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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화나셨나요?”

“으아~ 미치겠네” … 분노의 휴화산

억울함과 응어리 많은 한국인 4.2% 화병 환자 … 급격한 사회변화 10, 20대도 부쩍 늘어

  •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으아~ 미치겠네” … 분노의 휴화산

“으아~ 미치겠네” …  분노의 휴화산
2월19일 오전 10시5분께 서울시청 앞을 달리던 택시운전사 조모씨(35)는 “지하철공사 직원의 평균 임금이 택시운전사의 3배에 이른다”는 라디오 뉴스를 듣자마자 욕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람 죽인 ×들이 나보다 3배나 더 받는다고? 똑같이 ‘핸들밥’ 먹으면서 어떤 ×는 수백만원 벌고, 어떤 ×는 사납금 9만원 채우느라 밥도 못 먹고 일하고….” 흥분한 조씨는 실수로 앞차와 충돌하는 접촉사고까지 일으켰다. 사고를 수습한 뒤 다시 핸들을 잡은 조씨는 서울시청을 향해 또다시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7년이나 무사고로 회사차를 몰았는데, 개인택시는 왜 안 내줘. 돈 없고 백 없는 놈은 평생 가난하게 살라 이거지.”

비슷한 시각, 을지로 지하상가에선 상인들의 규탄대회가 열렸다. 지하상가 관련 조례 개정을 막기 위한 상인들의 모임이었다. 상인 김모씨(44)는 “요즘 늘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다. 서울시가 지하상가의 임대료를 300% 이상 올릴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뒤로 밥맛이 뚝 떨어져 몸무게가 5kg이나 줄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서울시장이 TV에 나올 때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콱 막히고 흥분된다”면서 “서민대통령 시대인데 서울시는 서민들의 장사 터전을 빼앗고 있다”고 분노했다. 김씨는 자신이 화병에 걸린 것 같다고 스스로 진단하기도 했다.

요즘 우리 사회엔 화난 사람들이 참 많다. 서울시내에선 매일 200건에 이르는 집회와 시위가 열린다. 공장 정상화를 위한 결의대회, 생존권 사수대회, 복직요구 집회, 매각 저지 집회, 부당해고 규탄대회, 학원정상화 결의대회 등등. 분노한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억울함과 응어리를 쏟아내지만 좀처럼 자신의 화를 다스리지 못한다.

한 대학병원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일반인의 4.2%가 화병(뒤쪽 상자기사 참조)을 앓고 있다. 전통적으로 화병은 사회적 약자인 중년의 주부들에게 많이 나타났지만, 요즘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 추세라는 게 화병전문가들의 말이다. 이는 1990년대 후반에 겪은 IMF 관리체제라는 사회적 시련과도 무관치 않다. 그간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던 남성들이 IMF 관리체제 이후 경제적 주도권을 놓치면서 ‘고개 숙인 남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른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최근의 또 다른 추세는 화병 환자의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는 점. 20대 후반의 직장인 부부, 심지어 10대의 청소년들도 화병클리닉을 찾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김진세 고려제일신경정신과 원장은 “젊은이들이 사회변화에 맞추지 못하고 위축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경제난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 생활고, 가정불화, 가족간 대화의 부재 등도 성별과 연령을 가리지 않고 화병을 확산시키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만의 독특한 질병으로 지목되는 화병은 우리 사회 곳곳의 병리적 현상에서 비롯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한국 사회의 지나친 체면의식, 학연·지연에 매인 패거리문화, 부정부패, 빈부갈등, 정치적 패배 등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화병이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최상진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인들은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이 많은 편이라 내가 약해서 당했다, 권력이 없어서 당했다, 돈이 없어서 당했다는 생각이 들면 화를 이겨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탈영실정(脫營失精)’이라 하여, 자신이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에 대해 일차적으로 저항과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고 급기야 면역기능의 저하로 몸이 쇠약해지는 증상으로도 풀이한다.

