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5

2003.03.13

날 세운 검찰 ‘분식회계 습격사건’

SK·한화 등 줄줄이 수사 대기중 … 다른 재벌들도 회계장부 살피며 숨죽인 나날

  • 이명재/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mjlee@donga.com

    입력2003-03-06 13: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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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세운 검찰 ‘분식회계 습격사건’

    SK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부당내부거래에서 분식회계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재계 전체가 긴장하고 있다.

    ‘재벌 압박, 이번엔 분식회계인가’. SK그룹에 대한 검찰 수사로 재벌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분식회계 수사’가 새로운 ‘칼날’이 되고 있다. 검찰이 SK글로벌의 압수 장부에서 상당한 액수의 분식회계 혐의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SK에 대한 수사가 대주주의 부당내부거래에서 분식회계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것.

    검찰이 SK에 이어 수사하겠다고 밝힌 한화도 참여연대로부터 분식회계 혐의로 고발당해 사실상 이 부분이 수사의 핵심이다. 현재로선 한화의 경우는 SK와는 다르게 처리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한화측은 검찰이 수사에 나서자마자 적극적으로 해명에 나섰다. 참여연대가 문제 삼고 있는 ‘대한생명 인수용 분식회계’ 부분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검찰측에서도 이에 대해서는 “SK와는 다르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져 한화는 다소 안도하는 분위기다.

    회계 투명성 확보는 재벌개혁 연장선?

    그러나 이미 사실상 총수인 최태원 회장이 구속당한 SK는 사정이 절박해졌다. 최회장이 수감된 상태에서 그룹 경영을 총괄하고 있는 손길승 회장마저 검찰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SK글로벌 회장을 겸직하고 있어 소환 대상에 오른 손회장의 검찰 출두는 손회장에게나 그룹측에나 그 자체로도 수난이지만 수난이 거기에 그칠지는 미지수다. 검찰이 “전경련 회장이라는 재계에서의 위상을 고려하지 않겠다. 법 앞에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원칙론을 흘리고 있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재계에서 최근 들어 숨죽이고 있는 게 SK만은 아닐 것이다. 검찰의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다른 재벌들도 각자 자신들의 회계장부를 다시 꼼꼼히 살피고 있을 것이다. 분식회계 수사가 재벌들을 긴장시키는 것은 국내 기업들에게 있어 가장 후진적인 분야가 바로 회계의 투명성이기 때문이다.



    새 정부가 재벌개혁의 고삐를 죄는 과정에서 분식회계 문제를 본격 거론할 것이라는 예상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 활동 과정에서도 흘러나왔다.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인수위는 기업의 회계 불투명성에 대해 몇 가지 강도 높은 조치를 취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날 세운 검찰 ‘분식회계 습격사건’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분식회계 방지 등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의 조기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기업들이 재무제표가 포함된 사업보고서를 제출할 때 최고경영자(CEO)와 재무책임자(CFO)의 서명을 의무화하자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도 논의가 됐던 사항이지만 최고경영자의 서명이 중요한 것은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수위가 검토한 것은 CEO와 CFO가 서명하는 인증서에 ‘공시서류를 검토한 결과 허위 표시나 중요 사항의 누락이 없었고 적절한 내부 통제를 거쳤으며, 형사상 책임도 감수하겠다’는 각서를 포함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구상은 그동안 분식회계가 적발돼도 실무자가 책임을 지는 사례가 많았던 점을 고려한 것이다.

    회계 투명성 보장이 재벌개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대주주의 전횡이 가능케 하는 핵심수단 중 하나가 회계 불투명성이었기 때문이다. 대우 한보 등 대기업 몰락은 대주주의 일방적 지배가 그 배경이라는 점에서 예외가 없었다. 또 그런 대주주의 전횡 뒤엔 반드시 분식회계 관행이 자리잡고 있었다.

    국내기업의 회계 투명성은 외환위기 이후 다소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분야다. 2001년에도 정부와 회계업계에서는 기업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겠다며 ‘분식회계 근절 원년’을 선언했다. 처벌제도를 강화하고 분식회계 방지제도를 새로 마련했다.

    그러나 현대상선의 사례에서 보듯 회계장부를 대주주 임의대로 좌우할 수 있다는 인식은 지금도 여전하다. 북한으로 보낸 2억 달러에 대해 공시도 하지 않고 재무제표에서도 통째로 누락시킬 수 있었던 데는 대주주가 회계장부에 대해 갖고 있는 일반적 인식의 수준을 보여준다. 현대상선 사태를 정치적 논란과는 별개로 기업경영 측면에서 본다면 ‘기업자금을 몰래 빼돌리는 과정에서 나타난 분식회계’로 요약할 수 있다.

    날 세운 검찰 ‘분식회계 습격사건’

    참여연대가 분식회계 혐의로 고발한 한화(회장·김승연·사진)에 대해 검찰이 수사 의지를 밝히자 한화측이 반발하고 있다.

    현대 사례뿐만 아니라 올 들어서도 몇몇 기업들의 분식회계가 적발됐다. 다만 분식회계 수법이 더 다양해지고 교묘해진 것이 과거와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한 대형 회계법인의 박모 회계사는 “분식회계 방지제도가 강화되면서 노골적으로 회계법인에 부탁하는 식의 분식회계는 사라진 대신 외부 감사인이 분식 사실을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수법이 교묘해지는 추세”라고 전했다.

    이렇다 보니 점점 교묘해지는 분식회계를 수사권도 없는 외부 감사인이 찾아내는 데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분식회계에 대한 처벌도 미국 유럽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다. 미국 유럽 등에서도 기업의 회계부정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와 다른 점이라면 회계부정 사실이 드러났을 때의 처벌이다. 이들 나라에선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나면 회사는 문을 닫고 경영진과 회계사들이 줄줄이 법적 처벌을 받는다. 실제로 엔론 월드컴 등의 최고경영진은 잇따라 기소됐다. 회계감사를 맡았던 아서 앤더슨도 몰락했다. 박회계사는 “한국도 회계부정이 드러난 기업과 회계법인에 대한 제재 규정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지만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회계부정을 막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SK에 대한 수사에서처럼 형사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몇몇 사람의 책임으로 한정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보다 더 강력한 것이 있다. 바로 시장의 단죄다. 회계부정이 드러날 경우 시장으로부터 철저한 응징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집단소송제’는 분식회계의 근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받는 제도다.

    시민단체 등에서는 “분식회계 방지 등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도의 도입이 시급하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노무현 정부 역시 재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밝히고 있다. 이를 재벌개혁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분식회계에 대한 검찰의 일련의 수사는 노무현 정부의 그 같은 재벌개혁 명분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재벌들이 더 긴장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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