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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무너지는 산업정책

21세기엔 뭘 먹고 사나

IT산업 비중 낮고 전통제조업은 몰락 위기…세계 경쟁력 갖춘 품목 55개뿐, 고부가가치 제품 창출 시급

21세기엔 뭘 먹고 사나

21세기엔 뭘 먹고 사나
삼성전자 AMLCD 사업부 조용덕 부장의 올해 화두는 오로지 ‘원가 절감’이다. 한국의 대표 수출상품으로 삼성전자에서만 연간 30억달러의 수출실적을 유지하고 있던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분야에서 후발국가인 대만의 맹추격으로 인해 치열한 가격 경쟁이 예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부장은 “원가 절감 이외에도 특수형 모니터나 핸드폰용 컬러 LCD 등 대만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대만의 약진으로 인해 최근 3, 4개월 사이 TFT-LCD 가격이 30% 이상 떨어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15인치 LCD 모니터가 7, 8월만 해도 500달러 수준이던 것이 현재는 350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올해 안에는 300달러까지 떨어지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올해부터는 국내시장에서도 공급과잉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는 데에 업계의 관측이 일치하고 있다.

특히 국내 제조업체 관계자들보다도 국내 제품에 대한 구매를 담당하는 외국 바이어들은 상황을 좀더 심각하게 보는 편이다. 미국계 기업의 한 바이어는 “한국은 이미 저가형 시장에서 후발 주자인 대만에 밀리고 있는 것 같다. 대만은 본격적 양산체제를 갖춘 지 6개월 만에 삼성과 LG필립스 등 세계 1, 2위의 한국 기업을 따라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장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70∼80년대부터 특정 산업 분야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배치해 국가적 투자에 나선 대만이 D램 시장에서 한국 등 선발국가를 따라잡은 것과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우리 수출의 최대 주력군인 반도체 분야도 상황은 크게 좋아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중반만 해도 전년 동기 대비 수출 증가율이 50% 이상을 유지해왔으나 하반기 이후 계속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수출 주력품목인 64메가D램 가격은 아직도 5달러 선을 밑돌고 있다. 한국전자산업진흥회 이우종 상무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수출 물량이 30% 이상 증가해왔지만 올해는 증가폭이 15% 정도에 그칠 것 같다”고 내다보면서 “부품소재 산업을 어떻게 육성하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수출 주력 산업 분야에서도 각종 부품의 국산화율이 미진한 현실은 고스란히 대일 무역적자로 되돌아오고 있다. 수입업계에서는 일본에서 수입되는 제품 중 중간부품의 비중이 70%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21세기엔 뭘 먹고 사나
과거 몇 년 동안 흔들림 없는 수출 주력 품목으로 손꼽히던 주요 산업 분야에서 올해 들어서는 어느 해보다 고전이 예상되고 있다. 사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지난 3년간의 경제정책을 살펴보면 수출 산업 육성을 포함해 산업경쟁력을 강화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정책은 아예 찾아보기 힘들었다. 모든 경제정책의 중심이 구조조정에 맞춰지다보니 금융과 거시 분야 이외에는 경제정책의 수단을 동원하기가 어려웠다. 의문은 자연스레 21세기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갈 주력산업이 도대체 뭐냐는 것으로 이어진다. IT산업도 아직 국민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낮고 전통 제조업은 몰락 위기라는 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재계에서는 정부를 향해 민관합동의 ‘경쟁력강화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해놓았다. 정부도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이러한 기구가 필요하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경제 전문가들은 이런 방식의 민관합동위원회는 결국 재계의 이해에 정부가 끌려가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 국가적 비전을 만드는 작업을 벌이기보다는 단기적 부양정책에 기울고 말 것이라는 지적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도 당시 최종현 전경련 회장의 주도 아래 비슷한 기구를 만들었으나 ‘결국 해놓은 게 뭐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글로벌 경쟁 시대의 정부의 산업정책이란 더 이상 무용한 것인가.

산업연구원 박중구 박사는 “구조조정이란 비핵심 분야를 과감하게 축소하고 핵심 역량을 강화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재무구조 개선에만 집중해왔다. 구조조정 자체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성과를 전혀 거두지 못했고 금융과 기업, 정부는 모두 도덕적 해이에 빠졌다. 물류, 유통을 강화하고 e-비즈니스 기반을 확충한다는 ‘산업정책’은 있었으나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고 지적했다.

