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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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특수부는 지금 ‘수사중’

서울지검 형사9부 경제 비리 척결 ‘명성’ … “최태원 구속은 시작, 칼날 계속 세울 터”

  • 이태훈/ 동아일보 사회1부 기자 jefflee@donga.com

    입력2003-02-27 17: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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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특수부는 지금 ‘수사중’

    특가법상 배임 혐의로 전격 구속된 SK㈜ 최태원 회장이 2월22일 밤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서울지검을 나서고 있다(큰 사진). 최회장을 구속한 서울지검 형사9부 이인규 부장.

    ”최태원 SK㈜ 회장에 대한 구속은 기업과 금융시장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기회비용입니다.”

    소환된 최회장을 상대로 부당내부거래 혐의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가 진행중이던 2월21일 오후 서울지방검찰청(이하 서울지검) 7층 형사9부장실. SK그룹에 대한 검찰 수사의 의미를 강조하는 이인규(사시 24회) 부장의 말 끝에 힘이 느껴졌다.

    “한국의 주식시장이 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돼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기업이 투명하게 경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체 주주들의 이익을 우선하기보다 재벌 총수 한 사람이 미미한 지분을 갖고도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잘못된 관행이 외국인 투자자의 눈에는 여전히 미덥지 않은 것이지요. 지금까지 ‘관행’으로 방치돼온 이 같은 불법행위를 뿌리뽑지 않는 한 한국경제도 한 단계 도약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부장은 SK그룹에 대한 수사를 노무현 정부의 재벌정책과 연결하는 일부 시각에 대해 “100% 틀린 이야기다. 범죄 혐의가 있으면 처벌한다는 원칙에 따라 수사하는 것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수사를 하는 시기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며 “검사로서 경제가 나쁘면 불법을 발견하고도 눈감아야 하고 경제가 좋아지면 수사를 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 구속은 기회비용”

    금융특수부는 지금 ‘수사중’
    서울지검 형사9부. 서울지검을 출입하는 언론사 기자들 사이에선 ‘금융특수부’라는 애칭으로 통한다. 서울지검 산하에는 대형 금융사건과 고위 공직자 비리를 전담해 수사하는 특수부 3개 부서가 있지만 형사9부가 특수부의 수사 능력과 명성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때로는 특수부를 능가하는 수사 실적을 올린다는 이유로 기자들이 붙인 별명이다.

    형사9부는 현재 이인규 부장검사 지휘 아래 차동언(사시 27회) 부부장, 이석환(사시 31회), 양호산(사시 35회), 한동훈(사시 37회), 이시원(사시 38회) 검사 등 총 6명의 검사가 한 팀을 이루고 있다. 이중 이석환·한동훈 검사는 2월27일자로 단행된 법무부 평검사 인사에서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과 천안지청으로 각각 전보 발령을 받은 상태. 따라서 두 검사는 최태원 SK㈜ 회장이 구속되고 이번 수사가 최종 마무리되면 형사9부를 떠나게 된다.

    형사9부가 서울지검에 신설된 것은 2001년 6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여파로 각종 금융사건이 폭증하자 주식시장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금융·증권 범죄만을 맡는 전담 수사부가 필요하다는 문제제기가 설득력을 얻으면서 문을 열었다.

    금융특수부는 지금 ‘수사중’

    검찰수사관들이 2월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 구조조정본부에 대한 압수수색을 한 뒤 승합차량에 압수품을 싣고 있다(위).SK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된 2월18일 오전 SK 본사 앞에서 SK 직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당초 형사9부는 금감원과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의 고발 사건을 전담해 수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검찰이 형사9부에 이 같은 임무를 배정한 것은 잇따라 터져나오는 대형 금융사건과 주가조작을 통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올리는 주식시장의 불공정거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금감원, 공정위, 검찰이 유기적인 협조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에 따른 것.

    형사9부가 탄생한 또 다른 배경에는 기획, 발굴 등의 ‘인지’수사에 주력해야 하는 서울지검 특수부가 최근 몇 년 전부터 폭증한 금감원과 공정위의 대형 고발사건을 처리하는 데 시간과 인력을 빼앗기고 있다는 지적도 한몫했다.

    그러나 형사9부는 이 같은 설립 취지와 위상에도 불구하고 출범한 뒤 1년여간 크게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한동안은 당초 취지대로 금감원과 공정위의 고발사건만을 처리하느라 자체적인 인지수사를 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수십년간 축적된 특수 수사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서울지검 특수부의 그늘에 가릴 수밖에 없었던 점도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형사9부에게는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8월 형사9부는 이인규 현 부장검사의 부임을 계기로 환골탈태의 일대 전기를 맞는다. 이부장은 우선 고발사건을 주로 처리하던 수동적인 수사에서 과감히 탈피해 인지수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사채·금융·증권가에선 ‘저승사자’

    “금감원이나 공정위의 고발사건은 사실상 이미 ‘죽은 사건’입니다. 고발사건 수사에 착수할 때는 이미 해당 기업도 결딴난 상태고 투자자들의 피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수사를 하면 할수록 안타까움만 커지더군요.”

    이부장은 소속 검사들에게 수사팀 스스로가 범죄 혐의를 미리 잡아내 수사하는 ‘인지수사’에 승부를 걸라는 특명을 내렸다.

