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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美’에 마케팅 날개를 달다

궁중음식·개량한복 등 브랜드화 잇단 성공 ‘명품 반열에’ … ‘한국미가 고급’ 인식 점차 확산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전통美’에 마케팅 날개를 달다

‘전통美’에 마케팅 날개를 달다
지화자, 메종 드 이영희, 효재, 모노, 설화수, 우리그릇 려, 드코레….

최근 전통의 맛과 아름다움을 내세워 포숑, 샤넬, 구찌, 로젠탈, 에르메스 같은 세계적 명품 브랜드들과 경쟁하고 있는 브랜드 이름들이다.

다국적기업의 명품들이 대량소비 단계에 들어서 차별성이 사라지자, 여피와 보보스(보헤미안+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소비자들이 새로운 ‘럭셔리’ 브랜드로 이들을 찾고 있는 것이다.

TV드라마 ‘대장금’이 폭발적 인기를 얻으면서 조선궁중음식점들이 속속 생겨나고, 서울 북촌의 한옥들이 부동산 투기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미술 분야에만 20억원을 쏟아 부은 영화 ‘스캔들’이 젊은 세대에 한복과 한옥의 색채와 구조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한다.

‘전통美’에 마케팅 날개를 달다
서울 소격동에서 골동품을 취급하는 김경태씨는 “마이센이나 로얄코펜하겐 같은 유럽도자기도 물론 좋은 물건이다. 그러나 요즘 찻잔으로 더 각광받는 건 조선시대 막사발”이라고 말한다. 그는 “북한산 막사발들은 30만~50만원 정도로 외국 명품들과 비교해 가격면에서도 경쟁력이 있다”고 귀띔한다.



‘전통의 미’를 마케팅 포인트로 삼은 이들 브랜드가 인기를 얻게 된 것은 복고적 민족주의나 문화산업 정책과는 무관해 보인다. 민족주의와 개발논리가 내걸린 1970년대에 한옥이 헐려나가고, 전통적 미감은 ‘가정의례준칙’에 의해 허례허식으로 치부됐다. 이를 되살린 것은 인스턴트와 패스트푸드에 반기를 든 ‘슬로 푸드’ 운동이나 삶의 질과 정신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웰빙’ 무드처럼 극히 최근에 서구에서 수입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유감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또 하나의 흘러가는 유행이라고 냉소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냉동된 수입 식재료를 쓰지 않고 제철 재료에 천연조미료를 넣고 조물락조물락 버무린 음식, 정갈하고 담백한 무명에 손으로 놓은 꽃 자수, 대패로 하나씩 다듬어 짜맞춘 한옥의 문살 등이 달팽이요리나 거위간, 샤넬이나 루이비통의 핸드백보다 훨씬 더 ‘럭셔리’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라는 것이다.

‘전통美’에 마케팅 날개를 달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한복려 원장이 북한에 가서 만든 답례상을 재현했다. 전통 한옥 창살의 미를 살린 청담동의 한국 음식점 '드코레'와 드라마 '대장금'에서 궁녀들이 연회를 벌이는 장면(위 부터).

식 (食)

대한민국 트렌드 1번지로 불리는 청담동. 음식값 비싸기로 소문난 곳은 퓨전이나 프렌치 레스토랑이 아니라 궁중식 혹은 ‘전통’ 기법의 한국 음식점이다. 반찬으로 나오는 무침 하나 만드는 데도 많은 재료와 여려 번의 손질이 필요하고 발효음식이 많아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퓨전과 아시안 레스토랑 사이에서 ‘프티 시즌즈’, ‘가온’, ‘드코레’ 등은 음식뿐 아니라 격조 높은 한국 문화를 제공한다는 자부심으로 유명하다.

최근 장소를 옮겨 새롭게 문을 연 ‘드코레’의 사장 케이킴씨는 “‘대장금’이 일반인들에게 우리 음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새 단골이 늘었다”고 말한다. 프랑스에 오래 살며 프랑스 음식에 익숙하던 케이킴씨는 ‘고지혈증’이 올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를 받고 3개월 동안 한국 음식을 먹은 뒤 건강을 되찾아 프랑스 의사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패션 디자이너인 케이킴씨가 우리나라에 돌아와 한국 음식점을 낸 것도 ‘신비의 한국 음식’에 대한 외국인들의 찬사를 잊지 못해서다.

