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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다 정치가 더 가깝다?

변협의 결의문 채택 의도 놓고 설왕설래 … 집행부도 파문 확대에 당황, 한발 물러서

  • < 김 당 기자 > dangk@donga.com

법보다 정치가 더 가깝다?

법보다 정치가 더 가깝다?
평지풍파를 일으킬 것 같던 대한변호사협회(이하 변협) 결의문 파문이 ‘예상외로 싱겁게’ 끝났다. 지난 7월23일 열린 제12회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에서 변협(협회장 정재헌)이 ‘절차를 무시한 개혁’과 ‘법치주의의 후퇴’를 비판한 결의문을 채택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어 정치권이 공방을 벌일 때만 해도 정치권과 법조계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전운(戰雲)마저 감돌았다. 그러나 서울지방변호사회(이하 서울변회)의 제동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의 반발에 포위된 변협 집행부가 7월26일 “언론과 정당이 변협의 순수한 뜻을 곡해하고 있다”며 해명성 성명을 발표하고, 민주당이 다음날 변협의 해명을 이해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변협의 ‘대정부 선전포고’는 일단 ‘3일 천하’로 끝났다.

그러나 변협이 자체 연례행사인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에서 결의문을 채택해 “현정부의 개혁이 합법성과 정당성을 요구하는 실질적 법치주의에서 현저하게 후퇴했다”고 지적하고 일부 언론들이 이를 대서특필함으로써 야기된 이번 파문과 관련해 결의문을 작성한 주체와 경위, 그리고 의도는 여전히 변호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이번 결의문이 나오게 된 데는 처음부터 변협 집행부가 치밀하게 계산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시각과, 법치주의 후퇴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결의문으로 빌미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언론과 정치권이 자기들의 입맛대로 이를 확대 재생산한 탓이 더 크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먼저 변협 집행부가 바뀐 지 불과 6개월 만에 이런 결의문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논란거리다. 올해 변호사대회의 주제는‘법치주의와 개혁’이지만 지난해 제11회 변호사대회의 주제는 ‘법치주의와 변호사’였다. 물론 당시에도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지난해 결의문의 키워드는‘자기 반성’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변호사들이 법치주의 구현에 열과 성을 다하여야 함은 물론 공익에 봉사하고 겸허한 자세로 국민에게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하는 책무를 소홀히 하고 법조라는 좁은 울타리 내에 안주함으로써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음을 깊이 반성한다. 우리는 변호사들이 이와 같은 구시대적 모습에서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국민의 엄중한 비난과 비판을 면하지 못함은 물론 변호사 단체 존립의 의의마저 의구심을 갖게 할 수 있다는 데 공감하면서 다음과 같이 엄숙히 우리의 결의를 다진다…(생략).”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 채택한 결의문에서는 ‘반성’을 촉구하는 대상이 이렇게 바뀌었다. “제12회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에 참여한 전국의 변호사들은 ‘법치주의와 개혁’이라는 주제로 진지하게 토론한 결과, 현정부의 개혁이 합법성과 정당성을 요구하는 실질적 법치주의에서 현저하게 후퇴하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생략).”

그렇다면 변협 집행부가 교체된 지 6개월 만에 변호사들의 상황 인식이 180도 바뀐 것일까. 물론 현정부가 시행한 정책 중 지나친 개입과 간섭으로 법치주의 논란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은 있다. 그러나 변협의 이번 결의문에는 법치주의 후퇴의 구체적 사례나 명확한 개념 규정이 없다.



