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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정치·행정 '새판' 짜야한다

정치·행정 '새판' 짜야한다

정치·행정 '새판' 짜야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한의 극단적 좌우대립 구도는 남한사회 내부의 정치질서를 근본적으로 왜곡시켰다. 외생적으로 도입된 서구적 혹은 자본주의적 체제, 이념, 제도,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대안 제시는 불온한 사회주의적 행태로 의심받거나 처벌받는 상황에서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이념적 토론이 불가능했다. 반공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절대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남한은 역설적으로 탈이데올로기적 사회가 되었다. 이는 반미주의와 사회주의 아래에서의 북한 상황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러한 탈이데올로기적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매우 독특한 방향으로 자신들의 의사와 이해관계를 표출해 왔는데 핵심적 사례로서 도덕주의, 연고주의, 국가권위주의를 들 수 있다.

도덕주의적 경향은 특히 정치지도자들을 선출하고 평가할 때 국가와 사회의 주요 사안에 대한 이념적 입장과 정책적 판단보다는 개인의 전력, 행태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결정요인이 되는 현상이다. 이는 남한에 진정한 의미의 이념정당, 정책정당이 부재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다. 의회와 정부를 맡겠다고 나서는 후보자들은 뚜렷한 이념이나 정책을 갖지 않아도 그다지 불리할 것이 없으며 시민들은 주로 이들의 개인적 도덕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국정은 무자격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문제가 나타났다. 일시적으로 이념논쟁이 있어도 대개의 경우 매카시즘적 음모에서 발단된 것이었다.

연고주의적 경향은 일반 시민, 정치엘리트, 경제인 가릴 것 없이 지연, 학연, 혈연 등 연고관계에 기초해 협력하고 지원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자본주의적 계급구조가 형성되었지만 최근까지도 노동자, 농민 등 계급을 기반으로 한 조직적 행동이나 정치적 결사가 탄압받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신해 출신 지역과 학교, 친족관계 등에 기초해 전략적으로 뭉친 집단들이 정치를 좌우하고 경제를 주물러 나갔다. 일반 시민들은 이에 비판하거나 저항하기보다는 스스로 연고관계를 찾아 투표를 하고 이익을 챙기려 들었다. 특히 정치에서의 지역대립구도는 지역의 본원적 이해관계와는 별 상관없는 감정적 요소들에 의해 국정이 표류하도록 만들어 왔다.

국가권위주의적 경향은 남-북한의 준전시적 동원체제하에서 사회 각 부문이 국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관리되고 통제받는 상황에서 나타났다. 농촌, 도시를 막론하고 시민들은 자율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집단행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정당해 왔다. 반면 사회 전체에 미세하게 뻗쳐 있는 국가관료기구들이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해 왔다. 이러한 구도로 인해 국가(관료)와 시민은 대등한 관계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토론하거나 상호간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수많은 관료들은 관할 영역을 중세적 봉토로 인식하여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부정한 수입을 챙겨왔다.

남북 화합으로 정치 민주화의 큰 장애물 사라져



이러한 경향들은 흔히 우리의 전통 유교문화와 연관지어 해석되어 왔으나 근본원인은 오히려 굴절된 현대사에서 찾아야 한다. 도덕주의, 연고주의, 국가권위주의는 조선시대 유교적 정치-사회 질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실제 내용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다만 이러한 비민주적 질서를 통해 권력을 창출하고 재생산하는 집단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전통과 역사를 자의적으로 끌어대는 과정에서 유교문화가 이용되었다. 이는 특히 박정희 시대에 두드러진 현상이다.

남-북한 화해-협력 시대의 개막은 민족통일의 전주곡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미완인 우리 사회의 정치민주화를 위한 결정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의의가 있다. 이제야 북한을 의식하지 않고 국정에서 다양한 이념-정책적 대안들을 논의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인물 비방, 연고 동원, 권력남용의 구습에서 전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기성정치인이나 이들의 비위 맞추는 데나 급급한 관료들의 국가적 용도가 이제는 소멸하는 것이다. 스스로 의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냉전질서 덕분에 이념적-정책적 식견을 제대로 갖춘 훌륭한 인사들에게 정치-행정 공간을 내주지 않고 버텨온 것이다. 민족화합의 시작과 함께 이제 정치와 행정에 전혀 새로운 판을 짜야 할 때가 왔다.



주간동아 2000.12.07 262호 (p1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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