‘대장금’의 궁중음식 고증을 맡은 무형문화재 한복려씨와 그의 전수자들이 운영하는 ‘지화자’, 조선시대 전통 사대부 가옥을 이용한 ‘필경재’와 ‘석란’도 명품 수준의 궁중음식으로 최근 젊은층 사이에서 새롭게 인기를 얻고 있는 곳이다.

한복려씨는 “전통 궁중음식이 아무리 좋다 한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신념에서 압구정동에 조선 궁중의 두텁떡, 주악, 증편 등 떡과 한과를 파는 ‘지화자 생과방’을 냈는데 단아한 떡의 모양과 럭셔리한 한지 패키지가 명품 지향적인 소비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전통美’에 마케팅 날개를 달다

최근 문을 열고 ‘의식동원’을 보여주는 한국전통음식점 ‘가온’.

“명품이란 게 결국 브랜드 싸움이지요. ‘지화자’는 일단 성공한 브랜드예요.단지 그것을 사업화하기 위해 맛(레서피)의 표준화와 마케팅이 필수적인데, 그것이 제가 지금 하는 일이지요.” 한복려씨의 설명이다.

‘전통美’에 마케팅 날개를 달다

올해 파리 프레타포르테쇼에서 선보인 메종 드 이영희의 백금드레스(맨위)로 한복 가슴말기와 전통 문양의 화려함을 강조했다. 오늘날 많은 디자이너들은 전통 한복(위)의 오방색과 풍부한 곡선에서 영감을 얻는다.

TV드라마 ‘대장금’, ‘왕의 여자’와 퓨전사극영화 ‘스캔들’, ‘낭만자객’ 등은 한복의 색과 디자인을 현대적인 기준에서 다시 보게 하는 부수적 효과도 얻었다. 흔히 ‘개량한복’이라 불리는 생활한복 브랜드들은 이미 자리를 잡았으나, 최근 한복에 대한 관심은 생활한복이 ‘불필요하고 손이 많이 간다’는 이유로 생략하거나 바꿔버린 것들을 원형대로되살리는 쪽이다.

그래서 전통궁중복에 쓰인 화려한 원색이나 활옷의 섬세한 자수, 다리에 휘감기는 넓은 남자 한복바지의 선, 가슴을 조이는 치마말기 등이 럭셔리한 의상의 컨셉트를 이루는 것이다.

이탈리아 패션브랜드인 구찌에서 동양 자수를 놓은, 일본 기모노의 허리띠 혹은 한복 치마말기와 거의 똑같은 양단 ‘벨트’를 내놓아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며 우리나라 패션 관계자들은 모두 씁쓸해하지 않았을까.

“파리에서 젊은 여자들이 청바지에 양단으로 만든 숄을 걸치고 다니는 걸 보며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1993년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했으며 현재 파리에 독립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메종 드 이영희’ 이영희 대표의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정통 한복’ 디자이너란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이대표는 “젊은층에게 비로소 ‘전통의 아름다움’이 호소력을 갖게 된 듯하다”고 말한다. ‘메종 드 이영희’를 찾는 이들은 이대표가 직접 하는 염색, 이 집에서만 나오는 양단의 짜임은 유럽 장인들의 손에서 나오는 이른바 ‘명품’에 비겨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말한다.

‘왕의 여자’를 통해 화려한 궁중한복을 선보이고 있는 이효재씨는 2대째 한복을 디자인하는 한복 디자이너. 손이 많이 가는 한복과 생활소품으로 유명하다. 가장 한국적이고 고급스런 소재로 무명을 꼽는 이씨는 여러 번 삶아내 뽀얗게 된 무명을 손으로 감치고 들꽃 수를 놓는다. 최근 한옥 열풍이 불면서 한옥에 사는 예술계 인사들의 집 안에서는 으레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을 정도다.

“제 디자인에 17년 동안 손자수만 놓은 분이 수를 놓아주세요. 인건비 때문에 중국에서 수를 놓아오기도 했는데, 한국 사람 손맛이 가진 여유 있는 느낌이 없어서 안 되겠더라구요. 전과 달라진 건 그 미묘한 차이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다는 거죠.”

