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8

2003.11.06

모 아니면 도 ‘비자금 혈투’ 끝장 본다

노대통령 정치개혁 앞세워 “흔들림 없이 GO!” … 궁지 몰린 한나라당 ‘죽기 아니면 살기’ 역공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3-10-29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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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 아니면 도 ‘비자금 혈투’  끝장 본다

    노무현 대통령(오른쪽)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10월26일 오후 청와대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딜‘은 결국 실패했다. 10월26일 노무현 대통령과의 회동을 마친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의 표정은 감정이 폭발했을 때 볼 수 있는 ‘뚱한’ 표정이었다. 최대표는 노대통령과의 회동에서 SK 비자금 전면 특검 카드를 내밀었다. 정치적 해법이 아닌 정공법을 택한 것이다. 노대통령이 듣기 민망한 하야와 탄핵이란 말까지 한 것은 상처난 자존심과 극도로 혼란스러운 당을 추스르기 위한 고육책으로 볼 수 있다.

    노대통령도 물러서지 않았다. “검찰이 잘하고 있다”며 최대표의 예봉을 피했다. 양측은 줄곧 엇박자로 평행선을 달렸고, 끝내 합의점 도출에 실패했다. 이날 최대표를 수행했던 한 참모는 “노대통령을 만나고 보니 갑작스레 전개된 비자금 정국의 진원지가 보였다. 매우 정교하게 짜여진 시나리오에 따라 정국이 흘러가고 있고 한나라당은 생각 없이 가다가 덫에 빠졌다”고 말했다. 그는 회동 이후 정국을 ‘To be or not to be’로 규정했다. 전면전으로 갈 수밖에 없음을 강하게 암시한 말이다.

    그의 분석대로 SK 비자금 정국은 제동장치가 없어 보인다. 오직 ‘강(强)대 강(强)’의 첨예한 대립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정국 기상도는 칼자루를 쥔 검찰의 의지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게 돼 있고 정치권은 검찰의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형국이다.

    검찰은 노대통령과 최대표 회동 다음날 이재현 전 한나라당 재정국장을 소환했다. 당시 당 자금 출납 실무를 맡았던 이 전 국장은 대선자금 문제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1차 연결고리. 따라서 그의 소환은 검찰이 100억원의 불법자금 모금 배후에 대한 수사에 본격적으로 들어갔음을 뜻하고 대선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에 대한 소환조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다.

    모 아니면 도 ‘비자금 혈투’  끝장 본다

    SK 비자금 사건과 관련, 최도술 전 대통령 총무비서관이 10월15일 밤 구속수감되기 위해 대검청사를 나서고 있다.

    검찰의 기민한 움직임은 곧바로 한나라당에 위기감을 불러왔다. 최대표는 10월25일 비상체제 구축을 선언했다. 전면적인 당직개편이 신호탄이다. 이재오 홍준표 김문수 의원 등 재선 트리오 강경파의 전진배치는 한나라당의 지향점이 전면투쟁임을 말해준다. 김영일 전 사무총장과 최대표가 고개 숙여 대(對)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한 것은 출사표의 성격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강 대 강’ 첨예한 대립 … 검찰 칼날 예의 주시

    한나라당의 역공은 노대통령의 대선자금과 양길승, 최도술씨 등 측근들의 비리와 관련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노대통령의 대선자금, 최도술씨와 부산 상공인들의 부적절한 거래, 양길승 파문 뒤에 묻힌 이원호 커넥션 등 하나같이 뉴스 밸류가 높은 사안들이다. 그러나 들고 있는 ‘파일’이 너무 작아 보인다. 한나라당은 몇 차례 국회 대정부 질문을 통해 이들을 저격하려 했다. 그러나 번번이 불발탄으로 끝났다. 정세분석을 담당하는 한 관계자는 “정보 부재가 심각하다”고 털어놓았다. 대선 이후 느슨해진 당 조직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정보 부족은 전략 부재를 불러오고 이는 당의 혼란을 부채질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재신임 정국 이후 최대표는 몇 차례 헛발질을 했다. 당 일각에서는 “박희태 전 대표보다 못한…”이라는 지적이 봇물처럼 터져나온다. 당의 한 인사는 “노대통령이 SK 비자금을 빌미로 정치권을 해체하려 하는데 우리는 재신임 타령만 하고 있었다”며 당 지도부의 정보 및 전략 부재를 힐난했다. 그는 “SK 비자금 사건이 터진 지 이미 한 달이 넘었는데 당은 아직 실체도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모두가 자기 살 길만 찾고 있다는 비난이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것이 최대표의 때 이른 과욕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노대통령이 국민투표에서 불신임받을 경우를 가정해 최대표가 이성보다 감정에 치우친 전략을 구사했다는 것. 최대표측은 억측이라고 하지만 전형적인 적전 분열 양상임이 분명해 보인다.

