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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자금수사, 김기섭·강삼재로 끝?

구속된 김씨 “내가 다 했다” … 권영해-김기섭 ‘질긴 인연’도 눈길

안기부 자금수사, 김기섭·강삼재로 끝?

안기부 자금수사, 김기섭·강삼재로 끝?
안기부의 1996년 15대 총선자금 불법지원 사건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1월5일 발부된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에 대한 구속영장에 따르면 김씨는 운영차장 시절 대한투자신탁 등 7개 금융기관에 6개 단체 명의로 개설된 계좌에 안기부 예산(국고) 940억원을 분산 예치했다가 ‘돈 세탁’ 과정을 거쳐 신한국당의 2개 계좌에 입금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1157억원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검찰수사 결과 이 거액은 그동안 안기부가 기업을 통해 조성, 관리해온 ‘통치자금’이 아닌 ‘순수 안기부 예산’인 것으로 밝혀져 더 충격을 주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이 1157억원은 안기부 일반예산과 재경원 예비비 1148억원, 안기부 남산 청사 매각 보상금(156억원) 중 9억원 등으로 조성되었다. 그동안 의혹은 많았지만 통치자금 성격의 돈이 아닌 안기부 예산이 특정 정당에 지원된 사실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1월8일 현재 검찰에 따르면 이 돈의 사용처는 △95년 6·27 지방선거 때 217억원 △96년 4·11 총선 때 940억원 등으로 드러났다. 총선 때 불법 지원한 940억원 가운데 △408억원은 당시 신한국당 4·11 총선 후보자 185명(당시 야당 3명 포함)에게 최소 2억원∼최대 15억원까지 배분되었으며 △86억원은 중앙당에 입금돼 중앙당 비용으로 사용되었고 △나머지 446억원은 개인 유용 등으로 사용처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 안기부의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지원자금 217억원 가운데 △150억원은 광역단체장 후보에게 1인당 최고 10억원까지, 기초단체장 후보에게 1인당 최고 2억원까지 배분되었으며 △나머지 67억원은 다른 목적에 사용된 것으로 검찰은 파악하고 있다.

박순용 검찰총장은 1월8일 기자간담회에서 “구속된 김기섭 전 차장이 안기부 예산으로 선거자금을 지원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누구에게 줬는지는 묻지 마라. 권영해 부장도 모른다’는 말만 해 공모 및 지시자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밝혀 수사의 방향과 가닥이 잡혔음을 시사했다. 이에 따라 선거자금 조성 및 신한국당 유입과정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아들 현철씨, 그리고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등은 검찰 조사대상에서 제외될 것으로 보인다.

안기부 자금수사, 김기섭·강삼재로 끝?
검찰은 그러나 당시 신한국당 선거대책본부장(사무총장)으로서 안기부 돈의 유입 및 배분과정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강삼재 의원에 대해서는 조사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계속 소환에 불응할 경우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국회에 체포동의를 요청하는 한편, 이원종 전 정무수석과 권영해 전 안기부장도 금명간 소환 조사할 예정이라는 것.



이원종 전 수석에 대한 조사가 이뤄질 경우, 이는 아직 당(강삼재 총장)과 안기부(김기섭 차장)의 ‘연결고리’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안기부 예산에서 빼돌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지원금은 217억원인데 비해 총선 지원금은 그의 4.3배인 940억원이다. 따라서 검찰은 95년 지자체장 선거에서 패배한 신한국당이 총선을 앞두고 청와대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청와대가 이를 수용해 김 전 차장에게 자금 지원을 지시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안기부 예산 1157억원을 인출해 신한국당에 보낸 것은 당측의 요구에 따라 청와대측이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라는 추정이다.

권영해 전 부장의 경우, 김기섭 전 차장은 ‘권부장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확인 차원에서라도 소환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검찰은 지난해 10∼12월 김기섭 전 차장과 권영해 전 부장이 수시 접촉하며 대책회의를 가진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권씨 또한 96년 4·11 총선 당시 권력 핵심인사들과 잇따라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김씨에 대한 동향 파악 과정에서 이같은 사실을 포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차장은 1월5일 구속이 집행되면서도 “안기부 예산 집행은 운영차장의 전결 사항이었다”며 권영해 부장의 무관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당시 권 전 부장이 매달 재무관으로부터 예산 지출명세 등을 보고받은 것에 비추어볼 때 권씨가 총선자금 지원과정에서 이를 지시했거나 적어도 예산전용 집행을 묵인하는 등 모종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검찰은 또 이 과정에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각종 여론조사 비용 명목으로 상당액을 떼냈고, 이 돈이 다시 총선에 출마한 그의 측근들에게 뿌려진 사실도 함께 밝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테면 96년 1월 안기부 예산 26억원이 여론조사 비용으로 책정됐으나 상당액은 다른 곳에 사용된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 돈을 받았던 일부 총선 후보자들은 현재도 남은 돈을 은행에 예치해 놓고 있거나 자금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계좌 추적 결과 밝혀지고 있다는 것.

