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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체험 365일 세계를 내 품안에”

40여 개국 배낭여행 끝마친 이성씨 가족… “삶의 에너지, 자신감 회복 가장 큰 수확”

  • < 김진수 기자 > jockey@donga.com

“생생체험 365일 세계를 내 품안에”

“생생체험 365일 세계를 내 품안에”
그들이 돌아왔다. 이성씨(45, 전 서울시 시정개혁단장)는 지난해 7월11일 무급 휴직계를 내고 온 가족과 함께 훌쩍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떠나 세간에 화제를 뿌린 주인공. 이씨와 그의 가족은 정확히 365일간의 여정을 끝내고 지난 7월10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대장정(大長正)이라면 대장정. 1년간의 ‘신선한 일탈(?)’은 이들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세계 40여 개국 200여 도시를 돌며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힘들어 하던 아이들도 이젠 웬만한 일쯤은 거뜬히 해결할 만큼 부쩍 자신감이 붙었어요.”

지난 7월13일 저녁 서울 대치동 이씨의 아파트. 검게 그을린 이씨와 부인 홍현숙씨(44)의 홍조 띤 얼굴엔 긴 여행을 무사히 마친 뿌듯함이 한가득했다. 여행지에서 산 기념엽서의 로마 원형경기장 사진을 가리키며 “여기 어딘지 기억나”고 묻는 이씨에게 둘째 영일(15)이 “스페인 투우경기장이에요”라고 ‘오답’했지만 여행길 추억은 되새길수록 또렷해지는 법. 이날 이씨의 집에선 밤늦도록 이야기꽃이 만발했다.

누구나 가져볼 만하지만 현실적 제약 때문에 선뜻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세계일주의 꿈. 이씨 가족의 ‘일상 탈출’ 역시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우선 이씨의 휴직은 공직사회에선 하나의 ‘파격.’ 국장급(3급)으로 승진한 지 몇 달 되지 않은데다 병가도 아니어서 여행 목적의 휴직계는 언감생심이었다. “전례가 없어 곤란하다”는 반대가 적잖았지만 다행히 ‘동기의 순수성’을 받아들여 여행의 꿈은 현실의 길로 접어들었다.



“생생체험 365일 세계를 내 품안에”
“무엇보다 삶을 재충전하고 싶었죠. 또 이번 기회를 놓치면 세상 곳곳을 내 발로 직접 밟고픈 소망을 영영 못 이룰 것 같았습니다.”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이씨는 일단 경비 마련을 위해 전 재산인 아파트 전세금 9000만 원을 몽땅 털었다. 물론 다시 돌아와 살 집은 사라졌다. 그러나 돈은 나중에 벌어도 된다는 낙관이 미래에 대한 걱정을 뛰어넘었다. 세계일주 여행상담을 위해 찾은 여행사마다 5분도 안 되어 “그런 상품은 없다”며 그에게 ‘퇴짜’를 놓았지만, 운좋게도 얼굴조차 모르던 고교 동창 김준수씨(45)가 대표로 있는 인터넷 여행사 웹투어㈜에서 세계일주 항공권을 지원 받는 행운까지 얻었다. 지난 97~98년 세계여행에 나선 ‘솔빛별’ 가족의 가장 조영호씨(45)를 만나 ‘노하우’도 새겨들었다. 이씨로서는 여행에 앞서 친구부터 얻은 셈. 마침내 D-데이. 이씨와 아내 홍씨, 중학생인 두 아들 홍일(16)과 영일, 처조카 홍익환군(11) 등 다섯 식구는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들은 이어 중국에서 한 달 동안 대륙을 횡단한 뒤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유럽·중동·남미·북중미·호주 등 세계 5대륙을 돌았고, 동남아시아에서 여정을 마무리했다.

잠은 주로 배낭여행족이 애용하는 게스트하우스 등 값싼 숙소에서 해결했다. 미국에선 한때 텐트생활도 했다. 식사 역시 현지 시장에서 산 달걀·양파·감자로 만든 김치 대용의 간단한 반찬과 밥이 메뉴의 전부. 말 그대로 ‘단사표음’(簞食瓢飮)의 연속이었다.

걷기도 많이 걸었다. “버스·열차·배·트럭·인력거 심지어 말까지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교통수단은 다 타봤을 겁니다.” 이런 와중에도 이씨는 골목골목을 제대로 보기 위해 하루 평균 10시간씩은 ‘뚜벅이’를 고집했다. “힘들다”는 성화가 대단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각기 3켤레씩 운동화를 바꿀 정도로 숨가쁜 강행군을 한 덕분에 가족의 인내력은 더 많아졌다.

이들이 밖에서 들여다본 한국인의 초상(肖像)은 어떠할까. “우리가 너무 일에 매몰해 아등바등 산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아프리카와 남미의 못사는 나라 국민조차 훨씬 큰 폭으로 생의 여유를 즐기는데 말이죠.” 덕분에 이씨에겐 일 중독이야말로 ‘생활’과 ‘생존’의 경계를 흐려 가정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경계요소가 되었다.

