾았던 시인 노여(魯璵)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그윽한 경치 찾았더니, 난초의 뜰은 10년 전의 모습이어라. 벽의 값어치는 몇 년간 시와 함께 비싸고, 절의 이름은 천고의 물과 더불어 흐르누나. 추위가 산 빛을 미니 스님은 문을 닫고, 차가움이 개울소리를 누르니 손님은 다락에 오르도다. 휘파람 불며 서성거리는 중은 해가 졌다고, 난간에 고개를 돌리면 고향생각 나누나”라는 시를 읊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 한적했던 절은 사라져 서원으로 남았고, 이제는 선비촌이 조성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고 있다.

가볼 만한 곳

중앙고속도로 서영주 풍기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좌회전하면 풍기이고, 931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순흥에 이른다. 소백산 아래에 죽계계곡과 초암사가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부석사가 있다. 순흥면사무소 근처에 순흥묵집(054-632-2028)이 있는데 묵밥(4000원) 맛이 그만이다.




주간동아 2004.11.25 461호 (p60~61)

글·사진=신정일/ 황토현문화연구소장 hwangtoh@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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