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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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망각’ 두려워하는 유대 민족

‘기억하는 것’은 여호와 명령… “불행을 결코 반복 않겠다”다짐

  • < 남성준/ 예루살렘 통신원 > darom21@hanmail.net

    입력2004-09-21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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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17일은 54주년을 맞는 이스라엘의 독립기념일이었다. 1948년 5월14일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 통치하던 영국이 철수함과 동시에 건국을 선포함으로써 유대인들은 2000년간 꿈에 그리던 자신들의 고향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건국선포 직후 주변 아랍 5개국(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이 이를 반대하며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1차 중동전쟁이 발발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팔레스타인 지역 분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고 이뤄낸 독립이어서 이날은 1년 중 가장 기쁜 날로 나라 전체가 떠들썩하다. 불꽃놀이와 함께 곳곳에서 기념행사가 벌어지고 도로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춤추고 노래하며 밤새워 축하한다. 이는 결코 정부 주도의 형식적인 행사가 아니라 정말로 유대인들의 가슴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환희의 표출이다. 독립이 그 나라의 가장 기쁜 날인 것이 별스러운 일은 아니겠지만 독특한 것은 이스라엘이 이날을 기념하는 방식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독립기념일 바로 전날을 우리나라의 현충일에 해당하는 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이 기념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기억의 날’이다. 독립기념일이 이들의 현대사에서 가장 기쁜 날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날이 있기까지의 희생과 고통을 먼저 기억하자는 의미다. 이날은 가무(歌舞)가 금지되고 유흥업소를 비롯한 상점들도 일찍 철시한다. 평소 시끄러운 음악과 붐비는 행인들로 시끄럽던 시내 중심가에도 적막이 흐른다. 누가 강제로 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TV에서도 쇼 프로나 오락 프로는 일절 방영하지 않고, 추모 음악과 함께 독립 과정의 험난했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희생자들에 대한 추도행사와 그 유족들의 현재 삶에 대한 프로그램만 하루종일 방영한다. 그들의 역사와 아무런 관련 없는 외국인들이 보기에도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또 독립기념일 일주일 전날은 ‘홀로코스트’ 기념일로 지켜지고 있다. ‘홀로코스트’는 20세기 인류 최대의 비극이라 불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대인 600만명에 대한 학살을 일컫는 말이다. 이날 역시 모든 상점이 철시하고 모든 국민은 엄숙함과 경건함을 유지한다. 독립기념일 일주일 전에 이날을 지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나라 없이 떠돌던 때의 고단했던 삶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홀로코스트 기념일’과, ‘기억의 날’을 엄숙하게 지키고 나면 독립기념일의 기쁨은 배가된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독립기념일을 지키는 방식은 그들의 철저한 역사의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바로 ‘기억하라’는 명제다. 유대인처럼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망각을 두려워하는 민족은 세계사에 그 유례가 드물다. 그들의 ‘기억’에 대한 집착은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입 천장에 붙을지어다.” (시편 137편 5~6절)

    이는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멸망되고 포로로 끌려가서 바벨론 강가에 앉아 울며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장면을 그린 성서의 한 구절이다. 종교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유대인들의 삶에서 구약은 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경전인데 이 구약에 보면 ‘기억하라’는 말이 수도 없이 나온다. ‘기억하는 것’은 이들의 유일신 여호와의 명령으로서, 망각하는 것은 곧 죄가 된다.

    유대인의 이러한 철저한 역사의식과 기억에 대한 집착은 자연스럽게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문화로 이어진다. 입으로 전해지는 역사는 쉽게 망각되고 변질되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과 비교해 볼 때 보잘것없는 소수민족에 불과한 유대 민족이 오늘날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기록문화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사해 근처의 광야 한가운데에 ‘마사다’라는 요새가 있다. 서기 70년 이스라엘이 로마에 멸망됐을 때 로마에 대항해 결사항전을 다짐하던 900여명의 유대인이 피난처로 삼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3년여를 로마에 대항하던 이들은 요새의 함락이 임박한 날 ‘노예로 살 것이냐, 자유인으로 죽을 것이냐’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죽음을 선택해 모두 자결했다.

    오늘날 이곳은 이스라엘군 신병 훈련의 마지막 코스로 이용된다. 가파른 벼랑길을 올라 요새의 정상에 이른 신병들은 “이 역사를 잊지 말자”고 외친다. 나라가 힘을 잃으면 외세에 침략당하고, 그 국민은 노예로 살거나 죽는 불행한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 같은 역사를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또 예루살렘에는 ‘야드바쉠’이라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있다. 이곳 역시 초,중,고 학생들과 신병들이 의무적으로 방문해 그들의 불행한 역사를 배우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기억의 장막’이라는 전시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던 강제수용소의 이름들이 바닥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 중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우슈비츠’ 같은 이름도 있다. 유대인들은 이들 이름을 기억하며 어두웠던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스라엘 공영 채널인 ‘채널 1’에서는 매일 밤 9시 뉴스 전에 ‘인물열전’이라는 프로그램을 몇 분간 방송한다. 이 프로그램은 이스라엘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과 그 이후 사회 안정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들의 삶을 출생에서 죽음까지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이스라엘의 크고 작은 거리에 붙은 수많은 인물들의 이름이 모두 등장한다. 이스라엘 국민은 매일매일의 TV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현대사를 보면 유대 민족의 그것과 신기하리만큼 닮았다. 국가 건립 시기도 비슷하다. 그렇기에 유대 민족의 현대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역사를 얼마만큼 기억하고 있을까. 현충일에는 숙연한 분위기보다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닌 기억이 더 많지는 않을까. 광복절의 여러 행사들은 나의 행사가 아니라 정부가 주도하는 그들만의 행사는 아니었는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과 관련해 한국에서도 많은 네티즌들이 반이스라엘 감정을 담은 글을 올리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유대 민족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배워야 한다. 특히 우리의 굴곡 많은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그리고 그것을 너무도 쉽게 망각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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