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1

2001.11.29

전 지구 지배하는 ‘제국’은 있다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1-24 14: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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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지구 지배하는 ‘제국’은 있다
    지난 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정부가 국민의 요구보다 국제금융시장의 요구에 더 민감하게 움직이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국가 위에 존재하는 어떤 ‘힘’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지배와 한국전쟁 이후 새롭게 체험한 초국가적 힘이었다.

    다니엘 벨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는 큰일을 하기에는 너무 작다.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올 것이다”고 했다. 국가 위에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란 무엇일까.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알던 제국주의는 더 이상 없지만, 제국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맥도널드와 마이크로소프트, IMF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네그리와 하트가 사용한 ‘제국’(Empire)이란 개념은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자칫 유럽의 낡은 패권주의를 넘겨받은 미국이 제국의 혐의를 받을 가능성이 높지만 사실과 다르다. 그렇다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이합집산하는 지역별 경제블록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식민지 체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의 대항점에 있던 구소련 체제가 붕괴된 후 각국은 ‘전 지구적’(globalization) 질서 속에 편입되었다. 제국이란 이러한 전 지구적 교환들을 효과적으로 규제하는 정치적 주체, 즉 세계를 통치하는 주권 권력을 말한다. 그것은 IMF나 세계은행, 유엔과 같은 초국가적 기구의 형태일 수도 있고, 맥도널드나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다국적 기업일 수도 있다.

    제국이 국민·주권·영토로 구성되는 기존 국가의 개념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은 영토적인 권력 중심을 만들지 않고, 고정된 경계나 장벽들에 의지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제국은 개방적이고 팽창하는 자신의 경계 안에 지구적 영역 전체를 점차 통합하는 탈중심화되고, 탈영토화하는 지배 장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제국의 건설에 앞장선 것은 대중(multitude) 자신들이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적 지배의 분할을 넘어 관계의 국제화와 전 지구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산물이 바로 제국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종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 제국은 자신이 무너뜨린 제국주의보다 더 잔인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이미 국민 국가의 주권이 쇠퇴하고 점차 국가 스스로 경제적·문화적 교환들을 규제하기 어려운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들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바로 한국이 IMF 관리체제에서 충분히 경험했던 바다. IMF 관리체제에서 한국은 ‘세계화’ 혹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선진 자본주의의 입맛에 맞추도록 체질 개선을 요구받았다. 사실상 국가와 국민은 앞으로도 더 많은 권력을 초국가적 기구(제국)에 양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식민주의나 제국주의 시대와는 또 다른 방식의 착취였다.

    전 지구 지배하는 ‘제국’은 있다
    비록 ‘제국’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등장시켰지만 네그리와 하트가 제시한 ‘제국’의 모습은 지금까지 수많은 지식인이 지적해 온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속에 숨겨진 왜곡된 자본주의의 모습과 닮았다. ‘반세계화의 논리’(말 펴냄)의 저자 윌리엄 K.탭 교수(뉴욕시립대정치학)는 현 시기를 금융제국주의로 규정하고 IMF와 같은 국제기구들은 미국의 초국적 자본과 금융자본의 이해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비난했다. 케빈 대나허나 월든 벨로와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함께 쓴 ‘50년이면 충분하다’(아침이슬 펴냄)는 세계은행과 IMF의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운 사례와 대안들을 모은 일종의 현장 보고서다.

    이런 책들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문제제기 차원에 머물렀다면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이라는 개념을 통해 ‘전 지구화’라고 불리는 현상을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고 대안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대안이란 ‘제국’을 만든 대중 스스로 ‘제국’을 허무는 것이다.

    이 책은 철학적이자 역사적이고 문화적이자 경제적이며, 정치적이자 인류학적인 말 그대로 학제적 연구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준비되지 않은 독자는 저자가 풀어내는 방대한 지식을 따라가기가 벅차다. 그러나 쉽게 내뱉고 흩어져버리는 구호와 주장들을 종합해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그 틀로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면 이 책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제국/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이학사 펴냄/ 589쪽/ 2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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