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2

2001.05.03

“스스로 문제 해결… MIT 합격 꿈이 현실로”

허동성군 어머니 최장월의 교육일기… “부모는 올바른 길 제시 - 조련하는 매니저”

  •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

    입력2005-01-21 13: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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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문제 해결… MIT 합격 꿈이 현실로”
    장례식은 예행연습이 없다. 1990년 6월7일, 심장병을 앓던 남편이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유언 하나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나는 이대로 기절을 해야 하나, 아니면 버텨야 하나 망설였다. 쓰러진다 해도 붙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이미 85년 나는 큰아들 일구를 잃었다. 18개월 전부터 한글을 깨치고 세 살 때 한자를 읽어 신동 소리를 듣던 아이였다. 다섯 살짜리가 “살려달라”고 고통을 호소했을 때는 이미 암 4기였다. 다시 5년 뒤 남편마저 잃고 나는 서른일곱 살의 미망인으로 홀로 서야 했다. 둘째 동성이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

    그러나 눈물 흘릴 새도 없이 장례식을 치르고 내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미국 대사관이었다.

    사람들은 남편 죽고 자식 앞세운 여자가 웬 미국 관광이냐고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성이와 나에게는 앞으로 살아갈 목표가 필요했다. 이 여행을 통해 아들에게 넓은 땅을 보여주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스스로 묻고 답하게 할 작정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남은 조의금은 남편이 주고 간 마지막 선물이라고 감사하게 여기며 여행경비로 썼다. 아들과 여름 방학 한 달 내내 신나게 여행을 마치고 귀국길에 비행기 안에서 나는 깜짝쇼를 했다. 곤히 잠든 아들을 깨우며 “큰일났어. 우리가 자느라고 비행기를 갈아타지 못했구나. 국제미아가 될지도 몰라. 엄마는 영어를 못하니까 네가 스튜어디스 누나에게 말 좀 해봐라”고 하자 잠결에 놀란 아이는 허둥거리며 설명을 하려했으나 영어를 못하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동성이는 왜 영어공부를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스스로 문제 해결… MIT 합격 꿈이 현실로”
    돌아오니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다. 결혼생활 12년간 대기업 기획조정실에 근무하던 남편만 바라보며 살았다. 하지만 이제 내 손으로 먹고 살아야 했다. 다단계판매를 시작했다. 엄마가 아침부터 밤까지 전국을 헤매고 다니는 동안 동성이는 실컷 놀기만 했다. 나는 아이가 밥을 먹었는지 숙제를 했는지 알아볼 여력도 없었다. 5학년 때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았는데 6학년이 되니 아예 성적표를 보여주려 하지 않을 만큼 엉망이었다. 동성이를 때리기도 하고 물구나무서기 벌로 얼굴의 실핏줄이 터지기도 했지만 성과는 없이 모자간의 관계만 극도로 나빠졌다.



    직장을 그만두었다. 덜 먹고 덜 쓰면 한동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은 나중에 다시 벌면 되지만 동성이가 기초를 다질 기회를 놓치면 영영 후회할 일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방학을 이용해 다시 미국에 다녀왔다. 동성이는 그때 MIT 대학 건물 앞에서 찍은 사진을 책상 위에 놓고 공부를 했다. 훗날 MIT 입학원서에 그 사진을 붙이면서 동성이는 이렇게 썼다. “이때 나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어린아이로 이 학교를 방문했지만, 이제 당당한 학생으로 갑니다. 그때 만납시다”라고.

    아침마다 7시면 아들을 깨워 교육방송 라디오 영어강좌를 듣게 했다. 아이가 졸린 눈을 비비며 듣는 둥 마는 둥 하자 아예 벨트 지갑에 워크맨을 넣어 허리에 채우고 이어폰을 꽂게 했다. “엄마는 너를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말하며 아이를 안아주고 학교에 보낸 뒤 귀가시간에 딱 맞춰 먹을 것을 준비했다. 고개를 창 밖으로 길게 빼고 기다리면 아이도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넘어질듯 뛰어왔다.

