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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현명한 이기주의자’가 되라

체면을 버리고 나를 위해 살자!

'개인적 성취감' 최우선 가치 새 화두로 등장··· 건강한 자아 실현은 사회발전 '에너지'

  •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

체면을 버리고 나를 위해 살자!

체면을 버리고 나를 위해 살자!
남을 배려하라. 우리 모두 한배를 탔다. 남을 도와야 너도 도움을 받는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너 자신의 이익을 뒤로 미루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 언제나 남들을 위해 살아라. 그러면 그들은 너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우리가 늘 들으며 자란 ‘좋은 말씀’들이다.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100% 실천은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비슷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누군가 나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게다가 노골적으로 그것이 ‘착취’라고 비난한다면?

일본 고베 의대 요리후지 가츠히로 교수(정신과)의 ‘현명한 이기주의’(참솔)는 남들이 하라는 대로 했을 때의 결과를 이렇게 설명한다.

“ ‘오른뺨을 맞거든 왼뺨을 내밀라’는 도덕적 이상론을 받아들였을 때 기뻐할 사람은 물론 주위의 이기적인 자들이다. ‘많이 보시할수록 공덕을 쌓는다’는 말을 믿는 호인은 그 교단의 ‘밥’이 될 것이다. ‘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형제를 도와라’고 믿는 사람은 부모형제에게서 신뢰를 받고 감사의 말을 듣고 스스로도 자랑스러운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조금 무형의 보상을 받는 대신 에너지와 돈을 수탈당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도 솔직한 이 말은 우리를 후련하게 하는 게 아니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것은 2년 전 상명대 김경일 교수(중어중문학)가 ‘효도가 사람 잡는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을 때의 불편함과 비슷하다. 김교수는 99년 논란을 일으켰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 “효도는 자식들이 모든 것을 다 바쳐 해드려야 하는 일방적 희생의 위험 부담과, 받는 사람도 자신의 처지에 걸맞은 적절한 처방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양쪽 모두 희생자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즉 ‘효’는 국가나 사회적 책무를 개인에게 전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고 “이기주의라는 하나의 부도덕을 용인함으로써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다. 물론 ‘현명한 이기주의’로 행동했을 경우의 이야기다. ‘어리석은 이기주의’와 ‘현명한 이기주의’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요리후지 교수는 ‘이기적 유전자’를 주장한 도킨스의 이론을 빌려 인간을 ‘선심파’ ‘사기파’ ‘나이스파’ (nice guy의 줄임말)로 나누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협력과 배신과 경원(敬遠)을 되풀이 한다. 즉 선심파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매번 협력을 해주는 이타주의적 사람이고, 반면 사기파는 늘 배신만 선택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다.

중간의 나이스파는 상대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는데, 사기꾼을 만나면 처음 한번은 속아서 협력할지 모르지만 다음부터는 사기꾼을 경원한다. 물론 이들은 선심파를 만나면 협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건전하려면 ‘기브 앤드 테이크’가 분명한 나이스파가 많아져야 한다. 반면 이타적인 선심파가 늘어날 경우 이들을 등쳐먹고 살아가는 사기꾼도 덩달아 늘어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커진다. 흔히 착한 사람일수록 고통받는 것을 보고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선심파 쪽에서 먼저 사기꾼에게 ‘악’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인간 세상에서 완전한 이타주의자는 금방 자멸하며, 완전한(어리석은) 이기주의자는 주위에서 배척당하고, 적당한 이타주의자는 환영받겠지만 남의 봉이 되기 쉽다. 따라서 적당한(현명한) 이기주의자만이 우리 스스로는 물론, 사회적인 건강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서울대 손봉호 교수(사회철학)는 ‘현명한 이기주의’에서 한걸음 나아가 ‘고상한 이기주의’를 역설한다.

“고상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죠. 그렇다면 고상한 게 어떻게 이기주의냐고 물을 텐데, 이타주의도 넓은 의미에서 이기주의라고 한다면 이해가 될 겁니다.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멀리 내다보고 이익을 취하는 이기주의는 곧 이타주의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오랜 역사적 경험으로 터득한 지식이죠. 만약 기독교인이 하느님의 ‘상’을 바라고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칸트는 이조차 비윤리적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우리는 고상한 이기주의라고 부르자는 것이죠. 윤리란 실천이 핵심이지 실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이나 설득은 무의미한 것 아닙니까.”

지난 한해 우리 사회의 문화적 트렌드를 주도한 것은 ‘느림’이라는 화두였다. 점점 가속화하는 문명의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느림의 자유’는 새로운 탈출구였다. 때맞춰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단순하게 조금 느리게’ ‘천천히 생각하는 여유와 느리게 배우는 지혜’ ‘느리게 사는 사람들’ ‘느리게 사랑하는 것의 기쁨’까지 에세이든 처세술이든 각종 ‘느림 상품’이 나왔다.

그러나 ‘느림’에는 현실 도피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철학자 김용석씨는 ‘야수의 눈빛이 두려운가’(에머지새천년 2001년 2월호)에서 2000년 한해의 문화적 대세를 △동양적인 것 △느림의 추구 △자연회귀의 욕구 △단순한 삶에의 동경 등 크게 4가지로 정리한 후 “이 4가지는 문명의 폐해에서 탈출 내지 도피의 양상을 띤다”고 지적했다. 시간의 재촉에 떠밀리지 않기 위해 잠시 쳇바퀴 밖으로 나올 수는 있어도 결국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게 현실이다.