주 (住)

최근 전통문화 보존단체 ‘아름지기’에서 ‘한옥 짓는 이야기’라는 책을 펴냈다. 대개 중견기업 경영자들의 부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아름지기’는 구성원들의 성향이나 그간 펼쳐온 사업을 볼 때 일단 ‘노블리스 오블리제’(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를 모범적으로 보여주겠다는 의욕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상류사회의 문화를 이끄는 ‘아름지기’의 첫번째 공식 프로젝트가 한옥 리노베이션 지침서 발간이란 점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책은 길게 뽑은 처마에, 외풍 서늘하고 대청에 콩기름을 먹이고 한지 장판을 깐 한옥이야말로 가장 호사스런 공간이라고 말한다. 강제환기시설에 이탈리아산 대리석으로 도배한 초고층 아파트는 감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책에는 ‘제대로 했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한옥이란 공간을 럭셔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고 그것은 첨단기술이나 돈으로 하루아침에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자부심이기도 하다.

한옥이 인기를 끌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옥을 짓는 목수와 건축업체들이 크게 늘어났고, 인테리어 업계에서도 ‘전통’ 바람이 불고 있다. ‘우리그릇 려’의 박여숙 대표는 “최근 하얏트, 리츠칼튼 호텔 등 특급호텔 레스토랑들이 귀빈용 식기를 도자기로 바꾸는 등 ‘고급화=한국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추세가 뚜렷하다”고 말한다.

최근 상업화랑에서 전통가구와 현대 미술품들을 함께 소개하거나(유아트스페이스), ‘전통과 혁신’(갤러리 현대)이란 기획전을 여는 것도 ‘오래된 것’이 ‘새로운 것’을 원하는 소비자층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순수한 한국적 미감을 주장해온 인테리어업체 모노 콜렉션의 장응복 대표는 “요즘 젊고 경제력 있는 세대는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세계적인 브랜드들과 차별화하는 방법은 그들에게 우리 삶에 파고들어 있는 정서를 마케팅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전통美’에 마케팅 날개를 달다

현대적인 사무실로 변신한 한옥의 내부와 고급스런 무명 생활용품들. 고가구와 어우러진 현대작가 김유선의 자개 작품. 전통의 미를 고스란히 담아낸 가구들(왼쪽부터).



‘전통美’에 마케팅 날개를 달다

올해 9월 뉴욕에 문을 연 아모레퍼시픽의 스파. 서구의 기술과 한방화장품을 이용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최근 아모레퍼시픽, 코리아나, LG 등 국내 3대 화장품업체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품목이 ‘프리스티지’ 라인인 한방화장품이다.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는 2000년 출시 이래 매년 100% 넘는 성장률을 보이며 연매출 2000억원을 넘어섰다. 코리아나는 올해 9월 기능성 한방화장품 ‘자인’을 내놓고 추격을 시작했다. 두 업체의 마케팅 담당자들은 모두 “품질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다만 ‘샤넬’ 혹은 ‘랑콤’이 가진 이미지가 없을 뿐”이라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두 업체 모두 한방화장품에 ‘명품’의 이미지를 더하기 위해 독특한 고급화 전략을 마련했다. ‘설화수’는 자기 힘으로 성공한 여성들을 모아 ‘설화클럽’을 만들어 오피니언 리더 사이에서 입소문을 내고 있으며 ‘자인’은 최근 압구정동에 ‘스페이스 씨’라는 문화공간을 오픈했다.

특히 아모레퍼시픽은 9월 뉴욕에 한국적 인테리어와 한방화장품을 이용해 작지만 호사스런 스파를 냈다. 이해선 전무는 “한방 하면 중국이지만, 중국은 ‘싸구려’란 인식이 있어 고급 소비자들에겐 해외에서도 한국이 경쟁력이 있다”고 말한다.

전통적 미감을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고 믿는 것 역시 명품의 판타지와 다르지 않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의 욕망을 자극하지 못하고, 팔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화석일 뿐, 더 이상 전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간동아 414호 (p8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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