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8

2003.11.06

‘호주제 폐지’ 본 게임은 이제부터

‘가족의 범위’ 조항 유지 후 민법 개정 유력 … 국회 통과 노력·대안 마련 본격 논의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3-10-29 17: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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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제 폐지’ 본 게임은 이제부터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 개정안의 국무회의 통과가 사실상 결정된 후 ‘포스트 호주제’ 논의가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정기국회 회기 내 국회 통과와 개인별 신분등록제 정착을 위한 싸움을 시작할 때다.”

    정부가 10월24일 관계장관 회의를 통해 호주제 폐지를 ‘사실상’ 결정하면서 여성계의 호주제 폐지 운동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민법 개정안은 10월22일 국무회의에 상정됐으나 ‘가족의 범위’ 규정 삭제에 대한 국무위원 간의 논란으로 통과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다시 열린 24일 회의에서 관계부처 장관들은 “호주제 폐지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민법 779조 ‘가족의 범위’ 규정을 삭제하는 것은 일반 국민의 법감정에 맞지 않는다”며 삭제 대상이었던 이 조항은 유지한 채 호주제를 폐지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에 따라 여성계도 본격적으로 ‘포스트 호주제’ 논의에 들어갔다.

    눈에 띄는 것은 운동 단체들의 활동 변화상. 1999년 1월부터 거리 서명을 받으며 호주제 폐지 여론 형성에 앞장섰던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이하 호폐모)은 10월을 끝으로 서명운동을 중단한다. 대신 ‘민법 개정안 국회 통과를 위한 272인 서포터스’(이하 ‘272인 서포터스’) 운동에 주력하면서 호적을 대신할 만한 신분 등록 방법을 연구하는 스터디 모임을 꾸릴 계획이다.

    호폐모의 고은광순 대표는 “운동 초기에는 호주제 폐지의 당위성을 알리고 세를 모으는 게 중요했지만 이제는 국민들 사이에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됐다고 본다”며 “국회 통과를 위해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한 운동을 펼치는 것과 호주제 폐지 후의 대안 마련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호주제 폐지 운동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들이 민법 개정에 소극적 입장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를 막기 위해 구성된 ‘272인 서포터스’ 운동은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는 각계 인사 272명이 국회의원 272명을 상대로 1대 1 설득 작업을 벌이는 활동이다. 시인 고은, 배우 권해효, 개그우먼 김미화씨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최병모 회장, 아름다운 재단 박원순 상임이사 등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인권 극대화 다양한 토론회 준비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원 전담 서포터스인 한의사 이유명호씨는 “사석에서 만난 한 중견 정치인이 ‘우리 아이가 이혼하고 나서 왜 호주제가 폐지돼야 하는지 깨달았지만,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적극적으로 폐지운동에 동참하는 것은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고 말하더라”며 “이런 이들을 열심히 설득해 ‘호주제 폐지 운동가’로 만드는 것이 이 운동의 목표”라고 말했다.

    한편 호주제 폐지운동에 앞장섰던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 개혁국민정당여성위원회, 한국여성의전화연합, 민주노총여성위원회 등은 ‘개인별 신분 등기 실현을 위한 공동연대’를 구성하고 11월 중 관련 토론회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

    법무부의 민법 개정안은 호주의 개념을 없애고 이혼 또는 재혼 가정의 자녀들이 성을 바꿀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호주제 폐지 이후 가족 단위 신분등록제를 대신할 방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 부분은 대법원이 관장하는 호적법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이유로 논의를 유보해놓은 상태.

    이에 대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이구경숙 정책부장은 “지금까지는 호주제 폐지 자체에 대한 논란이 많았기 때문에 대안까지 이야기해 유림의 반발을 키울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며 “그러나 대안 없이 호주제를 폐지할 경우 이후 상황에 대한 책임을 폐지 운동가들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는 점에서 이제는 본격적으로 이후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호주제 폐지 활동가들의 목표는 호주제 폐지라는 기본 전제 아래서 이후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는 ‘가족별 호적 편제’와 ‘개인별 신분등록제’에 대한 국민적 토론을 벌이는 것. 또 이를 계기로 1인 가족, 동성애 가족, 한 부모 가족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 임은경 차장은 “인간의 존엄성과 양성 평등, 사생활 보호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는 신분등록제를 마련하려면 호주제 폐지 여부에 대한 것보다 더 치밀하고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다”며 “이제 호주제 폐지운동은 개인의 인권을 극대화하는 신분등록제도를 고민하는 ‘2라운드’로 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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