이번 결의문 파동에 대해 최재천 변호사(법무법인 한강)는 “지난 1월 변협 회장 선거에서 정재헌 회장이 당선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다”고 말했다. 변호사들은 대체로 이번 파문의 배경을 지난 1월 개혁 성향의 김창국 회장에서 보수 성향의 정재헌 회장으로 집행부가 바뀐 데서 찾는다. 즉 새로운 변협 집행부가 이번 변호사대회를 정치적 또는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이와 같은 비판의 배경은 우선 정회장의 보수적 성향에서 찾을 수 있다. 이번 파문을 계기로 ‘한국의 상황이 월남 패망 직전과 같다’느니 ‘국정비판의 선도적 역할을 하겠다’느니 하는 그의 발언이 다시 문제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재헌 변호사는 지난 1월 변협 회장 선거에 입후보하면서 출마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한마디로 현재의 변협은 회원의 권익옹호보다는 회원의 활동을 제한하고, 부담을 가중시키며 회원들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국정시행에 대해 비판하는 선도적 역할도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변협을 비롯한 변호사 단체는 규제개혁의 심한 도전을 받고 있는데다가 활동이 위축된 변협의 위상은 소수 시민단체의 것만 못하다는 평가마저 나오고 있습니다. 새 천년에 들어서서 법조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사건 수임률은 격감하고…(중략)…세무 당국의 잦은 세무조사와 정상비용 부인 등으로 담세 한계를 넘어서는 조세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난제들을 극복하고 해결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뛸 각오입니다.”

이번 변호사대회를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는 또 다른 배경으로는 정재헌 회장(64)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66)와의 이른바 ‘친분관계’가 꼽힌다. 각각 1935년생과 37년생으로 2년 선후배(학교는 3년) 관계인 이총재와 정회장은 둘 다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한 해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며, 법조계에 입문한 뒤로도 공군 법무관과 판사를 거쳐 변호사 개업을 한 과정까지 거의 똑같은 코스를 밟았다.

결의문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분위기’를 잡은 변호사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의혹의 눈길이 쏠린다. 당초 변협이 공지한 이번 대회 일정은 △오전 기조연설 및 심포지엄 △오후 변호사 연수회 및 한국법률문화상 시상식이 전부였다. 11시부터 시작한 심포지엄의 주제는 ‘법치주의와 개혁’으로 주제발표는 문재인 변호사, 토론자로는 서석구 변호사(대구변회), 천정배(민주당)·이주영(한나라당) 의원, 김선택 교수(고려대)가 참석했다.

법보다 정치가 더 가깝다?
이 가운데 대구지방변호사회 소속의 서석구 변호사(57, 법무법인 영남)는 지난해 대구변회에서 ‘현정부 정책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변협 지도부를 질타’하는 성명을 내는 것을 주도한 데 이어 변협에 맞서 ‘법치주의 실현을 위한 변호사모임’(일명 법변)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도 서변호사는 첫 토론자로 나서 “현재 대북 퍼주기와 공적자금 낭비 등 일련의 실정이 거듭되는데, 이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사유가 될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재산가압류와 직무집행정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서변호사의 ‘대통령 탄핵’ 발언은 곧바로 다음날 한나라당 3역회의에 인용되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이재오 총무)거나 “와히드(인도네시아 전 대통령) 짝 나는 것 아니냐”(김만제 정책위의장)는 발언으로 이어졌다. 다만 한나라당 권철현 대변인은 이날 이재오 총무의 대통령 탄핵 제기 발언이 개인의견일 뿐 당론이 아니라고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다음날인 7월25일 “이총무가 어제 총무단에서 의견을 모아 총재단에 보고했고 오늘 총재단 회의에서 이 문제(탄핵 검토건)를 공식 논의했다”고 다시 불씨를 지폈다. 그리고 이회창 총재도 이날 인천 강연에서 “변협이 이 정권은 법치주의를 짓밟았다고 했다. 여론몰이를 해서 법치주의를 하는 세력을 배격하고 있다. 이렇게 국민을 괴롭히는 개혁을 하는 대통령은 탄핵감이라고 했다”고 변협의 결의문과 탄핵 발언을 인용해 ‘탄핵건’을 공식 거론했다.

변협의 심포지엄 사회는 대구 출신으로 보수적 성향의 변호사 단체인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헌변) 회원인 김정수 변호사(변협 법제이사)가 맡았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천정배 의원은 “심포지엄은 참석자들이 주제발표에 대한 약정토론만 하고 반론없이 끝났다”면서 “그런데도 ‘토론 결과를 참조해 결의문을 작성했다’는 변협의 주장은 결국 결의문이 편향된 정치의식을 가진 집행부의 계획된 작품임을 증명하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결의문 초안 작성자는 대회 집행위원장인 황계룡 변호사(66)로 알려졌다. 황변호사는 이날 10시부터 시작한 대회사에서 “법을 짓누를 수 있는 것이 권력이고 권력의 힘은 정의를 얼마든지 잠재울 수 있다”며 “지금 이 사회에서도 여론몰이로 정당한 절차를 무시하고 국민감정과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절차적 정당성이나 법치주의를 외치는 세력을 힘으로 지배하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행위원장으로 이번 변호사대회의 ‘총감독’을 맡은 경북 상주 출신의 황계룡 변호사 또한 이회창 총재와 동갑(사법고시로는 이총재가 1년 선배)인데다 공군 법무관, 판사를 거쳤다.