    모 아니면 도 ‘비자금 혈투’  끝장 본다

    손길승 SK 회장(맨 왼쪽)이 10월2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 출두하고 있다.10월23일 당무회의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병렬 대표(가운데).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이 10월24일 당 의원총회를 마친 뒤 SK 비자금 사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뿌리치며 국회를 빠져나가고 있다.

    소장파는 이런 당 지도부의 처사를 놓고 ‘고해성사론’으로 몰아붙이고, 당 중진들은 ‘옥쇄론’이란 상반된 해법을 내놓고 있다. 고해성사론의 배경에는 물갈이와 세대교체라는 노림수가 숨어 있고, 옥쇄론은 기득권 유지의 다른 표현이다. 비자금 정국의 향방에 따라 이런 분란은 당의 와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경고음이 잇따라 당 지도부에 전달됐지만 이렇다 할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

    최대표는 “잘 알지 못하지만…”이라며 책임을 전임 집행부에 떠넘기는 모습을 수시로 보여준다.

    SK라는 십자가를 최돈웅 의원에게 떠넘긴 것을 문제삼는 사람들도 많다. 최의원이 몇 차례 당에 성의 있는 대책을 요구했지만, 당은 ‘강 건너 불 구경’하는 식이었다. 비빌 언덕이 없던 최의원은 결국 검찰에 ‘올인식’ 고백을 했다. 최의원은 검찰에 출두하면서 당 지도부에 보고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최의원의 고백이 부메랑이 돼 한나라당을 덮치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최의원의 한 측근은 “몇 차례나 대책 논의를 요청했지만 누구 하나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막판에는 ‘꼬리 자르기’란 말까지 나오더라. 최의원이 화가 난 것도 바로 이런 표현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의 혼란보다 심각한 문제는 SK 비자금 태풍의 진로와 강도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검찰은 최의원 진술을 바탕으로 이제 대선을 지휘했던 한나라당 핵심간부들을 향해 칼끝을 겨눈다. 최의원이 지난해 대선 때 당 재정위원장을 맡고 있던 점에 비추어 그 윗선이 주된 타깃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총장과 서청원 전 대표 등은 계선상 수사 선상에 오를 수 있다. 김 전 총장, 최돈웅 전 재정위원장, 재정국 실무자로 이어지는 이른바 SK 비자금 라인 외에 다른 고위 당직자 및 중진의원을 정점으로 하는 또 다른 비자금 라인이 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 과정에 지난해 대선 패배 이후 만들어진 ‘함덕회’ 얘기가 묻어 나온다. 함덕회에는 최의원을 비롯한 이회창 전 총재의 핵심측근 8명이 회원으로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이 전 총재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이런 친분 때문에 대선자금 모금 및 독려반으로 투입됐을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 김 전 총장은 최의원이 SK 비자금을 수수한 데 대해 “이 전 총재와의 돈독한 우정 때문일 것”이라며 인간적 관계를 유난히 강조해왔다. 검찰 주변에서는 이미 이 전 총재의 사전 또는 사후 모금 관련 인지설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검찰은 “두고 보자”며 아직 계획이 없음을 강조하지만 상황에 따라 이 전 총재 역시 수사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상자기사 참조). 이 전 총재는 최근 측근들과 이 문제를 집중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총재 자택을 방문했던 당의 한 인사는 “이 전 총재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 아니냐”며 “정치도의적 책임에 국한할지, 아니면 법적인 문제로까지 비화할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이 전 총재는 SK 비자금 수사와 관련해 측근들이 대거 검찰에 소환된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한나라당은 검찰의 계좌추적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검찰이 전방위 계좌추적에 나설 경우 SK 비자금을 능가하는 대형폭탄들이 줄줄이 터질 것을 우려한 것. 최대표가 10월23일 송광수 검찰총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항의할 만큼 검찰의 계좌추적은 폭발력이 큰 사안이다. 검찰은 바로 그날 “필요할 때 제한적으로 계좌추적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 열어놓았다. 최의원의 혐의가 드러난 이후 줄곧 대선자금 추적 가능성을 부정하던 입장에서 180도 선회한 것이다. 검찰은 26일을 계기로 수사 수위를 더욱 상향 조정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의혹이 있으면 깔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돈다. 그러면서도 그 대상이 누구인지, 그 시기가 언제일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특검 도입을 주장한 한나라당에 대한 역(逆)모션인 셈이다.