    “스스로 문제 해결… MIT 합격 꿈이 현실로”
    중학교에 진학한 동성이는 과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혼자 몇 시간씩 끙끙거리는 것이 예사였는데 한 문제를 가지고 새벽 2시까지 꼬박 5시간을 앉아 있는 모습도 보았다. 그것을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시간이 아까웠던 것이다. ‘누가 옆에서 가르쳐주면 금방 저 문제를 풀고, 다른 문제로 넘어갈 수 있을 텐데…’라는 안타까움이었다. ‘이래서 과외를 시키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과외 시킬 돈이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동성이는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중학교 입학 후 첫 시험에서 반 1등을 했다. 우리는 일찍부터 과학고 진학을 목표로 경시대회 준비도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했는데 동성이에게는 약점이 하나 있었다. 체육점수가 형편 없는 것이었다. 내신성적에도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공부만 하니 건강에도 좋을 리 없었다. 100m 달리기는 20.4초로 또래 아이들에 비하면 형편없이 느렸고 턱걸이는 한 번도 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동성이의 체력관리가 시작되었다. 당시 살던 아파트가 10층이었는데 날마다 10층까지 계단을 뛰어오르고 잠자리에 들기 전 윗몸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를 시켰다.

    동성이는 강원도 횡성 민족사관고가 개최한 영재캠프에 참가한 후 진로를 바꾸었다. 동성이는 5단계 테스트를 모두 통과했다. 그러나 테스트를 통과한 학부모 가운데 막상 자녀를 기숙학교에 보내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언젠가 동성이는 내 곁을 떠날 것이고 그러려면 연습이 필요했다.

    97년 동성이가 민족사관고로 떠난 뒤 나의 아침은 라디오 FM 교육방송으로 시작되었다. 토플과 영어회화 프로를 듣고 있자니 이 좋은 내용을 혼자만 듣는 게 아까웠다. 나는 카세트 테이프에 일일이 녹음해 아들에게 부쳤다.

    “스스로 문제 해결… MIT 합격 꿈이 현실로”
    다음 단계 목표는 국제물리올림피아드 출전이었다. 동성이와 경쟁하는 아이들은 이미 중학교 2학년 때 경시대회에 입상해 과학고 진학자격을 얻은 뒤 마음 편히 올림피아드 준비에 전념해 왔다. 1년 늦게 이 팀에 합류한 동성이는 부족함을 많이 느꼈는지 더욱 열심히 했다. 아이슬란드에서 열린 제29회 국제물리올림피아드에 한국 대표 5명에 선발되었지만 장려상에 그쳐 또 한번 크게 실망했다.

    98년 6월 나는 신문 동정란에서 하버드 대학 총장 부부가 한국을 방한한다는 소식을 보고 문득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버드대 동창회를 힐튼호텔 1층에서 개최한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아들을 하버드에 보내기 위해 꼭 총장을 만나야 한다고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아무 자격도 없는 주부가 총장을 만나겠다고 우기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총장에게 전할 영문편지에는 우리 아이를 전액 장학생으로 받아달라는 내용을 담았고, 동성이가 직접 쓴 ‘I’m so happy’라는 제목의 영어 에세이를 동봉했다. 그리고 한복을 입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까지 멋지게 한 뒤 힐튼호텔로 향했다. 참석자들은 당시 외무부 장관을 비롯해 대부분 고위관료, 대학 교수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옷차림은 모두 평범한 양복이었다. 빨간색 한복이 하버드 총장의 눈에 띄었는지 내게 다가와 “You are so beautiful.”이라고 말을 건넸다. 그런데 리셉션 도중 갑자기 총장 부부가 사라졌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23층 VIP 만찬회에 참석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 23층으로 올라가 총장 면담 신청을 했다. 그때도 역시 빨간색 한복은 위력을 발휘했다. 멀리서 나를 알아본 총장이 아는 사람이라며 입장을 허락하도록 했다. 나는 여러 사람들의 눈길을 받으며 총장 앞으로 가서 간단히 인사를 하고 내가 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는 이 편지에 다 있으니 편안한 시간에 꼭 읽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천천히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한 편의 영화를 찍는 기분이었다. 엄마의 활약소식을 들은 동성이는 더욱 미국 유학에 확신을 갖고 준비하게 되었다.

