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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여인들의 ‘국적 없는 타향살이’

한국 남성과 2년 내 파경 땐 국적 취득 불가 … 중국선 이미 호적 상실 ‘무국적 상태’ 전락

  •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

조선족 여인들의 ‘국적 없는 타향살이’

조선족 여인들의 ‘국적 없는 타향살이’
지난 4월16일 서울 구로동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J씨(37). 그에게 ‘고국의 봄’은 결코 화사하지 않다. 중국 헤이룽장(흑룡강) 성 하얼빈 시가 고향인 그는 조선족 남편의 외도로 현지에서의 초혼에 실패한 뒤 99년 7월 한국 남성인 L씨(51)와 재혼했다. 그러나 ‘제2의 인생’을 일구려던 꿈은 이내 물거품이 되었다. 결혼 직후부터 이어진 L씨와 시어머니의 ‘동반 폭음’과 이유 없는 폭언을 참다못해 두 달 만에 집을 뛰쳐나온 것. J씨는 “알고 보니 남편에겐 다른 조선족 여성에게서 위장결혼 피해를 본 경험이 있었다”고 말했다.

가출 뒤 서울의 몇몇 공장을 전전한 그는 지금 아현동의 한 봉제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해서 받는 월 90여만원으로 기약 없는 생활을 한다. “이럴려고 온 게 아닌데… 차라리 불법 체류자면 좋겠어요. 하나뿐인 아들(13)을 보러 중국으로 돌아갈 순 있잖아요.”

제도적 맹점 탓 불법 체류자 양산

J씨는 아직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해 자신의 신분을 무국적자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무국적자가 아니다. 출입국관리법상 체류기간을 넘긴 불법 체류자다. 그럼에도 관광 비자로 입국한 뒤 국내에 불법 거주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통상적인 불법 체류자와는 처지가 확연히 다르다. 실제로 한국 남성과 결혼한 조선족 여성 중 상당수는 엄밀히 따져 법적으론 무국적자가 아니면서도 실질적으론 J씨처럼 무국적자나 진배 없는 ‘기구한’ 생활을 하고 있다.

1997년 12월 개정(98년 6월 시행)한 현행 국적법은 한국인 배우자와 결혼한 외국인의 경우 2년 이상 그 배우자와 혼인상태로 국내에 거주하거나, 혼인한 지 3년이 경과한 때에는 혼인상태로 한국에 1년 이상 거주하면 귀화 허가 신청을 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귀화 신청 후 법무부 장관의 귀화 허가가 나면 6개월 이내에 원래 국적을 포기하는 각서를 제출해야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국적업무 소관 부서인 법무부 법무과 관계자는 “위장결혼의 횡행을 막고 법상의 남녀평등을 위한 조치”라고 개정 취지를 밝혔다. 종전엔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 여성은 바로 귀화 신청을 할 수 있었으나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 남성은 3년간 한국에서 결혼상태를 유지하도록 제한한 결과, 형평성 논란이 일어 통일된 귀화 신청 요건을 마련했다는 것. 물론 개정 조항은 조선족 여성에게도 적용된다.

조선족 여인들의 ‘국적 없는 타향살이’
그러나 이 규정을 따르면 남편의 폭력이나 외도, 그와의 사별 등 피치 못할 사유가 생겨 2년간의 결혼생활을 채우지 못한 조선족 여성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문제는 이 경우 한국 국적도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 돌아가도 자신의 호적이 없어 신분이 ‘공중에 떠버리는’ 상태가 발생한다는 점. 조선족 여성들에 따르면 이는 양국간 결혼 서류 수속이 끝난 뒤 결혼이 성립하였음을 확인하면 중국에서는 해당 여성의 거주지 민정국이 당사자의 호구(戶口·중국의 호적)를 삭제하기 때문이다.

위장결혼 방지를 위한 개정 국적법 조항과 중국측의 행정 조치가 맞물린 곳에 도사린 제도적 맹점이 오히려 ‘선의’의 불법 체류자를 양산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물론 피해는 조선족 여성의 몫이다. 이들이 한결같이 자신을 무국적자로 ‘오인’하는 것은 중국에 돌아가더라도 자신의 신분을 확증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사증과에 따르면 한국 남성과 결혼하는 조선족 여성은 F-1(방문동거 체류자격) 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뒤 외국인 등록을 하고 체류기간을 지정받는다. 하지만 남편의 신원 보증이 없으면 기간을 더 연장할 수 없어 체류기간을 넘기고, 이는 부득이 불법 체류로 이어지는 것이다.