    한나라당은 이런 검찰과 청와대에 ‘특검’으로 맞서고 있다. 한나라당은 여야 대선자금 전반에 대한 특검법안을 국회에 제출키로 했다. 한나라당은 특검에 목을 매는 이유로 “검찰의 ‘편파수사’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분일 뿐 실제로는 검찰의 SK 비자금 수사를 중단하려는 의도가 더 강하다. 이런 식으로 검찰 수사가 전개될 경우 당의 존립기반이 무너질 뿐 아니라 내년 총선도 최악의 상황에서 치러야 한다.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한나라당은 ‘강 대 강’ 정국의 활로를 힘의 논리에서 찾는 듯하다. 특검법안은 국회의원 과반 출석에 과반 찬성의 조건이 갖춰지면 통과된다. 현실적으로 한나라당 단독으로도 통과가 가능하다. 만약 특검법안이 통과될 경우 SK 비자금 정국은 또 다른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한나라당은 일정 시간을 벌고 노대통령과 측근 비리를 동시에 ‘평가’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특검이 자충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 경우 한나라당의 상처는 더 깊고 커질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도 이 점을 인정한다. 한 관계자는 “대선자금과 관련한 지뢰밭은 당 주변에 수두룩하다. 특검 수사가 이 지뢰밭을 다 뒤진다고 해도 노대통령과 측근들 비리가 같이 공개되면 그 길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나라당의 특검 도입 주장은 노대통령의 재신임 문제와도 연계된다. 표류 중인 노대통령 재신임 문제는 SK 비자금 수사와 관련한 방향 설정 이후로 밀려났지만 전격적으로 실시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최악의 상황에 몰린 한나라당이 재신임 카드를 국면 전환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SK 비자금으로 쑥대밭이 된 한나라당이 특검을 도입해 파헤친 노대통령과 측근들의 비리를 한데 묶어 국민투표로 심판받는 것이 결코 불리하지 않다”고 말한다. 노대통령의 위기 돌파 카드가 한나라당의 국면 전환에 활용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최대표가 말한 ‘선(先)측근비리 규명, 후(後)재신임 국민투표’ 입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대통령은 최대표의 이런 제안에 대해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없다. 최대표가 하야와 탄핵을 입에 담자 “가정을 전제로 말하지 말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청와대 비서진 교체도 재신임 이후로 연기했다. 최근 정국과 관련해 한나라당이 ‘야당 말살 전략’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지만 “기획된 것은 없다”며 특유의 표정을 짓는 사람이 노대통령이다. 노대통령의 이런 뚝심은 열린우리당의 자산으로 활용되고 있다. 바닥을 헤매던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이제 민주당을 넘어 한나라당을 위협하고 있다. 노대통령은 이런 흐름을 타고 계속 정치개혁을 주창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노대통령의 전략에 말려들었다”고 자탄하는 이유다. 재신임 정국 이후 정치 주도권을 거머쥔 노대통령의 거침없는 행보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한나라당의 궁색한 처지가 결국 파열음을 내며 맞부딪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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