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8

2003.11.06

보드카, 그 이름 영혼까지 ‘카~’

러시아 국민주 보드카 탄생 500주년 … 알코올 40%가 기본, 유명한 제품 외국산 득세

  • 모스크바=김기현 동아일보 특파원 kimkihy@donga.com

    입력2003-10-29 17: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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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드카, 그 이름 영혼까지 ‘카~’

    대표적인 러시아 보드카로 손꼽히는 ‘스톨리치나야’. ‘스톨리치나야’는 러시아어로 ‘수도’라는 뜻이다.

    ‘러시아에서 보드카는 민족이념이나 다름없다. 많은 지지자와 반대자가 있다.’

    러시아 속담이다. 이처럼 대단한 술 보드카가 올해로 탄생 500주년을 맞았다. 그 기원을 놓고 약간의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보드카’라는 이름의 술이 러시아 수도원에서 제조되기 시작하고 문헌에 등장한 기원을 대개 1503년으로 본다.

    보드카라는 말은 러시아어의 ‘물(바다)’에서 나왔다. ‘~카’라는 말이 붙으면 대개 애칭으로 쓰인다. 그렇다면 보드카는 ‘사랑스런 물’이라고 풀이해야 할까? 실제로 보드카는 물처럼 투명하다. 검은 보드카도 있고 레몬이나 고추 향을 내는 보드카도 등장했지만 원래 보드카의 특징은 무색, 무취, 무미다.

    보드카는 독한 술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에는 이런 속담도 있다. ‘러시아에서 4000km는 거리도 아니고(그만큼 가깝다는 뜻), 영하 40도는 추위도 아니고, 40도 이하는 술도 아니다.’

    보드카의 알코올 성분은 대개 40%다. 물론 더 독한 보드카도 있다. 러시아 가게에서 98도짜리 보드카를 본 적이 있다. 술이라기보다는 알코올 원액에 가까운 액체다. 급하면 휘발유 대신 자동차에 연료로 넣어도 되겠다고 농담을 했을 정도다. 그런데 얼마 후 한 러시아 배우가 이 술을 스트레이트로, 그것도 단숨에 입 안에 털어넣는 장면을 봤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보드카는 증류주 중 하나다. 원료는 밀 보리 호밀 등이지만 요즈음에는 감자나 옥수수를 주로 쓴다고 한다. 원료를 찌고 엿기름과 효모를 섞어서 발효시킨다. 이렇게 만든 원액을 물로 희석해 자작나무 숯으로 만든 활성탄으로 여과해 정제한다. 활성탄은 잡다한 맛과 냄새, 나쁜 성분을 제거해 물처럼 깨끗한 보드카를 탄생시킨다. 여과하는 횟수가 많을수록 좋은 보드카가 된다.

    돌가루키·루스키 스탄다르트 인기

    보드카는 러시아에서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드카는 모두 러시아 이외의 나라에서 만들어진다. ‘스미르노프’는 미국제고 ‘압술루트’는 스웨덴, ‘핀란디아’는 핀란드 보드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많은 러시아인들이 국외로 망명하면서 보드카 제조법도 서방으로 유출됐다. 스미르노프는 원래 러시아의 유명한 양조장 가문이었다. 혁명 후 미국으로 망명한 후손들이 상표를 등록하고 제조하기 시작해 세계 보드카 시장을 석권한 것.

    보드카, 그 이름 영혼까지 ‘카~’

    20세기 초 보드카를 마시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러시아인들. 핀란드산 보드카인 ‘핀란디아’. 구 소련 정부는 술 취한 사람을 돼지에 비유하는 금주 포스터를 만들기도 했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소련 해체 후 러시아에 남아 있던 스미르노프 집안 사람들도 다시 보드카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제 스미르노프와 ‘원조’ 자리를 놓고 다툼이 일어났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는 냉정한 법. 미제 스미르노프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현재 러시아산 스미르노프는 러시아에서만 팔린다.

