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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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인터걸 수출 이제 그만”

세계 곳곳서 50만 명 매춘 종사 … 인권·여성단체 ‘해외알선·인신매매’와 전쟁 선포

  • < 남혜현/ 연세대 유럽문화정보센터 전문연구원 > russ3023@unitel.co.kr

    입력2005-01-11 16: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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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인터걸 수출 이제 그만”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러시아 여성들이 한국으로 몰려드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상점 점원으로 취직하더라도 한 달에 40~50달러의 임금을 받는 게 고작인 이들에게 “한국에서 무용수로 일하면 한 달에 400달러를 번다”는 구인광고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이런 광고에 빠져 한국으로 건너와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러시아 여성은 대략 23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시야를 세계로 넓히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러시아 매춘 여성들의 수요가 가장 많은 곳은 프랑스·영국·독일 같은 서유럽과 중동, 중국 등.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정부 통계로는 현재 50개 국에서 무려 50만 명 가량의 러시아와 구소련 국가 출신 여성들이 몸을 팔고 있다. 흔히 ‘인터걸’이라 불리는 이 여성들 가운데는 10대도 상당수 있다. 이에 따라 최근 러시아 민간단체들과 정부는 ‘여성 수출국’의 오명을 벗기 위한 대책 수립을 위해 나서고 있다.

    국제 인권단체인 ‘국제구조네트워크’(GSN)에 따르면, 러시아의 여성들이 외국 매춘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1991년 구소련이 붕괴하면서부터다. 특히 심각한 문제는 이들의 해외 진출에 러시아 마피아가 연계되어 그 수가 부쩍 늘어났다는 점. 최근 몇 년 사이엔 한 해에 수만 명씩 해외로 진출하고 있으며, 마피아는 이를 통해 연간 7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것으로 추정한다.

    외국에서 가정부·보모·주방일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직업소개소의 말을 믿고 현지에 도착한 여성들은 곧바로 폭력조직에게 협박당해 섹스산업에 휘말린다. 일단 조직범죄단체 손에 넘어가면 여성들은 꼼짝없이 묶인 신세가 된다. “만약 도망쳐 경찰에 신고하면 도움을 받기보다는 매춘혐의로 체포된다”는 식의 협박도 뒤따른다.

    성적 착취현상에 이러한 매춘행위의 강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유럽에서는 배우자를 구하기 힘든 알코올 중독자, 패륜아, 폭력범죄 전과자 등이 국제 중매회사를 통해 선진국의 영주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나 ‘잘 사는 나라에서 살 수 있는 권리’의 대가로 불평등한 결혼에 따르는 모든 모욕과 멸시, 그리고 때로는 폭력과 착취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러시아 “인터걸 수출 이제 그만”
    많은 러시아 국민은 자국의 여성들이 해외에서 받는 이같은 수난에 대해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 “데부슈카(젊은 아가씨)는 무기·석유와 함께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수출품”이라는 자조 섞인 한탄도 있다. 최근에는 그리스로 돈을 벌러 갔다가 매춘을 강요받던 ‘레나’라는 여인이 국제 매춘조직의 실상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러시아 국내에서 이 문제가 크게 이슈화하기도 했다. 자국 내 급속한 에이즈 확산의 원인이 일정부분 국제매춘 때문이라는 점도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최근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국가에서는 에이즈가 연간 40%를 웃도는 증가율을 보이며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1987년 에이즈 감염자를 처음 발견해 99년까지 2만9000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난해에만 5만 명이 새로 감염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10년 전만 해도 이 지역이 ‘에이즈 무풍지대’였다는 점에서 구호기관들은 이러한 현상이 최근의 급속한 사회구조적 변동과 직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로 인한 마약의 확산과 더불어 해외에서 매춘활동 후 귀국한 여성들의 급증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한 러시아의 40개 비정부기구(NGO)들은 지난 5월16일 ‘엔젤연합’(Angel Coalition)을 결성해 해외매춘 반대운동을 벌이기로 했다고 지난 5월17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전한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엔젤연합은 해외매춘 알선을 금지하는 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현행법이 어린이의 해외매매만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체들은 특히 농촌 처녀들이 중개인의 꾐에 빠지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육 캠페인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이 단체들은 전 세계 여성단체들의 지원을 받아 ‘직업소개소에 더 이상 속지 말자’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공영TV의 협조로 무료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한편 최근 전 세계 여성 대표들은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와 러시아의 무르만스크 등에 모여, ‘인신매매 및 불법매춘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당사국은 물론 여성들을 ‘수입’하는 국가들도 협조할 것을 촉구했다. 국제인권단체와 유럽연합(EU) 역시 인권 차원에서 ‘인터걸’ 문제 해결을 위한 조치들을 강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로 사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기는 어렵다. 여성을 해외로 송출하는 산업이 러시아 사회 전역에 걸쳐 워낙 뿌리깊은데다 ‘돈벌이’가 되는 사업으로 인식되는 까닭이다. 엔젤연합의 발렌티나 고르차코바 대표는 “전 세계에 걸쳐 섹스산업은 한해 70억∼120억 달러의 순이익을 거두고 있으며, 이는 마약업보다 큰 규모”라고 말한 바 있다.

    성폭력 피해자 돕기 본부의 타티아나 쇼르니코바 공동의장은 “러시아 여성의 해외수출은 부패한 관료와의 결탁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여권 취득연령이 16세로 되어 있는 러시아에서 어떻게 14세 된 소녀가 쉽게 여권을 얻어 외국으로 나갈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나라에 와 있는 러시아 여성들의 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러시아 정부의 외교적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요즘 날마다 5~10건씩 접수되는 자국 여성에 대한 폭행·불법감금·월급체불·임금착취·강간 등 인권 침해사례에 대한 구체적 증거와 기록을 수집 정리하고 있다. 지난 2월 말 열린 한-러 정상회담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재한 러시아 여성의 인권 침해문제를 강도 높게 제기해 우리 정부가 외교적 수세에 몰린 바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국무총리실 산하에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실태 파악에 나섰으며, 국가정보원에서는 매춘이나 인신매매를 목적으로 러시아 여성을 초청하는 인력회사를 내사중이다. 그러나 상처 입은 러시아의 자존심을 추스르기에는 늦은 감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외교가에서는 러시아와 국익이 걸린 담판을 벌일 때 러시아 여성에 대한 인권 침해자료가 우리 나라에겐 급소를 찌르는 비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주한 러시아 대사관 법률 자문역인 이원형 변호사와 러시아 여성 초청 기획사인 CM기획의 권상철 회장을 중심으로 해 러시아`-`CIS국민인권보호위원회의 결성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러시아 국내외의 적극적인 노력에도 근본적인 원인 치유가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오랫동안 인터걸 문제를 다뤄온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알렉산드로프는 지난 3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납치나 유괴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으로 해외매춘을 택하고 있다”며 근절이 쉽지 않을 것임을 토로한 바 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닥친 심각한 경제난과 사회 혼란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인터걸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 겐나디 주가노프가 이끄는 러시아연방공산당(KPRF)이 “한때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던 소련의 딸들이 세계의 거리에서 몸을 팔고 있는 현실을 보라”며 인터걸 문제를 정부 공격의 소재로 삼고 있는 것 역시 이런 배경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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