그러나 검찰이 수사대상을 사실상 김기섭-강삼재 라인으로 제한함으로써 이 사건은 더 미묘한 국면으로 돌입했다. 물론 검찰로서는 구속된 김기섭씨가 자신 이외의 관련자에 대해서 일절 진술을 하지 않고 있어 수사 확대가 한계에 부닥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회창 총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을 사실상 수사대상에서 배제한 것은 검찰 수사가 정치권의 ‘고난도 게임’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검찰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예산 유용사건 수사의 칼끝은 어차피 이회창 총재를 겨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YS계 인사들(김기섭-강삼재)이 걸려든 것이다.

정가의 한 관측통은 일찌감치 체념한 김기섭씨와 달리 강의원은 아직 모른다고 버티고 있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자기 책임 하에서 했다’고 모든 것을 떠맡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있다고 진단했다. 그들이 자연인 현철씨를 끌어들이는 것은 정치의 슬픈 자화상을 드러낼 뿐이고, ‘윗선’에 미룬다고 해서 책임이 감면되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진퇴양난이기는 당시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이었던 이회창 총재도 마찬가지다. 이총재가 계속 강삼재 의원을 두둔하거나 ‘방탄국회’를 열어 보호할 경우 자신이 연루(사전 인지 및 사후 보고)된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강의원을 ‘희생양’으로 삼을 경우 YS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은 물론 자칫 분당의 우려마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이총재는 도덕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위험이 있다.

YS 또한 무관함을 주장하지만, YS 정부가 부산-경남지역에 인허가를 남발한 종금사 등 제2 금융권의 부실이 IMF 사태의 한 원인임을 감안할 때, 이번 사건으로 다시 한번 IMF 사태를 불러온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신한국당이 안기부로부터 받은 선거지원금을 예치한 경남종금의 소유주는 강삼재 의원과 마산고 동창인 김인태 전 경남건설 회장이다. 김씨는 라스베이거스에서 거액도박을 한 혐의(외환 유출)로 구속된 바 있다. ‘경남신문’ 소유주였던 김씨는 현재 미국에 도피중이다.

지난 97년 4월 이른바 김현철씨 ‘국정농단’ 사건으로 ‘옷’을 벗고 청문회에 나가게 된 김기섭 전 운영차장은 “내가 결백한 것은 안기부 직원들이 다 알고 있다”며 반발했다. 그러나 김씨는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안 되어 구속되었다. 98년 3월 이른바 북풍조작(윤홍준 비방 기자회견) 사건으로 검찰에 출두한 권영해 부장 또한 ‘할복’으로 자신의 무죄를 항변했으나 며칠 뒤 역대 국가 정보기관장으로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재임 중 정치공작 개입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 그 뒤로도 권씨는 오익제 편지사건, 김대중 X파일 발간, 안기부 직원 불법감금 사건, 공기업을 통한 불법모금 사건, 총풍(銃風) 사건 등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네 번이나 추가 기소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두 사람은 소문난 ‘현철맨’이었다. 이들은 97년 4월 김현철씨 국회청문회가 끝난 뒤 현철씨의 안가로 활용했던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 빌라에서 비밀리에 회동한 사실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어 사퇴 요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렀다. 권부장은 당시 국회 정보위에서 “옛 부하였던 김차장과 평소 후배로서 잘 알고 지내던 김현철군을 위로하기 위해 내가 만나자고 먼저 전화했다”면서 “그 자리에서 (검찰에 대한) 수사 방해나 외압을 위한 협의는 일절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회동은 이미 특정인이 국가 정보기관을 ‘사조직화’했음을 입증하는 우울한 풍경이었다. 두 사람의 사례는 너무 멀리 있으면 춥고 너무 가까이 가면 타 죽는다는 ‘권력과의 잘못된 만남’을 잘 보여준다고 할까.



주간동아 2001.01.18 268호 (p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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