김용석씨는 ‘느림론자’들이 주장하는 ‘고급스러운 권태’라든가 ‘천천히 산책하기’ ‘포도주 즐기기’ ‘글 쓰기’ 같은 처방이 빠르고 바쁘게 살 수밖에 없는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느림’의 메시지는 매혹적이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에 도피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가장 먼저 자기를 생각하라는 ‘이기주의’는 고정관념에 따른 거부감만 극복한다면 다분히 현세적이고 유용한 가치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요제프 키르쉬너의 ‘이기주의자 트레이닝’을 번역한 유혜자씨는 “유럽 사회에서 에고이즘은 이미 7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IMF 관리체제 이후 집단이 나를 보호할 것이라는 신뢰가 깨지고 개인적 성취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감상에 젖기보다 좀더 이론적으로 무장해서 자기를 성취하고 싶어합니다. 서구사회에서 키르쉬너가 큰 인기를 얻은 이유는 그냥 이기주의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알려주기 때문이죠.”

12년간 외국인 회사에서 근무한 백모씨(36)는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황당함을 이렇게 전한다. “일이 많아 거의 날마다 야근을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찔끔거리는 날도 많았는데 아무도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자기 일만 끝나면 ‘안녕’하고 가버리는 분위기가 얼마나 야속했는지. 게다가 칸막이로 되어 있어서 누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다른 사람 전화 받아주는 것도 시간 낭비라면서 개인 책상에 자동응답기가 달려 있는 것도 낯설기만 했어요.”

그러나 백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들이 도와주지 않는 진짜 이유를 알았다. 능력이 부족해서 제시간에 처리하지 못한다면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고, 한 사람이 처리할 일이 너무 많은 게 문제라면 추가인력을 요구하거나 업무를 분담해야 한다. 정에 이끌려 개인적으로 도와준다고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대한민국의 끈끈한 ‘우리 문화’ 속에서 성장한 백씨가 ‘합리적 이기주의’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는 그 후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기주의자가 되는 데도 연습이 필요하다. 키르쉬너는 “최선의 자아 실현을 위해, 남들에게 끌려다니는 것을 막는 방법”부터 익히라고 조언했다. 사실 개인주의를 서구 문명의 본질로 보는 유럽이나 미국 사회에서 이와 같은 이기주의는 ‘나 자신부터 생각하기’ 훈련을 위한 하나의 충격요법이다. 하지만 ‘의리에 죽고 사는 한국인’에게 갑자기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다.

참솔 출판사의 김혜숙 사장은 “이기주의라는 말을 전면에 내세우기까지 오랫동안 망설였다”고 말한다. ‘현명한 이기주의’가 일본에서 출간한 것은 96년이며, 99년 여름 한국판 출판 계약을 맺었으나 출판사측은 2년 가까이 기다리며 시기를 조율했다. 키르쉬너의 ‘이기주의자로 살아라’도 출간 직전까지 에고이스트라는 제목을 그대로 쓸지 다른 표현으로 바꿀지를 놓고 고민할 만큼 이기주의라는 말이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도한 집단주의로 개인이 상실되기 쉬운 한국 사회만큼 ‘적당한’ 또는 ‘현명한’ 나아가 ‘고상한’ 이기주의를 필요로 하는 곳도 없다.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탁월하게 분석한 최준식 교수(이화여대 한국학)는 한국인에게 집단주의가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를 “유난히 정(情)에 약하고 윗사람은 체면을, 아랫사람은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늘 남을 의식하고 산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이기주의 주창자들이 가장 먼저 버리라고 조언하는 부분이다.

재즈클럽 ‘원스 인 어 블루문’의 임재홍 사장은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며 산다”고 말한다. “하고 싶은 일은 늘 머리 속에만 있고 끊임없이 해야 할 일에 묻혀 살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이란 것도 남을 의식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창회, 조문, 각종 모임까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순간 하고 싶은 일은 포기해야만 하죠. 그것을 부지런히 잘 사는 거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게 우리 사회입니다.”

그러나 ‘이기주의’라는 직설법을 쓰지 않았을 뿐, 우리 사회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이기적으로 살기 위한 연습을 해 왔다. 공격적인 페미니즘 차원에서 제기한 ‘나쁜 여자론’이 바로 그것이다. ‘나쁜 여자론’은 대상을 여성으로 국한시켰지만 “규율을 어겨라, 자신만의 규칙을 세워라, 짧고 분명하게 ‘노’라고 말하라, 누구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말아라” 등의 내용은 이기주의자 되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 후 등장한 ‘마음 가는 대로 하라’ ‘자신 있게 노(No)라고 말하라’ ‘네 뜻대로 살아라’ 등에 담긴 메시지는 모두 고정관념이 만든 터부를 깨고 남들이 바라는 인생이 아닌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라, 즉 이기주의자가 되라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돈을 쓰더라도 자신을 위해 쓰는 법을 가르치며, ‘아름다운 개인주의’ ‘나는 나’와 같은 광고 카피도 무게 중심을 전체에서 ‘나’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헤드헌팅회사인 유니코서치 이기대 사장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위적으로라도 개인과 개인 간에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한 가지 방법으로 외국계 기업처럼 개인에게 일정한 업무 공간을 확보해 주면 다른 사람의 불필요한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실제 업무에 전념하는 시간도 길어진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기주의’라는 세속적인 도덕관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마음의 문제다. 요제프 키르쉬너는 여전히 이기주의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이렇게 달랜다. “모두가 남들에 대해서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신경을 쓴다면 불행한 사람들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불행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을 것이다.” 이 정도라면 “너는 이기적이야”라는 말이 예전과는 다르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만이 현명한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간동아 2001.05.03 282호 (p32~35)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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