특히 이런 증상은 정치인, 검찰 같은 권력층이나 특권층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또 다른 그림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가

명문대를 졸업하고 정부기관에서 일하다 1999년 한나라당에 입당한 K씨(41). 지난 4년 동안 부모로부터 생활비를 타 집안살림을 꾸리면서 ‘정치판’ 생활을 해온 K씨는 “대통령선거가 끝나면 편히 모시겠다”며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시했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런데 최근 K씨는 “아버님 건강이 안 좋다”는 가족의 연락을 받고 땅을 쳤다. 평소 가벼운 당뇨증세가 있을 뿐 건강에 문제가 없던 아버지의 발병이 선거 패배가 가져온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당직자 A씨 역시 비슷한 경우. A씨는 부인의 병간호를 하느라 속이 타 들어갈 정도라고 하소연한다. A씨의 부인은 남편의 얇은 월급봉투 탓에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대선 이후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로 살아왔고, A씨도 “선거에서 이기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부인을 위로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하자 이 당직자의 부인은 머리를 싸매고 누웠고 병세가 악화돼 주변에선 A씨마저 건강이 나빠질까 걱정하고 있다. 대선 패배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19일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묘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전국구 출신의 황승민 의원이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는가 하면 당 사무처 직원 등 당 관계자들 주위에 줄초상이 난 것. 부모 세대가 사망한 인사들만 10여명이 넘는다. 지병으로 인한 사망도 있지만, 선거에서 패한 자식의 아픔과 고통이 사망의 한 요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게 당 관계자의 귀띔이다. 한나라당에서 부고를 접수하는 일을 하고 있는 한 당직자는 “젊은 우리도 정신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지는데 자식들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던 부모들의 실망과 좌절이야 오죽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한국의 대통령선거는 ‘죽기 아니면 살기(all or nothing)’ 게임이다. 이긴 쪽은 모든 것을 갖는다. 반면 진 쪽은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대통령제가 갖는 이런 한계로 인해 선거는 격렬해질 수밖에 없고 진 쪽은 그만큼 충격이 크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화병은 당직자는 물론 사무처 요원, 심지어 부모세대들도 피해갈 수 없을 정도로 전방위로 퍼졌다”고 말했다. 대선 패배 이후 이처럼 온갖 악재가 끊이지 않다 보니 한나라당 일각에선 “용한 무당 불러 푸닥거리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법조계

최근 노무현 정부의 검찰인사로 인해 시끌벅적한 검찰조직 내에도 분을 삭이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화가 도진 검찰 간부들이 많다 보니 서초동 법원 인근의 술집들은 요즘 같은 불황기에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을 정도다. 검찰인사에 대한 화풀이성 술자리로 폭탄주가 연일 테이블을 적시고 있다는 전언. 한 검사장은 한직에 내정된 사실을 미리 알고 후배 검사들을 불러모아 술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검사장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분노를 표출했지만, 다음날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선 미소를 지으며 “좀 섭섭하다”고 말할 정도로 화가 누그러졌다. 또 다른 검사장은 “힘든 자리에 발령을 받아도 자청해서 근무를 하겠다”고 섭섭한 감정을 표출하며 폭탄주를 거푸 들이켰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술을 마시는 것도 화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법조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기공명상을 가르치는 염정숙씨(단월드 지도사범)는 “검찰인사 파동을 거치면서 검사들의 수련 열기가 뚝 떨어지고 술로 해결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면서 “보수적 성향의 검사들이 외부의 충격으로 전해지는 변화의 바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염씨는 또 검찰의 반발 기류에 대해 “검찰 조직처럼 자기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그것을 수용하거나 인정하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에 오히려 외면의 자기 보호의식이 강하게 발동하기도 한다”고 풀이했다.

권력을 누리던 정치인이나 부를 향유하던 경제인들이 나락으로 떨어질 경우 그 충격은 일반인에 비해 훨씬 크다고 한다. 높이 날면 날수록 추락으로 인한 충격이 클 수밖에 없는 법.

그래서 유명인사들이 추락해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화병을 얻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화장실(좌변기)과 세면대, 그리고 잠자리 및 식당 기능이 공존하는 2.17평짜리 독방을 권세가들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권노갑 민주당 전 고문이 대표적인 케이스.

