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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언론 봄날은 간다

정부, 인질사건 계기로 ‘언론과의 전쟁’ … 방송국 폐쇄·기자 소환 ‘통제와 탄압’ 동시에

  • 김기현/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

러시아 언론 봄날은 간다

러시아 언론 봄날은 간다

모스크바 극장 인질사건으로 사망한 아르세니 쿠릴옌코(13)와 크리시나 쿠르바토바(14)의 장례식이 10월30일 열렸다.

모스크바의 봄은 끝났는가. 초겨울부터 닥친 매서운 추위와 함께 러시아 언론계가 꽁꽁 얼어붙었다. 10월 체첸 반군이 모스크바 뮤지컬 극장에서 벌인 인질사건을 계기로 러시아 언론이 일대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11월 초 러시아 상·하원은 언론 통제를 강화하는 조항을 포함한 언론법 개정안을 차례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서명만 기다리고 있다. 11월20일 러시아 언론계 대표들은 푸틴 대통령에게 공동서한을 보내 이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서한에는 러시아의 최대 일간지 ‘이즈베스티아’의 미하일 코조킨 주필 겸 발행인 등 민간 언론사뿐만 아니라 국영 러시아 방송의 올레그 도브로데예프 사장을 비롯한 관영 언론사 대표, 기자연맹 방송협회 등 언론 유관 단체장들까지 빠짐없이 서명했다. 러시아 언론계가 오랜만에 한목소리를 낼 정도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이들은 서한에서 “새 법안은 국가적인 주요 사건에 대한 언론의 접근을 제한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새 법안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비상사태 보도 제한’. 다시 말해서 인질극 같은 비상 상황이 일어나면 언론은 그저 당국이 불러주는 대로만 보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법 개정안’ 푸틴 서명만 남아

러시아 정부는 언론이 인질사건을 보도하면서 지나친 취재경쟁을 벌여 인질범을 돕고 사태 진압을 방해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당시 러시아 언론은 극장 안으로 들어가 인질극을 주도한 반군 지휘관 모프사르 바라예프를 인터뷰하고 ‘체첸에서의 러시아 철수’ 등 반군의 주장을 그대로 전했다. 이에 자극받은 러시아 당국은 현지 시각 10월26일 새벽 진압작전에 들어가면서 방송이 현장 상황을 일절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또 이에 앞서 반군과의 회견을 방영한 모스크바의 한 지역방송국을 전격적으로 폐쇄해버렸다.



당국의 서슬 퍼런 조치에 겁을 먹은 방송사들은 급박한 진압작전이 계속되는 동안 ‘한가하게’ 영화나 콘서트, 토크쇼를 방영해 시청자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유독가스를 극장 안으로 무차별 살포한 진압작전이 끝난 뒤에도 러시아 언론은 ‘알아서 기어야’ 했다. 진압 방식의 문제점을 보도하지 못한 것은 물론, 수도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중무장한 테러범들이 극장을 점거할 때까지 치안당국은 무얼 했느냐는 당연한 지적조차도 하지 못했다. 방송들은 부상자들을 방문해 위로의 말을 건네는 푸틴 대통령의 모습만 되풀이해서 보여주었을 뿐이다.

새 언론 법안에 대해 반대의 뜻을 밝힌 언론계 대표들의 목소리도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인질극 당시 언론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시인하면서 정부가 이 법안을 철회한다면 언론계가 윤리강령 제정 등을 통해 ‘자율적인 규제’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는 이미 푸틴 정부 아래서 언론이 크게 위축돼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푸틴 정부는 2000년 집권하자마자 국세부와 반독점부(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에 해당)를 동원해 러시아 최대의 민간 언론재벌이었던 미디어모스트 그룹을 공중분해해 버렸다. 대권경쟁 당시 푸틴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던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회장은 스페인으로 도망가 귀국도 못하는 신세가 됐고 수많은 언론인들이 이 사태로 언론계를 떠났다. 미디어모스트 사태를 겪었던 러시아 언론계는 법에 의한 통제보다 법의 범위 밖에서 일어나는 탄압이 더 두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 예로 이번 인질사건의 전모를 가장 상세히 취재했던 주간신문 ‘베르시야’는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옛 소련 시절 악명 높은 비밀경찰이었던 국가보안위원회(KGB)의 후신인 연방보안부(FSB) 요원들이 1일 이 신문 편집국을 급습했다. FSB 요원들은 복면을 쓰고 무장을 한 채 편집국에 난입해 기자들의 컴퓨터와 회사 서버까지 압수해 갔다. 그 후 루스탐 아리프자노프 편집국장을 비롯한 기자들이 차례로 소환돼 조사받고 있다.

러시아 언론 봄날은 간다

러시아의 NTV 스튜디오. 인질 진압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러시아 방송은 엉뚱하게 영화나 토크쇼를 내보냈다.

KGB에서 잔뼈가 굵은 푸틴 대통령은 FSB 최고책임자(부장)를 지냈다. 이런 인연으로 FSB는 푸틴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버팀목이다. 소련 붕괴 후 비밀경찰이 직접 언론에 개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뿐만 아니다. 언론 통제의 불똥은 외국 언론에까지 튀었다. 14일 독일 주재 러시아대사관은 독일 ARD 방송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인질사건과 체첸전 보도에서 불공정한 보도를 했다는 것이다. 보도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앞으로 러시아에서 취재활동을 하는 데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은근한 위협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ARD 모스크바 특파원은 “보고 들은 대로 보도했을 뿐”이라고 반박했으나 모스크바 주재 외신기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러시아 정부가 보도 내용을 들어 외국 언론사에 공개 항의를 한 것은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체첸반군에 대해 동정적인 보도를 해온 서방 언론에 대한 ‘일종의 경고’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지난 10여년 동안 러시아 언론은 크렘린궁도 거리낌없이 비판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를 맛보았다. 그러나 최근의 언론 상황 속에서 많은 언론인들은 심한 검열에 시달려야 했던 소련시절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





주간동아 362호 (p68~69)

김기현/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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