지구촌 구석구석을 닥치는 대로 온몸과 손발짓으로 부딪치는데 얘깃거리가 없을 리 없다. 사실 만 19년간의 공직생활중 미국·중국·일본·호주·몽골 등 5개국을 7차례 출장과 연수로 다녀온 이씨를 제외하면 다른 가족에겐 이번이 첫 해외여행. 그래서 아내 홍씨에겐 이번 여행이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다. 힘든 순간들이 오히려 가족애를 북돋우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에선 이씨의 이름을 인터폴의 한국인 수배자 이선(LeeSun)으로 오인한 경찰에 끌려갈 뻔했고, 이집트에선 노점에서 요깃거리로 사먹은 음식 때문에 식중독에 걸려 가족 전원이 하루 반을 꼬박 숙소에서 누워 지내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렌터카를 도둑맞아 이를 하소연하러 현지 한국대사관에 찾아갔다가 당한 불친절을 인터넷상에 고발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선 만원버스에서 지갑을 소매치기당했고, 오랜 여행으로 너덜너덜한 여권을 위조한 것으로 오인 받아 마지막 여행지인 싱가포르 입국심사 때는 말레이시아로 강제출국까지 당했다.

“생생체험 365일 세계를 내 품안에”
여행은 끝났다. 지난 7월10일 이씨 부부는 결혼 17년 만에 사글셋집 생활로 돌아갔다. 새 보금자리는 처남 소유의 아파트. 아이들도 오는 9월 1년 전 다닌 학교의 같은 학년에 복학한다. 하지만 여행으로 인해 이들은 엄청나게 변했다.

“1년간 휴학하면 또래들보다 한 해 늦게 학교를 다녀야 한다”며 여행을 반대한 첫째 홍일은 “이제 두 학년에 걸친 친구들을 갖게 되어 무척 기쁘다”며 너스레를 떤다. 넓은 세상을 돌며 안목을 넓힌 건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서울시청의 ‘잘 나가던’ 행시(24회) 출신 직원인 이씨도 “일터에 복귀하면 보도블록 하나, 건널목 하나를 봐도 참신한 행정 아이디어가 쏟아질 것 같다”며 자신감을 내비친다. 더할 나위 없이 삶의 에너지를 되찾은 이씨지만 그에게도 아픔은 있다. 이번 여행중 양친을 모두 잃었다. 여행 10일 전 갑작스런 병환으로 입원한 부친이 여행 출발 12일 만에 별세했고, 지난 4월 멕시코 여행중엔 13년간 심장병을 앓아온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려 잠시 귀국해서 여행을 접을까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도중에 주저앉으면 죽도 밥도 안 될 거라는 초조함이 더 컸습니다.” 자연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그러나 이씨의 가족은 주위의 격려에 힘입어 예정대로 여정을 마쳤고, 그 결과 수많은 지인(知人)을 얻었다.

여행에 소요한 총경비는 1억2000만 원. 당초 예상보다 3000만 원이 더 들었지만 친지와 친구, 학교선배 등의 ‘십시일반’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바쁜 일정 틈틈이 웹투어 사이트(www. webtour.com)에 올린 이씨의 여행일기에 하루 조회건수가 수백 건을 기록하며 성원해 준 각지의 한국인 네티즌들도 큰 힘이 되었다. 비록 ‘작전팀장’으로 여행에 온 신경을 쏟아 67kg의 체중이 15kg이나 줄었지만, 비어 있는 이씨의 마음을 ‘새로 채운 것들’이 그 이상의 무게는 너끈할 듯싶다.

여독이 채 안 풀렸지만 이씨 가족의 욕심(?)은 여전하다. “여건만 된다면 10~20일쯤 더 여행하고 싶었는데… 미얀마·라오스·베트남의 독특한 불교문화를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동남아에서만 태국·캄보디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4개국을 여행했는데도 아직 성에 차지 않은 탓일까. 이씨는 조만간 이번 여행에서 느낀 점들을 일기 형식에 담아 책으로 엮을 계획이다.

‘어떤 사람이 내게 미련 곰탱이 같다고 한마디했다. 맞다. 나는 미련하다. 미련한 사람은 떠나고, 미련하지 않은 사람은 미련이 많아 떠나지 못한다. 당신도 당신의 꿈을 위해 한번 미련해 보지 않겠는가’(이씨가 웹투어 사이트에 올린 글 ‘여행을 떠나는 이유’ 중)

여행의 끝은 또 다른 설렘의 시작. 배낭 하나 달랑 메고 1년간 전 세계를 돌며 미련을 떨친 이씨와 그의 가족은 이제 ‘일상’의 긴 여정을 다시 시작했다. 이성씨 또한 지난 7월16일부터 ‘이성 서울시정개혁단장’으로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주간동아 2001.07.26 294호 (p42~43)

< 김진수 기자 > jo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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