    러시아처럼 추운 북유럽의 스웨덴, 핀란드와 동유럽의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에서는 19세기부터 나름대로 훌륭한 보드카가 만들어져왔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는 ‘네미로프’가 있고 폴란드에는 ‘발틱’과 ‘쇼팽’이 있다. 또 카프카스나 시베리아 등 러시아 각지를 여행하다 보면 각 지방의 유명한 보드카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러시아 보드카는 뭘까? 구 소련 시절 러시아 보드카의 대명사는 ‘스톨리치나야’. 러시아어로 ‘수도(capital)’라는 뜻인데 모스크바에 있는 크리스털 보드카 공장에서 생산된다. 이 공장에서는 1997년 모스크바 창건 850주년을 맞아 도시를 세운 사람의 이름을 따 ‘유리 돌가루키’라는 보드카를 만들었다. 이 술은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좋은 보드카 중 하나로 꼽힌다. 러시아 내에서는 0.7ℓ짜리 한 병이 20달러 정도 한다. 역시 보드카는 비싼 술은 아닌 것이다.

    러시아를 다녀갈 때는 돌가루키나 루스키 스탄다르트(‘Russian Standard’라는 뜻)를 한 병쯤 기념으로 사면 무난하다. 물론 호화로운 장식의 유리병이나 그젤(러시아식 자기)에 담긴 고급 보드카도 있다.

    러시아 하면 보드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보드카가 러시아인들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보드카가 없었다면 러시아인들은 지금과는 아예 다른 족속이 됐을 것이고 러시아도 다른 나라가 됐을 거라는 주장까지 있다.

    보드카, 그 이름 영혼까지 ‘카~’

    러시아의 보드카 공장 내부.

    러시아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할 때면 하객들은 보드카를 가득 채운 잔을 들고 ‘고리카’라고 외친다. ‘쓰다’는 뜻이다. 무미한 보드카는 언뜻 쓴맛이 느껴진다. 하객들의 성화에 신랑과 신부는 ‘달콤한’ 키스를 한다.

    하객들은 차례로 일어나 신랑 신부한테 축복의 말을 하고 그때마다 보드카를 한 잔씩 비운다. 물론 ‘다 드냐’가 기본이다. ‘술잔 바닥까지 비우라’는 뜻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원샷’이다. 50명의 하객이 한 마디씩 한다면 50잔의 보드카를 마셔야 하는 것이다. 멋모르고 참석했던 외국인들은 인사불성이 되기 십상이다. 도저히 못 마시겠다고 거절하면 “신랑 신부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 것이냐”는 질책이 돌아오는 통에 빠져나갈 길이 없다. 이렇게 ‘무섭게’ 마셔대니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은 아프리카의 빈국 수준인 60세를 넘지 못한다.

    러시아인들이 술을 많이 마신 역사는 오래됐다. 옛날 한 성주는 백성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성문 앞에 술통을 두고 누구든지 자유롭게 보드카를 마시도록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낮부터 취했고 겨울에는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동사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는 과연 백성을 사랑했던 것일까? 아직도 논쟁거리다.

    보드카는 몽고의 지배와 농노제로 대표되는 전제주의, 숱한 침략과 혁명, 사회주의 체제로 이어지는 숨막히는 역사 속에서 러시아인을 위로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무시무시한 전제정치와 이념, 비밀경찰도 보드카를 이기지는 못했다. 구 소련 당국은 기회 있을 때마다 금주령과 보드카 배급제 등으로 ‘인민들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사회기풍을 무너뜨리는’ 보드카를 탄압했다. 구 소련 말기에는 경제난으로 보드카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당시의 영향으로 요새도 러시아 식당에서는 보드카를 100g씩만 주문할 수 있다. 구 소련 시절에는 보드카 한 병 살 돈도 없는 사람들이 길에서 우연히 만나 의기투합해 돈을 모아 한 병을 사서 사이좋게 나눠 마시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러시아의 술 풍속도 변하고 있다. 시장경제가 정착되면서 치열한 경쟁이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젊은이들은 보드카보다는 맥주를 선호한다.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볼 때까지 마시는 러시아식 음주습관도 점차 보기 어려워졌다. 지난해부터 러시아에서도 보드카 소비 증가율이 주춤한 대신 맥주 소비가 늘고 있다. 러시아인의 오랜 음주습관까지 바꾸는 것을 보면 자본주의는 확실히 사회주의보다 강하다.

    한국에서는 보드카를 스트레이트로 마시기보다는 ‘러시안 룰렛’ 등 칵테일로 만들어 마시는 경우가 많다. 아직 본격적으로 보드카를 맛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내년부터 한국에서도 스미르노프가 생산될 예정이다. 동남아 시장을 겨냥해 공장을 세운다고 하지만 국내에도 보드카 공급이 늘어날 것이 틀림없다. 러시아인 못지않게 술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보드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고 볼 일이다. 참고로 세계 증류주 시장에서 부동의 1위는 소주, 그 다음이 보드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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