    99년 봄 전미국영재학회 소나시 회장이 한국 민족사관고를 방문했다. 선생님들은 수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와 같은 학교 윤영섭군(올해 하버드대 입학)의 어머니가 학교 안내를 맡았다. 소나시 회장은 동성이가 쓴 ‘I’m so happy’라는 글에 감동했고 그 후 아들과 직접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나중에 MIT 등 미국 대학에 보내는 영문편지를 일일이 읽고 수정해 보내주기도 했다. 이렇듯 동성이는 돈 한푼 안들이고 세계적인 교수에게서 개인 레슨을 받은 셈이었다.

    고2 때 미국 대학 진학에 확신이 서자 동성이는 한국 교과서와 참고서를 버렸다. 마침 98년 9월 민족사관고에 유학 준비반이 생겼다.

    당시 동성이는 주말마다 국제물리올림피아드 출전 준비를 위해 서울에 왔다. 동성이는 혼자 강원도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와 터미널에서 밥을 사먹고 서울대에 가서 공부한 후 다시 강원도로 돌아갔다. 내가 날마다 3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아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면 동성이는 “엄마 나는 한복(민족사관고 교복) 입고 금메달 받아 세계인들 앞에서 큰 절 하는 장면이 어른거려 공부가 안 돼요”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99년 7월22일, 이탈리아에서 제30회 국제물리올림피아드가 열렸다. 시험이 끝났을 텐데 아들에게 전화 한통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라디오 뉴스를 듣고 허동성군이 금메달을 땄다며 전화를 걸어주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함께 출전한 민족사관고의 윤영섭군은 은메달을 땄다.

    올림피아드의 쾌거로 자신감을 얻은 우리 모자는 99년 9월 라디오에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98년) 러플린 교수(스탠퍼드대)의 한국 방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러플린 교수는 한국고등과학원과 포항공대에서도 강연 일정이 있었고, 동성이는 수업에 빠지면서 그 분의 강의를 들을 만큼 열성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미국 대학 입시준비가 시작되었다. 동성이는 SAT I 1420점(1600점 만점), SAT II 1600점, 토플 627점, 작문 627점, AP 테스트에서 물리 수학 화학 각각 5점 만점을 받아 하버드 스탠퍼드 MIT 칼텍에 지원했다.

    솔직히 미국 대학에 지원을 하고도 계속 불안했다. 만약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비싼 등록금을 감당할 형편이 못 되었다. 나는 동성이에게 국내 의대에 지원하라고 권했다.

    “스스로 문제 해결… MIT 합격 꿈이 현실로”
    서울대 합격을 확인하고 다시 미국대학에서 소식이 오기만 기다렸다. 하버드는 대기자 리스트에 올랐고, 스탠퍼드는 불합격. 그러나 MIT에서 1만6000달러의 장학금을, 칼텍은 2만달러의 장학금을 약속했다. 누군가 말했듯이 우리 형편에 미국 유학은 사치스럽고 막연한 꿈이었다. 하지만 우리 모자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나는 동성이가 여기까지 오는 데 엄마로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약 엄마가 없었다면 오늘의 동성이도 없을 것이다. 나는 돈 한푼 받지 않는 아들의 매니저였다.

    영재는 보석으로 치면 원석이다. 어떤 장인이 어떻게 가공하는지에 따라 보석의 가치가 달라진다. 나는 부모가 보석가공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흙 속에 박힌 보석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것도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소외된 영재들을 찾아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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