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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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공룡아! 개미 맛 좀 봐라”

소액주주모임 영향력 갈수록 막강 … 중대 사안 캐스팅보트 역할 ‘기업들도 눈치 보기’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3-12-31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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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 공룡아! 개미 맛 좀 봐라”

    12월29일,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현대투신증권 소액주주들.

    개미는 약하다. 그러나 ‘개미떼’는 힘이 세다. 리더와 명분까지 갖추면 금상첨화. 무엇보다 이들은 ‘이윤’이라는 강력한 동기 아래 똘똘 뭉쳐 있다. 주식시장을 넘어 한국 경제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소액주주 얘기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증권집단소송법은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의미에서 소액주주의 권리 행사에 날개를 달아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정말 ‘한 명의 주주라도 대주주처럼’ 모시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2003년은 소액주주가 경영권 향배, 특히 재벌 지배구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해가 바뀌는 시점에도 소액주주에 대한 삼성, SK, LG, 현대 등 4대 그룹의 ‘눈치 보기’는 계속되고 있다. 각기 그룹의 미래가 걸린 사안들에 소액주주가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SK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SK㈜는 3월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기존 대주주 대 소버린자산운용(이하 소버린)의 일대 격전을 앞두고 있다. 최태원 손길승 두 회장의 경영권이 걸린 중대 사안이다. 현재 SK㈜의 우호지분은 약 35%다. 소버린 쪽은 외국계 펀드 지분을 합쳐 20% 정도로 추산된다. 외국계 금융기관 지분 15~18%를 추가 확보했다는 소문도 들리나 확실치 않다. 전후 사정에 밝은 한 경제계 인사는 “소버린의 의사를 대행하는 국내 및 홍콩 에이전트가 지나치게 앞서가는 바람에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LG그룹 소액주주 표심 못 잡아 하나로통신 인수 쓴잔



    “재벌 공룡아! 개미 맛 좀 봐라”

    2003년 10월22일, 하나로통신 임시주총에서 외자유치안이 통과되자 환호하는 직원과 소액주주들.

    어떻든 이런 상황에서 정기 주총을 위해 12월26일을 기해 주주명부가 폐쇄됨에 따라 양측간의 지분 사모으기 경쟁은 막을 내렸다. 양측 모두 50% 이상의 지분 확보에는 실패한 셈이다. 결국 승부는 21%의 지분을 가진 소액주주들의 손에서 결정나게 됐다. 아직은 SK㈜가 유리한 상황이나 참여연대와 외국인 투자자, 소액주주가 확고히 손잡을 경우 뒤집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LG그룹의 상황도 난감하다. 계열사들이 8000억원 규모의 LG카드 회사채를 인수키로 한 ‘LG-채권단’ 합의와 관련, 각 사 소액주주들이 조직적 반발 움직임을 보이는 것. 특히 동반 부실 위험에 처한 LG투자증권 노조 및 소액주주들은 “오너의 책임을 회사와 직원, 죄 없는 소액주주들에게 떠넘기고 있다”며 “연대 가능한 세력끼리 손잡고 싸워나갈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LG그룹은 2003년 이미 소액주주들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경험했다. 하나로통신 인수전에서 소액주주들의 ‘표심’을 사로잡는 데 실패함으로써 그룹의 미래 전략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하나로통신 건은 소액주주가 단결해 재벌 그룹을 무력화한 대표적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에서도 ‘키 맨(Key Man)’은 소액주주다. 지금 KCC 정상영 명예회장측과 현대엘리베이터 현정은 회장측은 증권시장에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매입 경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까지 드러난 구도로만 보면 현회장측이 정명예회장측에 비해 의결권이 많다. 그러나 양측이 다 절대다수를 확보 못한 상황에서 올 3월 주총은 결국 소액주주들의 향배에 따라 결론이 날 전망이다.

    “재벌 공룡아! 개미 맛 좀 봐라”

    2003년 2월25일 열린 하이닉스 주총에서 한 소액주주가 주총 무효를 주장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왼쪽).2000년 3월16일 삼성SDS 주총에 참석한 참여연대측이 티켓을 들려 하자 직원인 우리사주 조합원들이 막고 있다.