수감 초기 권씨는 분을 이기지 못해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아 얼굴이 시커멓게 타 들어갔고 억울함 때문에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권력의 2인자가 하루아침에 죄인으로 전락한 신분의 변화가 권 전 고문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셈. 억울함과 분노는 그대로 화병으로 이어졌다. 노관규 변호사에 따르면 권 전 고문은 면회 온 사람들에게 “내가 왜 이렇게 됐느냐. 화병으로 죽을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화병에 시달리던 권 전 고문이 안정을 찾는 데 도움이 된 것은 국회의원들이 하루 15분씩 할 수 있는 특별면회. 동교동계 의원들의 대다수가 특별면회 형태로 권씨의 면회를 다녀왔다고 한다. 면회객들이 “사실이 아니니 재판에서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라고 거듭 희망을 주자 권 전 고문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고 한다.

면회는 수감자들의 화병을 다스리는 데 보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1993년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김승연 한화 회장은 처음에는 수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상당히 괴로워했다고 회사 관계자는 전했다. 그러나 점차 안정을 되찾아 임원들에게 면회 오지 말라고 말할 정도가 됐고, 당연히 김회장은 임원들로부터 인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1999년 세금포탈 혐의로 구속됐던 J회장은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해 끝까지 회사 관계자들의 인심을 얻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책으로 화를 달래는 경우도 있다. 권 전 고문이 심리적 안정을 찾는 데는 특별면회와 함께 책도 한몫했다. 측근들이 “건강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며 책을 넣어줬는데, 수차례 숙청과 복권을 거듭한 덩샤오핑의 전기에서 권 전 고문은 희망을 찾았다는 것.

수감 초기 수시로 고문변호사를 불러 어려움을 토로해 주변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홍걸씨 역시 찬송가가 합본된 성경과 독서로 심신을 달랬다.

2월22일 배임혐의 등으로 구속돼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최태원 SK㈜ 회장도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감생활은 아니지만 해외에서 3년 넘게 유형생활을 하는 김우중 전 대우회장 역시 한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화병으로 죽을 것 같았다. 73kg이던 몸무게가 63kg으로 줄었으며 바지도 29인치짜리를 입고 있다”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한국정부를 원망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지금은 차 향을 맡으면 원망도 울화도 없다”고 나름의 비법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있음을 밝혔다.

화풀이성 범죄들

화병은 그대로 두면 분노가 폭발해 또 다른 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른바 ‘화풀이성 범죄’가 그것이다.

최근 서울시내 CGV 극장에 폭발물을 설치했다며 일곱 차례 협박전화를 하고 영화제작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에 소포로 폭발물을 보낸 박모씨의 경우는 대표적인 분풀이 범죄. 박씨는 군·경찰용품을 파는 인터넷 쇼핑몰 사업을 하다 실패해 카드와 사채 빚 8000만원을 지게 되자 CGV 극장 등을 상대로 범행을 계획했다고 한다.

지난 1월 부산 당감3동 백양터널 부근에서 지나가던 차량을 향해 잇따라 총격을 가한 사건도 선량한 시민을 노린 끔찍한 화풀이성 범죄로 드러나고 있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 자신의 불행을 사회 탓으로 돌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하는 ‘화풀이성 방화사건’이 매년 30%씩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1년 발생한 2709건의 방화사건을 원인별로 분석해본 결과 불만해소가 254건으로 가정불화(280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2000년에도 불만해소성 방화사건이 406건에 이르렀다. 1999년의 101건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수치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화풀이 방화가 증가하는 이유를 물질만능주의 사회가 고착화되면서 ‘사회 주변부’에 위치한 사람들의 소외감이 커졌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경찰대 표창원 교수는 “실직이나 사업실패 등의 원인을 외부로 확장하면서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아무튼 화를 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 사회가 그만큼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은데 터놓고 풀 공간은 없는 ‘막힌 사회’라는 징표다. 새 정부 들어서 막힌 사회를 열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 검찰개혁, 경제개혁, 관료개혁 등이 그것. 그러나 이 와중에 기득권을 옹호하려는 이들은 또 다른 종류의 화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다가오는 이라크전쟁, 대구지하철 참사, 정치파행, 검찰개혁에 반발하는 사람들, 기업들의 분식회계, 경기침체, 국가신용도 하락…. 이런 일들 모두가 사람들을 우울하게 한다. 그리고 분노하게 한다. 화를 다스리는 일이 이 봄날의 화두가 되고 있다.







주간동아 377호 (p18~21)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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