기업측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재계에서는 구조조정이 끝나지 않은 분위기를 의식해 ‘산업경쟁력 강화’를 내세우는 것이 자칫 ‘구조조정 중단’을 요구하는 것처럼 비치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 전경련 박종윤 산업조사팀장은 “구조조정도 경쟁력 강화의 일환이기 때문에 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이슈와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일”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민관합동의 경쟁력강화위원회 설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일선 기업들의 목소리는 각종 위원회 같은 기구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 시장을 파고 들어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산업 분야를 개발, 지원하는 것이라는 데에 모아지고 있다. 산자부 자문기구에 참여하고 있는 한 기업인은 “정부가 목돈을 출연해 해당 분야 산업 진흥을 꾀하는 데는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문제는 예산이 기술개발 기반을 구축하는 데 장기투자되는 것이 아니라 ‘나눠먹기’식으로 단순 집행된다는 데에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올해 경제적 파급효과가 큰 생물산업부문 예산 2184억원 가운데 63.8%(1393억원)를 상반기에 배정하기로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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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세계시장에서 1등을 하는 ‘월드 베스트’제품이 별로 없다는 데에 있다. 전경련 조사에 따르면 세계시장에서 1위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제품은 독일이 669개, 미국이 618개나 되고 우리와 경쟁관계인 일본이 354개, 대만이 206개인데 비해 우리는 55개에 불과하다. 세계시장은 이미 과점화 상태로 급격하게 접어들고 있다. 비단 벤처기업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승자독식’(Winner takes all) 현상이 나타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상위 20%의 기업이 나머지 80%를 지배한다는 ‘20-80’ 원칙은 일반화한 지 오래다.

80년대만 해도 한국은 메모리반도체,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등 정보기술산업 분야에서 속속 세계 최정상에 올라섰다. 기업들의 과감한 투자와 정확한 시장 전망이 들어맞았고 여기에 세계 최고의 기술력이 뒷받침되었다.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나 TFT-LCD, 휴맥스의 셋톱박스, 대륭정밀의 위성방송수신기 등은 지금까지도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간판 종목들이다. 또 초음파진단기나 CDMA단말기, 음성인식시스템 등도 신규시장 개척 당시부터 세계시장에서 돌풍을 몰고왔던 아이템들이다. 그러나 생물산업 등 신규 유망산업에서 이들의 뒤를 이을 새로운 간판 스타를 아직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편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동시에 올해 산업별 전망 기상도 중에서도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조선분야의 경우도 아직까지 유조선이나 벌크선 등 범용선박 중심의 생산 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분야의 고부가가치 상품인 호화유람선은 수주 실적이 전무한 형편이라는 사실이 이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결국 전통산업을 어떻게 고부가가치화하는지가 관건이라는 이야기. 산업연구원 박중구 박사는 이를 ‘퓨전’이라는 개념으로 풀어 설명했다. 기존산업의 IT화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기술간의 교류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 말하자면 IT와 바이오, 바이오와 전통산업 간에 기술 교류를 활성화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정부가 나서서 각종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IT화를 통한 전통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지향하는 마당에 이제 ‘전통산업’이라는 용어 자체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디까지가 전통산업이고 어디까지가 첨단산업인지 무의미해지고 있을 뿐더러 이러한 분류 자체가 거추장스러운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이현식 이사는 “정부가 IT나 바이오산업의 미래에 대해 명확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이를 위해 정부가 정보화 시설 투자에 세액 공제제도를 도입하는 등 기술적 지원에 힘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거 한국경제의 성장을 주도하던 조선, 철강, 반도체, 자동차 등 10대 전략산업에 신소재, 정밀화학 등 새로운 산업 분야를 접목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글로벌 스타기업 성장의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인력이다. 미래시장의 트렌드를 정확하게 읽고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을 상품으로 연결할 수 있는 인력들이야말로 글로벌 시대의 알짜배기 인재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력 양성 정책은 아직도 공급자 위주의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차세대 신주도산업으로 꼽히는 생물산업 분야만 보더라도 이 분야 종사인력은 전체 과학기술인력의 6% 수준에 머물고 있다. 연평균 3, 4% 증가하고 있는 수준이지만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바이오 분야와 같은 고도 기술분야일수록 인력 양성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 현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해외 한인 과학자들의 귀국을 유도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재외 한인 과학자들이 국내에 들어오더라도 보수가 낮고 안정적 직위가 보장되는 경우가 적어 귀국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민간과 정부 부문이 공동으로 전문가 네트워크를 구축해 산업정책 정보를 공유하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사실 인력 양성 정책이나 IT화 지원 등 기술 인프라 구축을 지원하는 방안 이외에 산업정책과 관련해 정부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정부가 금융기관을 동원해 자금과 인력을 특정 산업 분야에 인위적으로 배분하던 개발연대식 산업정책과 달리 ‘시장 자율의 글로벌 경쟁 시대에 산업정책이 무슨 소용이냐’는 시각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그러나 전문가들은 시장 자율을 가장 강조하는 미국의 예를 들어 글로벌 경쟁시대에도 산업정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미국의 경우 기술정책을 중심에 놓고 인력 정책, 통상전략 지원, 전자상거래 진흥 정책 등이 정교하게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다. 전시성 행사도 없다. 아직도 구조조정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 경제 현실에서는 한번쯤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다. 정부가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간동아 2001.01.18 268호 (p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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