    현대투신증권(이하 현투증권) 문제도 간단치 않다. 현투증권이 푸르덴셜 금융그룹에 매각되면서 정부는 그 지분을 완전감자하되, 소액주주에 대해서는 부분 보상을 하겠다고 밝혔다. 현투증권 소액주주는 2만3000여명으로 전체 주식의 25.3%를 갖고 있다. 그러나 소액주주들은 이를 수용할 수 없다며 손해배상 소송 등 강력한 투쟁에 돌입한다는 방침이다. 정부가 제시한 보상 수준이 주식 매입가격의 12~19% 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조규태 현투증권 소액주주협의회 대표는 “충분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영업점 점거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투증권 부실 책임에 따른 매각 방침이 확정된 현대증권 또한 소액주주들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대주주인 현대상선 지분 16.64%에 대해선 정부 임의대로 처리해도 무방하나 나머지 83%의 소액주주 및 직원 주주 지분은 절대 손댈 수 없다”는 주장이다.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이재용 삼성전자 상무 간 상속 문제, 삼성생명 상장 문제 등 그룹 최대 현안 처리에 참여연대를 주축으로 한 소액주주운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온 그룹이다. 이 사안들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나라에서 소액주주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1997년부터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가 소액주주 권익보호와 기업경영 투명성 확보를 내걸고 소액주주운동을 시작한 것. 제일은행을 시작으로 전개된 소액주주운동은 삼성전자, SK텔레콤, 현대중공업 등 핵심 재벌기업들을 상대로 한 ‘5대 재벌 개혁을 위한 소액주주운동’으로 발전했다.

    참여연대의 활동은 주식시장과 주주들의 의식, 특히 주총 풍경을 혁명적으로 바꿨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제일은행 부실경영 문제가 시작이었다. 소액주주들을 규합해 정기 주총에 참가, 발언권과 의결권을 적극 행사했다. 그러나 은행측은 주주들의 질의에 제대로 답하기는커녕 오히려 발언을 저지하고 정당한 표결 절차 없이 의결을 강행했다”고 회상했다. 다른 기업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그러나 소액주주운동이 사회적 반향을 얻고 주주들이 자기 권리와 힘에 눈뜨면서 이제 소액주주들은 기업이 가장 두려워하고 부담을 느끼는 존재가 됐다. 기업들이 앞다투어 배당을 계획하고, 특히 대주주보다 소액주주에게 더 많은 배당을 주는 것 또한 같은 이유다.

    경제계 일각, ‘소액주주 권리찾기’ 부작용 우려 목소리

    참여연대 활동과 함께 빠른 속도로 보급된 인터넷은 소액주주모임 활성화와 조직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거래소 상장이나 코스닥 등록 기업은 물론, 제3시장 진출 기업 혹은 비상장 기업에까지 속속 온라인상의 소액주주모임이 결성됐다. 이를 통해 소액주주들이 ‘단일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그 역할과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기업인수합병이나 경영권 분쟁으로 인한 지분 경쟁에서도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참여연대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소액주주 목소리 내기도 점차 활성화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메인 스트림’은 참여연대가 앞장서 끌어가는 재벌 대상 ‘운동’들이다. 또 참여연대와 직접적 연관성을 찾기 힘든 사안, 예를 들어 하나로통신 인수전이나 옥션 공개매수 건 등에도 참여연대의 그림자는 넓게 퍼져 있다. 각 사안의 소액주주 대리인이 ‘법무법인 한누리’인 것이다. 한누리의 대표변호사는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부소장이자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장인 김주영 변호사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제 한누리는 소액주주 관련 소송이나 권리 행사 대행, 기업 지배구조 문제에서 국내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법률사무소로 인정받고 있다.

    참여연대 소액주주운동이 기업에 큰 문제가 생기기 전 이상조치를 발견해 경고하는 목적이 크다면, 소액주주들이 협의회나 연합회, 대책위원회 등을 결성해 본격적 활동에 들어가는 경우는 대개 투자한 회사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때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노동조합-우리사주조합-소액주주모임이 연대하는 형태를 띤다. 앞서 열거한 SK, LG, 현대 그룹 등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 소장은 “개미들만으로는 응집력이 약하다. 1년을 넘기기가 어렵다. 노조와 우리사주조합이 함께 가야 지도력과 실행력이 생긴다. 각 세력 간 협력이 가능한 것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참여연대의 개입 없이도 철저히, 끝까지 잘 싸워나간다”고 설명했다.