    형사9부의 수사 칼날이 가장 먼저 향한 분야는 주가조작 사건. 수사팀은 주식시장을 어지럽히는 대표적인 불공정거래인 주가조작에 증권가의 유명 애널리스트들이 개입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에 착수, 지난해 9월 대신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인 정모씨(42) 등 3명을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형사9부에게는 가벼운 몸풀기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형사9부는 이후 금융·증권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월척’들을 쉴새없이 낚아 올렸기 때문. 이후 정보 유통이 가장 빠른 증권가에는 서울지검 형사9부, 이인규 부장검사의 이름이 ‘경계대상 1호’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수사팀은 지난해 10월 말 ‘서울지검 형사9부’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는 결정적인 수사에 은밀히 착수했다. 경제 비리의 주요 원천인 사채시장의 불법행위를 공략하는 대규모 수사가 시작됐다. 한 달여간의 끈질긴 추적 끝에 형사9부는 1조3000억원 규모의 자본금을 허위로 납입한 대가로 수수료를 챙기고 기업사냥꾼에게 수백억원의 주가조작 자금을 지원한 명동 사채업자와 은행 간부 등 68명을 적발하고 이중 명동 사채시장의 큰손 반재봉씨(59) 등 7명을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하는 큰 성과를 올렸다. 수사 결과가 발표되자 사채시장은 물론 금융권과 증권가는 ‘서울지검 형사9부’라는 낯선 이름의 ‘저승사자’를 또렷하게 인식하게 됐다.

    금융 범죄 수사에 대한 자신감과 감각을 얻은 형사9부는 벤처기업 비리 수사로 방향을 틀었다. 형사9부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회사에 자본금을 넣었다가 빼내는 수법인 ‘가장 납입’. 수사팀은 지난해 11월 1조8000억원대의 증자대금을 가장 납입한 혐의로 8700개 기업을 적발했다. 이들 회사의 장부상에는 자본금이 잡혀 있으나 실제로는 돈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게 되고 증자가 이뤄진 것으로 믿고 주식을 산 수많은 선의의 투자자들이 큰 손해를 입었던 것. 주식대금 가장 납입 사건은 검찰 내부에서도 ‘사건의 금맥’을 발견한 것에 비유될 정도로 파급 효과가 엄청난 사건이었다.

    형사9부의 수사를 거치면서 한때 코스닥 시장을 주름잡던 유명 벤처기업인 프리챌, 디에이블 등의 대표들이 줄줄이 철창 신세를 지게 되자 벤처업계에서는 “서울지검 형사9부 때문에 벤처기업을 못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부장은 “창의적인 기술과 아이디어를 통해 회사를 키우기보다 정부와 금융기관의 지원이나 코스닥 시장 등록을 통해 이득을 챙기려는 일부 벤처기업 대표들의 불법적인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최소한의 수사였다”며 “이들 벤처기업은 놔두어도 저절로 망할 수밖에 없는 기업인 만큼 건전한 벤처기업에 투자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차원에서도 수사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형사9부가 지난해 말 4년여를 끌어왔던 미해결 사건의 당사자인 나승렬 전 거평그룹 회장을 배임 혐의로 구속하자 금융계와 업계에서는 “한번 걸리면 절대 못 빠져나간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인규 부장은 사건을 처리하는 뚜렷한 기준 한 가지를 항상 견지하고 있다. 불법을 저지른 회사 대표에게 가장 무거운 책임을 묻는다는 것. 형사9부는 이인규 부장 체제 이래 지금까지 회사의 실무자들에 대해선 입건조차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대신 회사 대표는 대부분 구속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이부장은 “불법을 적극적으로 지시한 회사 대표를 엄벌하지 않으면 회사 대표가 실무진을 방패막이로 삼아 지속적으로 불법을 일삼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월급쟁이에 불과한 회사 임원이 사장의 지시가 부당하더라도 이를 거부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한 조치라고 이부장은 설명했다.

    이인규 부장의 ‘소신’도 눈길을 끄는 대목. 이부장은 “검사는 수사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검사가 정치, 경제 등을 모두 고려하다 보면 범죄행위를 단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일수록 원칙에 따라 방향을 결정한다”는 이부장의 소신이 결국 이번 SK그룹 수사에서도 최태원 SK㈜ 회장의 구속으로 드러난 셈이다.

    이부장의 이런 부 운영 방침에 따라 형사9부는 일선 수사 검사의 소신을 수사과정에 비중 있게 반영시킨다. 부장의 역할은 검사들이 소신껏 수사해 자신들의 역량과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수사의 방향과 시각에 대해 조언하는 것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 이부장의 생각이다.

    “걸리면 절대 못 빠져나간다”

    노무현 정부의 주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인 검찰개혁에 대한 이부장의 소신도 뚜렷하다. 이부장은 “국민의 불신을 초래한 검찰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도 “검찰이 국민의 요구를 받들어 개혁할 수 있도록 격려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검찰이 개혁돼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법 집행과 사회악 제거’라는 검찰 본연의 기능을 살리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부장은 “자식이 잘못하더라도 때려서 가르쳐야지 양자를 들여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2월 22일 오후 7시40분경 최태원 회장의 구속수감 장면을 TV를 통해 지켜본 이부장은 고갯마루를 막 넘어선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 마음이 착잡하다”며 말을 삼갔다. 그러면서도 “새벽까지 이어지는 수사 때문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생일도 챙겨주지 못했는데 일요일에는 그동안 못한 아버지 노릇이나 해야겠다”며 짐을 챙겼다.

    재벌 총수를 구속시킨 추상같은 검사의 모습에서 평범한 아버지로 되돌아가려는 그의 뒷모습에서 국민들은 민초들의 억울함을 감싸 안고 거악을 단죄하는 ‘소신과 원칙’에 충실한 검찰의 참모습을 찾고 싶은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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