박찬운 변호사(서울변회 섭외이사)는 이번 결의문 파동 원인에 대해 “각론에 충실해야 하는 변호사 단체가 두루뭉실하게 총론으로 비판하다 보니 문제가 되었다”면서 “서울변회는 해마다 열리는 변호사대회가 그렇게 큰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변협 결의문이 외부로 비화한 건 결국 언론 작품이다”고 주장했다.

지난 7월27일 변협 집행부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변협의 각종 직책을 맡고 있는 민변 소속 변호사에 대한 ‘사퇴 권고’를 의결한 민변 총회 결정에 따라 7월28일 변협 인권위원장(변협 인권위원 30명 중 27명이 민변 회원) 직책을 사퇴한 박연철 변호사 또한 “변호사대회는 연례행사지만 기자들이 평소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그날도 ㄱ신문을 빼고는 심포지엄을 취재한 일간지 기자가 없었다. 그런데 언론이 기사를 확대하는 바람에 국민에게 ‘반개혁 집단’인 것처럼 각인되어 변협과 변호사들이 상처를 받았다”고 지적했다. ‘변협신문’ 편집위원직을 사퇴한 박성호 변호사(법무법인 정평)도 “언론에 결의문 파문이 확대되고 난 뒤 변협 집행부가 다 잠적해 버리지 않았느냐”면서 “그걸 보면 집행부도 파문이 그렇게 커질 줄 모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언론은 이번 변호사대회에 변협 전체 회원 5000명의 10%에 해당하는 500명이 참석한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라면서 이 결의문은 변협 집행부가 작성한 초안을 각 지방 변호사회 회장을 통해 대회에 참가한 변호사들이 일일이 돌려본 뒤 수정작업을 거쳐 채택하였으므로 현정부의 개혁정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전체 변호사들의 시각을 반영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변협측 또한 “오전 심포지엄이 끝난 뒤 정재헌 회장과 전국 13개 지방변호사회 회장들의 오찬 자리에서 결의문 내용(수정안)을 최종 결정했다”면서 수정안은 이날 오후 6시30분경 폐회식에 참석한 변호사 수십 명의 열람을 거친 뒤 반대나 수정 제의 없이 채택했다고 채택과정을 밝혔다. 그러나 변협 집행부의 대표성을 부인하진 않지만 이번 결의문 채택 절차의 정당성에는 여전히 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이날 변호사대회에 ‘객’(客)으로 참관한 J검사는‘참관기’를 이렇게 밝혔다.

“변호사대회에 수백 명이 참석한 것은 맞다. 그러나 결의문을 채택할 때는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이미 대회장을 떠나고 150명 정도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100명은 ‘손님’들이고 변호사는 50명 정도밖에 없었다.” J검사가 말한 ‘손님’은 이번 대회의 폐막식에 앞서 거행한 제32회 한국법률문화상 시상식에 온 참석자들이다. 올해 수상자는 이기수 교수(고려대 법학과). 오후 6시가 넘어 결의문을 채택할 때는 고려대 법대 학맥의 대부(代父)인 이기수 교수의 수상을 축하하러 온 100명이 넘는 제자들과 가족·친지 등이 대회장에 남은 변호사들보다 더 많았다는 것이다.

변협측은 회원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서울변회 및 일부 지방변호사회의 제동과 민변의 반발에 부딪치자 결의문 발표 사흘 만인 7월26일 “개혁 자체에 반대한다는 뜻은 없었다”며 “언론과 정당이 변협의 순수한 뜻을 곡해하였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 법조인은 이번 결의문 파동을 한마디로 “법을 멀리하고 정치를 가까이 한 변협 집행부가 자초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간동아 2001.08.09 296호 (p8~10)

< 김 당 기자 > da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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