    노조 또는 우리사주조합 중심 소액주주 권리 행사의 맹점은 상황에 따라 주주 이익과 종업원 이익이 상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노조의 최대 관심사는 1년에 한 번 이루어지는 임금·단체협상이다. 노조는 임금협상 등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회사측에 소액주주 관련 소송에서 발을 뺄 것을 약속할 수 있다. 반대로 파업으로 더 이상 소송에 매달리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제일은행, KT, 데이콤 관련 소송들이 그러한 경우다.

    참여연대에 관여하는 한 회계사는 “제일은행 때의 경험으로 인해 ‘소송을 도와달라’며 찾아오는 노조 관계자들을 보면 꼭 두 가지를 얘기한다. 첫째, 소송에 관한 모든 권리를 우리에게 위임하고 둘째, 중간에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러면 대부분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액주주가 움직인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결권 행사와 주총에서의 안건 상정을 뜻한다. 이중 의결권 행사란 주총에서 주주권을 행사하거나 그 권리를 근거 삼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 모두 문제 해결의 마지막 수단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부실기업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빚잔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해관계가 첨예한 상황이므로 시간, 비용 모두 많이 들며 경우에 따라서는 기업 회생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외에도 경제계 일각에서는 소액주주 권리 찾기 활성화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한 중견기업인은 “소액주주 활동을 한다면서 대주주나 회사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특히 외국인 주주와 의기투합해 고배당을 위한 단기적 이익에 집착하면 장기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큰 문제가 생긴다. 경영을 하다 보면 장기적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혁신이나 도전 없이는 기업의 미래 또한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소액주주 활동이 기업의 잠재적 성장력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는 노조와 연계된 소액주주 운동에도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이 좋은 사례다. 경영진의 결단에 따라 근로자가 절대주주가 된 그 회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망했다. 근로자와 주주의 이익을 모두 보장받겠다는 식으로만 움직여서야 회사가 제대로 되겠는가.”

    소액주주 활동이 주로 도덕성을 담보로 한 ‘운동’의 성격을 앞세우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제기가 있다. 증권업계의 한 유력인사는 “하나로통신 인수전이야말로 소액주주의 역할과 영향력이 빛을 발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문제를 풀어가는 데 노조와 우리사주조합, 소액주주들은 ‘LG그룹은 나쁘다’는 식의 도덕성을 전면에 내세운 캠페인을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의 지지를 얻어 대주주가 된 뉴브릿지와 칼라일, 두 외국투기자본이 하나로통신에서 철수할 때는 또 어떤 명분을 내세울 건가. 아마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업은 무조건 나쁘다, 소액주주는 무조건 좋다는 식의 접근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소액주주모임 대표가 특정세력과 결탁해 사익을 추구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마치 재건축아파트조합장에게 콜 옵션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김주영 변호사는 “위험성은 있다. 소액주주운동을 표방하면서 그린 메일링(green mailing)을 시도하거나, 회사 내부 정보를 빼내 주가 조작에 뛰어들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미 규모가 작은 회사들에서는 비슷한 사례가 가끔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불법이며 앞으로 법의 개입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변호사는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다. 그런 잠재적 위험성만을 가지고 소액주주 권리 찾기를 매도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소액주주의 부당한 압력에 굴복하는 회사는 불투명한 기업이다. 회사가 투명하게 경영되고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사안”이라고 말했다. 흔히 ‘주총꾼’이라 불리는 사람들 또한 필요악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만큼 기업이 엄격한 자기규율을 갖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란다.

    오랫동안 H산업의 소액주주모임을 이끌어온 김모씨는 “나쁜 마음을 먹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힘을 얻을 수 없다. 다른 주주들의 공감을 끌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아’가 있으면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조직이 깨진다. 소액주주모임 또한 내적 투명성이 없으면 스스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김상조 소장은 “미국처럼 변호사 천국이 돼 소송 이익을 변호사가 다 가져가버리는 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더라도 소액주주가 전문 변호사의 개입이 배제된 채 움직이는 것은 우려되는 일이다. 사건마다 문제를 삼기보다는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소액주주의 활동 방식이 옮아가야 한다. 회사가 끝장나기 전에 문제의 불씨들을 찾아 논의하고 대책을 모색하는 메커니즘이 형성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이 터진 후에야 각자의 이익을 찾기 위해 뛰어들다가는 또 다른 갈등으로 회사나 개인 모두 피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억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학습이 필요하고, 지금이 바로 그 과도기”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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