“건강보험은커녕 기본적 생활도 누리지 못한다. 핸드폰과 통장도 지인(知人) 명의로 개설해야 한다. 괜히 불심 검문에라도 걸려 중국으로 강제송환당하지나 않을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옌볜 출신의 C씨(29) 역시 가출한 경우. 경북 상주의 이모집에 기거하는 그는 99년 9월 결혼 후 전북 익산에 신접살림을 차렸지만, 남편(38)이 평소 온순하다가도 술만 마시면 수시로 칼을 꺼내들고 “찔러죽인다”고 협박하는 통에 유산까지 하고 두 달 뒤 집을 나왔다. 그는 “가출 후 이혼 법률상담도 했지만 중국 여성의 말을 사실로 믿어주는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C씨는 그저 ‘한국 여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이모부의 농사일을 거들며 생활하지만 자포자기 상태다. 그는 지난해 8월로 체류기간을 넘겨 불법 체류자가 되었다.

경기도 양주군의 한 월셋방에 거주하는 조선족 K씨(34)의 사정은 더 딱하다. 국적법 개정 전인 96년 11월 수원의 한 회사원(46)과 결혼한 그는 결혼과 함께 귀화 신청이 가능한 당시 법에 따라 귀화 신청을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귀화 허가가 나길 기다리던 중 사건이 터졌다. 남편이 결혼 직후 폭력사건으로 수감되었는데도 시댁에서 “알코올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고 속인데다 출소한 남편의 술주정과 구타가 이어지자 결혼 3개월 만에 가출, 결국 주민증을 발급받지 못한 것. 현재 포장공장에서 일하는 K씨는 직장 동료들이 간혹 중매를 주선해도 선조차 볼 수 없다. 유일한 신분증이랄 수 있는 여권과 외국인 등록증을 귀화 신청 당시 당국에 반납했기 때문.

조선족 여인들의 ‘국적 없는 타향살이’
K씨처럼 국적법 개정 이전에 결혼했더라도 귀화 신청 전에 남편과 이혼 또는 사별했거나, 국내 사정에 어두워 ‘한국 국적을 얻으려면 중국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는 규정 자체를 몰라 불법 체류자로 남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실태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법무부 국적업무출장소측은 “현황 파악이 어렵다. 인지한 사례라면 모르되 그렇지 않은 경우 일일이 적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만큼 현실적으로 그들이 별다른 불이익을 본다고 말하긴 어렵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현재로선 이들을 구제할 마땅한 방법은 없어 보인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면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자진 출두해 불법 체류 사실을 신고하고 소정의 조치를 받은 후 일단 출국했다가 후에 적법 절차를 밟아 재입국한 뒤 다시 귀화 신청을 해야 한다. 이런 까다로운 절차는 일반 불법 체류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을 구제하려는 외교적 시도가 있는지 또한 의문이다. 주중(駐中) 한국 대사관(베이징)에 의하면 한국 남성과의 결혼을 위해 비자를 발급받는 조선족 여성은 무려 월평균 500여 명. 1년이면 줄잡아 6000명선이다. 물론 이들 모두가 ‘선의’를 지녔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언제든 같은 피해가 발생할 수 있음을 감안하면 피해 여성이 얼마든지 늘 가능성 또한 다분하다.

주중 한국 대사관 결혼담당영사는 “결혼 후 중국에서 호구를 삭제하여 미묘한 지위에 놓이는 이런 특수 사례가 있다는 사실은 안다. 이들을 돕는 것이 인도적 차원에서 바람직하다는 데 공감한다”면서도 “그러나 결혼보다는 한국땅을 밟는 게 목적인 조선족 여성의 위장결혼에 속아 피해를 보는 한국 남성의 수가 조선족 피해 여성보다 8, 9배는 더 많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서울의 한 종교단체는 불법 체류자로 전락한 조선족 여성의 보호활동에 나서 해당 사례를 수집중이다. 이에 참여하고 있는 인권운동가 최황규씨(38)는 “조선족 여성들이 당한 ‘선의의 피해’를 위장결혼에 따른 폐해와 단순비교하기보다는 자신의 의사에 반해 이국에서 불법 체류자가 된 ‘사회적 약자’란 측면에 눈을 돌려야 한다”며 “소수라고 해서 이들의 인권문제를 무작정 방치할 수만은 없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무국적자는 1962년 국내에서도 발효된 UN 다자조약인 ‘무국적자의 지위에 관한 협약’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하지만 무국적자도 ‘악의의’ 불법 체류자도 아닌 조선족 여성들을 보호할 제도적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자신이 ‘고국’이라고 하는 이국 땅에서 퇴색한 ‘코리안 드림’을 되새김질하며 절망적 삶을 이어갈 뿐이다.



주간동아 2001.05.03 282호 (p46~47)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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