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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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합격자들 “공부는 지금부터”

사법연수원 입소 대비 또다시 학원 열풍 … 합격자 1000명 시대 맞아 박터지는 성적 경쟁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3-12-31 1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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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시 합격자들 “공부는 지금부터”

    한 고시학원의 사시 1차시험 대비반 수업 모습. 최근 사법연수원 준비반까지 등장해 법조 인력의 사교육 의존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약 3만명의 고시 낭인(浪人)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명 ‘고시 1번지’. 최근 합격자는 물론 1차시험에 합격조차 못한 사법시험(이하 사시) 준비생까지 공포에 떨게 만든 괴담이 나돌았다. “사법연수원(이하 연수원) 재수생도 경쟁자로 나설 것이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지만 내용은 그럴듯하다. 합격자 1000명 시대를 알린 연수원 33기가 2004년 초 수료하면서, 200∼300등 안에 들지 못해 판·검사에 임용이 안 된 이들이 다시 사시에 응시해 연수원 입소를 노린다는 것.

    뜬소문에 불과하지만 신림동 주변에서는 완전한 낭설만은 아니라는 얘기가 적지 않다. 대형 로펌들마저 불경기로 인해 채용인원을 대폭 줄이자 성적이 나쁜 연수생들의 입지가 절대적으로 줄어들었다는 판단에서다. 이는 조선시대 ‘과거급제’에 비교되는 사시 합격이 얼마나 격이 낮아졌는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다. 그러나 여전히 판·검사의 위상은 높다. 이러한 괴담의 저변에는 과거 사시에 집중됐던 경쟁의 장이 점차 연수원까지 옮아갔음을 의미한다.

    로펌 채용시장 꽁꽁 … 믿을 건 연수원 성적

    사시 합격자들 “공부는 지금부터”
    “사시 관문은 1차(객관식)-2차(논술)-3차(면접)를 거쳐 4차(연수원)로 확대된 지 오랩니다.”



    지난해 45회 사시에 합격한 J씨(29·K대)는 이 같은 말을 남기고 1월3일부터 2월 말까지 진행되는 모 고시학원의 ‘연수원 대비 특별강좌’에 등록했다. 수강료는 60만원 선. 이 학원에서는 연수원 2년간 끊임없이 반복할 ‘민사·형사재판 및 검찰 실무’ 과목에 대한 선행학습을 실시한다. 2003년 합격자 1000여명 가운데 절반 가량이 이런 과외를 받았지만 2004년에는 그 수가 훨씬 늘 것이라는 게 학원 관계자들의 예상이다.

    사시 합격자들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반응이다. 판·검사로 임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할 대상이 같은 사시 합격자인 데다 매년 악화되는 변호사 업계의 불황 소식에 따른 부담감 때문이다.

    합격자 300명 시절(1994년까지) 불문율은 “사시 성적은 공무원으로 있는 한 끝까지 따라다닌다”는 것이었다. 사시 등수는 그 정도가 가장 심한 판사의 경우 임관 뒤 20년이 흘러 차관급인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때까지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때문에 연수원 이후의 생활에는 낭만적 요소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법조 개혁이 추진되면서 로스쿨 대신 채택된 대대적인 합격자 증원 정책은 법률 서비스 확대라는 성과를 얻었지만, ‘고시열풍 확산’과 ‘대학교육 황폐화’라는 역풍을 불러왔다. 또한 성적순이라는 대원칙은 결과적으로 연수원 성적(60%)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현상을 가져왔다.

    사시 합격자 1000명 시대의 연수원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연수원 재수생’이란 뜬소문을 접한 올해 연수원 졸업기수(33기)들은 한결같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말한다. “성적이 나쁠 경우 아쉽다는 생각은 들겠지만 지옥 같은 생활을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문제는 연수원생들의 취업난이 예상외로 심각하다는 데 있다.

    연수원 한 관계자는 “판·검사 200여명, 군 입대 예정자 150여명을 제외한 600여명이 로펌이나 정부기관, 기업법무팀 등의 문을 두드리지만 선뜻 채용하겠다는 곳이 없다. 심지어 인맥과 성적이 좋지 않은 경우 연봉 3000만원대 대리급을 제안받고 절망한 사람도 많다”고 전했다.

    사시 합격자들 “공부는 지금부터”

    2002년 일산 장항동에 세워진 사법연수원 전경.

    2001년 연수원에서는 과도한 공부를 견디다 못해 한 여자 연수생이 숨진 일이 벌어졌다. 그 이후로 연수원에서는 체력단련장과 양호실을 신설하고, 시험시간도 1시간을 단축하는 등 다각도의 방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경쟁의 강도는 오히려 더 세졌다. 연수원생들 사이에서 “살인적인 경쟁체제에서 그동안 한 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다.

    그럼에도 사시 합격자들의 연수원 대비학원 열풍에 대한 시선은 대단히 비판적이다. 연수원 33기 김윤선씨(29)는 “무작정 외우는 패턴을 학원에서 다시 반복하는 것은 자신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이다”며 “합격자들의 불안감을 이용한 학원측의 장삿속이다”고 말한다. 연수원 교육이 판례 위주이기 때문에 학원의 암기식 교육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현실적으로 좋은 성적을 얻는 게 연수원 입소의 목표라면 그 시스템에 적응하려는 이들을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시 시스템 한계 … 연수원 제도 바꿔야”

    2003년 사시는 예년에 비해 가장 낮은 합격점수를 기록했다. ‘면(免)과락이면 필(必)합격’이란 신조어를 낳은 올 합격자 평균점수는 42.64점. 한 채점교수는 “법 과목의 가장 기초인 민법의 경우 수험생들의 실력이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고 채점 소감을 밝혔다. 결국 현재의 인원증가로 일관해온 사시 제도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 법조계의 결론이다.

    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는 “우리나라 판·검사 배출 시스템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공교육을 무시하고 사교육에 목을 매는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며 “결국 연수원을 폐지하고, 성적 위주의 판·검사 임용 시스템을 바꾸는 사법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변호사 가운데 판사를 선발하는 법조 일원화와 로스쿨 제도가 도입돼야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시 논란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법제도 개혁을 추진 중인 사법개혁위원회가 과연 연수원 제도를 어떻게 바꿀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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